고독과 외로움의 차이
지금 내마음은 평화롭다. 좌선을 막 마친 상태에서 눈을 감고 있으면 순수의 마음이 된다. 여기에 ‘절구커피’ 한잔 마시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오늘도 이렇게 하얀 여백과 마주하고 있다.
재가우안거 74일째이다. 안거에 들어 간지 10월 1일 오늘로써 네 달 되었다. 지난 7월 20일 안거가 시작된 이래 8월, 9월에 이어 네 달째 들어가는 날이다. 안거가 끝나는 날은 10월 17일이다.
나는 이번 안거기간 중에 목표를 달성하였는가? 여전히 진행 중에 있다. 방석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큰 것이다. 앉아 있다 보면 내가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존재가 되는 것 같다.
부처님 가르침에 차별은 없다. 누구나 가르침을 실천하면 성자가 될 수 있다. 마치 어떤 땔감에서든지 불꽃이 타오르는 것과 같다.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하면 그 순간만큼은 내가 왕이 된 것 같다. 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것이다. 왕권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고요한 마음이다.
현실에서 나는 보잘 것 없다. 부의 척도로 보았을 때 하류층이다. 학벌도 보잘 것 없다. 사회적 지위가 있는 것도 아니다. 가문이 좋은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눈 감고 앉아 있으면 왕권이 부럽지 않다는 것이다.
브라질에 삼바축제가 있다. 일년에 한번 있는 축제를 위해서 참가자는 일년 내내 준비한다. 그런데 그들의 주거환경을 보면 열악하기 그지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화려한 무대에 서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다.
축제는 화려하다. 끊임 없이 무희는 사람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한다. 슬럼가에 사는 무희일지라도 이날만큼은 여왕이 되는 것이다.
축제가 끝나면 사람들은 썰물처럼 빠져 나간다. 무희는 환경이 열악한 주거공간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좋았던 기억이 있어서 삶의 의미를 찾을 것이다.
수행자는 늘 혼자이다. 화려한 축제의 장에 설 수 없다. 눈을 감고 홀로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할 때 누구 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내면을 보고자 수행한다.
외향적인 사람이 있고 내향적인 사람이 있다. 사회생활 하다 보면 외향적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살다 보면 마음은 늘 바깥을 지향한다. 그렇다면 내향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직장생활을 그만 두면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는다. 전화부터 끊기는 것이다. 이럴 때 외로움을 느낄 것이다.
2005년 직장생활을 그만 두었다. 홀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오라는 데가 없었다. 집에만 있을 수 없어서 안양 호계동 공구상가에 작은 사무실을 임대했다.
작은 임대사무실에서 여름과 겨울을 보냈다. 냉방도 안되고 난방도 안되는 사무실에서 홀로 있었다. 인터넷도 한두달이다. 나중에는 마치 독방에 수감된 것 같았다.
마음이 늘 바깥에 있으면 마음은 늘 들떠 있다. 마음의 안정을 바깥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결국 혼자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늘 사무실에 혼자 있다. 2005년이후 19년동안 홀로 있는 것이다. 어쩌면 강제 일인사업자가 된 것인지 모른다.
이제 더 이상 마음은 외부로 향하지 않는다. 마음을 내부로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오래 되지 않았다. 2020년 1월 사무실에 명상공간을 만들어 놓기 시작한 것이 시초이다.
어제 유튜브에서 본 것이 있다. 평소 즐겨보는 ‘5분 뚝딱 철학’에서 본 것이다. 그것은 ‘고독과 외로움의 차이’에 대한 것이다.
고독과 외로움은 다른 것이다. 고독은 자신에게 의지하는 것이고 외로움은 타인에게 의존하고자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영상을 보니 이것 이상이다.
사람은 내향형과 외향형이 있다. 내향형은 자신의 에너지가 안으로 향하는 사람이다. 이는 자기의 관심의 자기 자신한테 향해 있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외향형은 내향형 사람과 정반대이다. 자신의 관심이 외부로, 즉 다른 사람, 다른 세계로 향하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내향형일까 외향형일까?
누구나 직장생활을 하면 외향형이 될 수밖에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를 맺고, 세계와 세계 사이에 관계를 맺고 또한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장생활을 그만 두면 관계는 끊어진다. 어쩌면 강제로 내향형이 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이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직장생활 할 때는 외향형이었다. 늘 바깥에서 즐거움을 찾고자 했다. 아침에 뉴스를 보고 TV에서는 재미 있는 프로를 보았다. 직장에서 회식을 하면 빠지지 않았고 그들과 어울렸다. 이런 생활을 20년 하다가 혼자가 되었다.
홀로 되었을 때 당황했다. 아무도 찾아 주지 않는 사람이 되었을 때 버려진 것 같았다. 인터넷 가지고 노는 것 밖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홀로 되었을 때도 끊임 없이 즐거움을 추구했다. 눈으로 즐길거리를 찾는 것이다. 인터넷으로 이것 저것 볼거리를 찾았다. TV를 볼 때는 리모콘이 늘 가까이에 있었다.
마음이 외부로 향해 있으면 들뜨기 마련이다. 늘 즐길대상을 찾는 감각적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람을 사귀고 모임에 참여하는 것인지 모른다.
인터넷도 TV도 홀로 된 자의 마음을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직장을 그만 둔지 일년이 되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글이라는 것을 한번 써 볼까?”라고 생각한 것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글쓰기는 마음을 내부로 돌리는 것이었다. 외부로 향해 있는 마음을 내부로 돌리는 데 있어서 글쓰기만한 것이 없었던 것이다!
2006년 6월 처음 글쓰기를 시작했다. 이후 지금까지 18년동안 거의 매일 쓰다시피 하고 있다. 매일 오전일과는 글쓰기로 보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업무를 보았다. 이렇게 본다면 2006년 이후 나는 내향적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본격적인 내향적 삶을 살게 된 것은 2020년 이후이다. 사무실에 명상공간을 만들어 놓고 매일 앉아 있고자 한 것이다. 고독한 수행자의 삶의 시작이다.
홀로 되었을 때 두 가지 타입이 있다. 하나는 외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고독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
친구 중에 한 사람이 있다. 그는 늘 외롭다고 말한다. 홀로 살기 때문일 것이다. 오래 전에 이혼한 것이 큰 이유라고 본다. 새로운 배우자를 만나면 덜 외로움을 탈까?
누구나 나이 들면 혼자가 된다. 둘이서 살다가 한 사람이 죽으면 혼자가 될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이 외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이 든 노인에게 종종 듣는 말이 있다. 그것은 ‘외롭다’라는 말이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배우자라도 한사람 구해 주어야 할까?
배우자가 있어도 외롭기는 마찬가지이다.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과 함께 산다면 함께 살아도 외로운 것이다. 그래서 마음은 늘 바깥으로 향한다.
이런 말이 있다. 남자는 직장과 가정이 없으면 방황하기 마련이라는 말이다. 여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직장도 없고 가정도 없다면 어떻게 될까? 방황에 플러스(+)가 되어 더욱더 방황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방황하는 것은 외로운 것이 큰 이유가 된다. 짝을 찾으려고 하는 것도 외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짝을 찾았다고 해도 외부에서 즐거움을 찾고자 한다면 외롭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기 외로움에 지친 사람이 있다. 외로워서 못살겠다고 말한다. 이는 상대방에게 의존하고자 하는 마음에 기반한다. 또한 외부에서 즐거움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감각적 즐거움이기 쉽다.
홀로된 친구는 매일 술을 마신다. 전처가 떠난 이후 거의 매일 술로 세월을 보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럴 때 술이 친구가 된다.
술로 사는 사람은 감각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알코올에 의존하는 사람은 감각에 의존하는 삶이다. 외부에 의존하고자 하는 외로운 사람이 이에 해당된다.
나이가 들수록 누구나 외로운 사람이 된다. 직장에서 쫓겨나도 외로운 사람이 되고 가족이 해체 되어도 외로운 사람이 된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외로움타령만 하고 있을 수 없다.
나이가 들수록 고독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는 마음을 내부로 돌리는 삶을 말한다. 내향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내향적인 사람이 되면 여러 이점이 있다. 내향적 사람은 정신적 에너지가 자기 안으로 향해 있기 때문에 자기자신에 더 집중하게 된다.
자신과 자기는 다른 말이다. 융의 분석심리학에 따르면 자신은 ‘자아(ego)’에 가깝고, 자기(self)는 완성된 형태로서 참자아에 가깝다. 마음이 늘 외부로 향해 있는 외향적 사람은 자아를 세우고, 마음이 내부로 향하는 내향적 사람은 자신의 완성을 향해 갈 것이다.
외로움을 타는 사람은 마음이 늘 들떠 있다. 또한 마음은 늘 감각 대상에 가 있다. 이렇게 마음이 늘 감각대상에 가 있다 보면 불선(不善)한 마음이 된다.
마음은 본래 선한 것인가 불선한 것인가? 불교적 관점으로 본다면 마음은 본래 불선한 것이다. 왜 그런가? 인간은 ‘오취온’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오온에 집착된 존재로 태어났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태어날 때부터 욕망이 세팅되어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욕계, 욕망의 세계에 태어난 것이다.
인간은 욕망의 존재이다. 욕망이 있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식욕이 있는 것은 인간이 욕망의 존재임을 잘 증명한다. 또한 성욕이 있는 것도 인간이 욕망의 존재임을 잘 말해준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마음은 본래 불선한 것이다. 욕망을 기본 베이스로 하여 태어난 오취온적 존재의 마음은 불선할 수밖에 없다.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있다.
“흔들리고 동요하고 지키기 어렵고
제어하기 어려운 마음을
지혜로운 사람은 바로 잡는다.
마치 활제조공이 화살을 바로 잡듯.”(Dhp.33)
“물고기가 물에서 잡혀 나와
땅바닥에 던져진 것과 같이
이 마음은 펄떡이고 있다.
악마의 영토는 벗어나야 하리.” (Dhp.34)
“원하는 곳에는 어디든 내려앉는
제어하기 어렵고 경망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말로 훌륭하니,
마음이 다스려지면, 안락을 가져온다.”(Dhp.35)
마음은 흔들리고 동요하고 지키기 어려운 것이라고 했다. 또한 제어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마음은 본래 불선한 것임을 말한다.
마음이 본래 불선하다는 것은 “원하는 곳에는 어디든 내려앉는다.”라는 말로도 알 수 있다. 마음을 가만 내버려 두면 어떻게 될까? 늘 감각대상에 가 있게 될 것이다. 부처님은 이런 불선한 마음에 대하여 ‘악마의 영역’에 있다고 말했다.
마음은 내버려 두면 제멋대로가 된다. 늘 감각영역에 가 있고 늘 불선한 것에 가 있다. 이런 마음은 제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멀리 미치고 홀로 움직이고 신체가 없는 동굴에 숨어 있는 마음을 제어하는 님들은 악마의 밧줄에서 벗어나리라.’(Dhp.37)라고 한 것이다.
마음은 제어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내부로 돌려야 한다. 내향형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고독한 수행자’가 되는 것이다.
외로운 노인이 될 것인가 고독한 수행자가 될 것인가? 나이가 들면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외로움타령을 하는 사람은 외롭게 살다가 죽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고독한 수행자가 되면 죽음을 관조하며 죽을 수 있다.
고독한 수행자가 되고자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면을 비추어 볼 줄 알아야 한다. 수행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 같다.
매일 행선과 좌선을 하고 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일인사무실에서 홀로 있는 것이다.
수행은 수행처에서만 하는 줄 알았다. 커다란 명상홀에서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하면 수행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수행은 남 보기 좋으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수행은 내면을 비추어 보는 것이기 때문에 홀로 수행하는 것이 맞다.
초기경전을 보면 수행승들이 모여서 수행했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처럼 명상홀에 모여서 집단으로 행선도 하고 좌선했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 대신 초막과 같은 개인거처에서 수행했다. 오늘날로 말하면 ‘꾸띠’에서 개인수행한 것이다.
초기경전에 중각강당이 나온다. 부처님은 강당에서 설법 했다. 이렇게 본다면 강당은 설법하는 곳이다. 수행은 개인거처에서 하고 법문 들을 때는 강당에 모이는 것이다.
재가자의 우안거는 개인사무실에서 행하고 있다. 선원에 들어가서 할만한 처지가 못 된다. 생업이 있어서 한철 시간 낼 수 없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다. 사무실 공간을 반으로 칸막이해서 수행처로 활용하고 있다.
고독한 삶을 살고자 한다. 외로운 삶은 지양한다. 외로운 삶을 사는 것은 일반사람들이 사는 삶의 방식이다. 그러나 수행자는 고독한 삶의 방식을 지향한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고독한 삶을 지향하는가?
영어로 외로움은 론니리스(Loneliness)이고 고독은 솔리튜드(solitude)이다. 둘 다 혼자 있는 상태를 말한다. 혼자 있는 심리상태는 같은 것이다. 그러나 차이는 분명히 있다. 어떤 것인가?
외로움은 자신의 방에 혼자 있는 것과 같다. 외로움의 방에서는 다른 사람의 얼굴을 대면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인간은 누군가의 얼굴을 보면서 살아야 한다. 그렇게 진화 해 온 것이다.
외로운 사람은 누군가를 찾아서 방 밖으로 나가고자 한다. 그러나 방 밖에도 아무도 없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방에 있어도 혼자이고 방 바깥에도 혼자일 때 외롭다고 생각할 것이다. 외로운 상태가 되는 것이다.
고독한 사람도 방 안에 혼자 있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외로운 사람과 같다. 그런데 고독의 방에는 거울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거울인가? 그것은 자신의 내면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다.
고독한 사람은 자신의 내면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대면할 필요가 없다. 혼자서도 잘 놀 수 있는 것이다.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된다. 자신의 내면과 만나는 고독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외로움과 고독에 대한 여러 정의가 있다. 폴 틸리히는 “혼자 있는 아픔은 외로움이고, 혼자 있는 즐거움은 고독이다.”라고 했다. 혼자 있는 것에서는 똑같지만 외로운 자는 아픔, 슬픔, 절망이 있는 것이다. 반대로 고독한 수행자는 기쁨, 행복, 평온이 있다.
외로움과 고독에 대한 또 하나의 정의가 있다, 미국의 정신의학자 해리 스택 설리반은 “외로움은 강제적 소외상태이고, 고독은 자발적 소외상태이다.”라는 말이다. 둘 다 소외된 상태인 것에서는 똑같다. 그런데 외로움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반면에 고독은 자신이 선택한 소외인 것이다.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면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게 된다. 결국 나중에 자기자신만 남게 될 것이다. 그때 어떻게 할 것인가? 한평생 바깥에서 재미를 찾던 사람은 외로움에 견디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고독에 익숙한 사람은 견디어 낼 것이다.
나이가 들면 점점 고립되어 간다. 사회적 관계망도 점점 줄어든다. 친구들도 줄어든다. 자녀가 독립해서 나갈 때 혼자 남게 된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임종의 순간이다.
아직까지 죽어 보지 않아서 임종의 순간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상상할 수 있다. 절대적으로 외로운 상태이고 절대적으로 고독한 상태일 것이다.
임종의 순간은 철저하게 혼자인 상태가 된다. 죽음은 누구와도 같이 갈 수 없는 것이다. 결국 혼자 가는 것이다. 이처럼 점점 고립되어 갈 때 외로움을 느낄지 고독을 느낄지는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매일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한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면을 비추어 본다는 것이다. 마치 고독의 방에 거울이 있어서 자신을 비추어 보는 것과 같다.
고독의 방에는 거울이 있다. 거울을 잘 닦으면 내면이 더 잘 보일 것이다. 그 내면의 거울을 통해서 자기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시간이 긴 사람일수록 고독에 익숙해질 것이다. 또한 고독을 즐길 수가 있는 것이다.
여기 외로운 사람이 있다. 평생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매몰된 삶을 산 사람이다. 그 사람은 평생 자기자신을 들여다 볼 시간을 갖지 못했다. 혼자가 되었을 때 외로움을 탈 수밖에 없다.
외로운 늑대가 되기 보다는 고독한 수행자가 되어야 한다. 고독의 방에서 고독의 거울과 함께 세상사로부터 한발짝 떨어져서 자기자신을 들여다 보는 것이다.
인간은 고독한 상태에 있을 때 자기자신의 삶을 살 수 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고독의 시간이 있어야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밝힐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고독은 죽음을 연습하는 것이다.
좌선할 때 특별한 상태가 될 때가 있다. 기쁨과 행복, 평온이 있을 때 이런 상태에 계속 있고 싶어 한다. 더 나아가 ‘이런 상태에서 죽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도 생각해 본다. 이렇게 본다면 고독한 수행자는 축복의 삶을 사는 자라고 볼 수 있다.
2024-10-0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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