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내가 분리된 것처럼 ‘몸 따로 정신 따로’

담마다사 이병욱 2024. 10. 5. 12:14

내가 분리된 것처럼 ‘몸 따로 정신 따로’
 
 
몸과 마음이 분리된 것 같다. 좌선 중에 몸과 정신이 따로 되었다. 몸을 남의 몸 보듯이 했다. 혹시 이것이 위빠사나 16단계 중에서 1단계 지혜에 해당되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에 해당하는 것은 아닐까?
 
재가우안거 78일째이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 되었다. 몸 따로 정신 따로인 것을 체험 했기 때문이다. 마치 몸과 마음이 따로 따로가 된 것이다. 통증 등 몸의 여러 현상이 마음에 영향을 주지 않은 것이다.
 
몸이 아플 때 마음에 영향을 준다. 그래서 “아이고 아파 죽겠네.”라고 말한다. 작은 통증임에도 아파 죽는 줄 아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몸을 자기자신처럼 여기는 것이다. 몸이 자신이고, 몸이 자아인 것이다. 그래서 아픈 것에 대하여 “죽겠네”라는 말이 붙는다.
 

 
오늘 좌선은 한시간 이상
 
오늘 좌선은 한시간 이상 했다. 올해 우언거 기간 중에 삼십분 앉아 있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생업도 있고 해야 할 일도 있어서 한시간은 무리라고 보았다. 그러나 한시간은 앉아 있어야 법의 성품을 볼 수 있다.
 
삼십분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평소 같으면 좌선을 끝낸다. 그러나 더 앉아 있고 싶었다. 그것은 고요를 맛 보았기 때문이다. 지금 이대로 계속 있고 싶었던 것이다.
 
고요는 오래 가지 않았다. 삼십분이 지나자 슬슬 평좌한 오른쪽 허벅지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쿡쿡 찌르는 듯한 통증이다. 엉덩이는 배기기 시작했다. 목에 벌레가 지나가는 듯 했다. 모든 것이 불편했다. 이럴 때는 좌선을 끝내고 싶어진다.
 
몸이 불편해도 계속 가기로 했다. 배의 부품과 꺼짐에 집중했다. 부풀 때 새기고 꺼질 때 새기는 것이다. 이는 물질과 정신을 새기는 것이다. 배가 부푸는 현상은 물질에 대한 것이고, 배가 부푼 것을 아는 것은 정신적 현상이다. 이 양자를 새기는 것이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여 관찰하기 위한 것이다.
 
위빠사나지혜 16단계 지혜중에 1단계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이다. 왜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관찰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인가? 이는 몸과 마음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집착된 무더기를 해체하기 위한 것이다.
 
몸과 마음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겼을 때
 
사람들은 몸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긴다. 느낌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긴다. 지각도, 형성도, 의식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긴다. 이는 집착되었기 때문이다. 오온에 대한 집착이다. 그래서 오취온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모든 괴로움에 대하여 오취온이라고 했다. 그런데 오취온은 괴로움의 원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괴로움의 원인은 갈애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취온이 괴로움의 원인으로 착각하는 것 같다.
 
오취온은 고성제에 해당된다. 부처님이 고성제를 설할 때 사고와 함께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를 설하면서 결론적으로 “상킷떼나 빤쭈빠다낙칸다 둑카 (sa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라 하여,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S56.11)라고 설하신 것이다.
 
인간은 오온에 집착된 존재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오온에 집착된 존재로 태어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긴 상태로 태어난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괴로움이다. 이를 ‘오취온고(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라고 한다.
 
오온에 대한 집착이 있는 한 괴로울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은 괴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이런 전제를 깔고 들어 가야 한다. 이런 전제가 성립되지 않으면 집성제도 없고, 멸성제도 없고, 도성제도 없다. 깨달음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부처님은 사성제를 설할 때 가장 먼저 고성제를 설했다. 부처님이 고성제를 먼저 설한 것은 인간은 본래 괴로운 존재인 것을 알라는 것과 같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다음단계가 진행될 수 없다.
 
인간은 괴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태어날 때부터 괴로움이 세팅되어 된 채로 태어났다. 이는 오온에 집착된 존재로 태어난 것임을 말한다. 만약 오온에 집착되지 않았다면 태어남도 없을 것이다.
 
아라한은 오온에 집착되어 있지 않다. 오온에서 집착이 떨어져 나간 것이다. 그래서 몸에 대하여 자신의 몸이라고 하지 않는다. 당연히 느낌도 자신의 것이 아니고, 지각도 자신의 것이 아니고, 형성도 자신의 것이 아니고, 의식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러다 보니 재생의 근거가 없어진다.
 
아라한이 되면 아라한 선언을
 
아라한이 되면 아라한 선언을 한다. 이는 보살이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 (akuppā me cetovimutti,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ti)”(S56.11)라고 선언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는 ‘부동심해탈(akuppā cetovimutti)’에 따른 윤회의 종식이다.
 
니까야에 아라한선언 정형구가 있다. 이는 “태어남은 부수어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Khīā jāti, vusita brahmacariya, kata karaīya, nāpara itthattāyā)”(M4)라는 문구를 말한다. 키워드는‘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이다. 청정한 삶을 살아 윤회를 끝내는 것이다.
 
불교인이라면 괴로움을 끝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괴로움을 끝내면 동시에 윤회도 끝난다는 사실이다. 이는 아라한선언으로 알 수 있다. 자신이 완전히 청정하게 되었을 때, 즉 탐, 진, 치를 뿌리로 하는 모든 오염원이 소멸되었을 때 더 이상 재생은 없게 된다. 그래서 “다른 어떤 것으로도 되지 않는다. (nāpara itthattāyā)”라고 선언한 것이다.
 
괴로움의 바다에서
 
오취온적 존재는 괴롭기 마련이다. 근본적으로 괴로움을 ‘디폴트’로 하여 태어난 것이다. 괴로움을 초기값으로 하여 태어난 것이다. 인생이 괴로움의 바다가 될 수밖에 없다.
 
괴로움의 바다에서 즐거운 때도 있을 것이다. 잠시 즐거움과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한다. 다시 괴로운 상태에 가 있기 때문이다. 오온에 집착된 존재로 태어난 이상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어떻게 해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것은 괴로움에 대한 철저한 자각이 있어야 한다. 인생은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괴로움을 기본적으로 장착하여 태어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다.
 
부처님은 사성제를 설할 때 제일성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이 괴로운 존재라는 것을 먼저 인정하라는 말과 같다. 그 근거로서 생노병사를 들었다. 누구나 살면서 겪는 것이다. 여기에다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괴로움(愛別離苦),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괴로움(怨憎會苦),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求不得苦)을 추가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오취온고를 말했다.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겨 생겨나는 괴로움을 말한다.
 
부처님의 오도송
 
부처님은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출가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오랜 세월 고행을 하고 깨달음을 위한 수행을 한 결과 무엇을 발견했을까? 이는 부처님의 오도송을 보면 알 수 있다. 자타카에 이런 게송이 있다.
 
 
나는 집을 짓는 자를 찾으며
그러나 발견하지 못하고
많은 생애의 윤회를 달려왔으니,
거듭 태어남은 고통이다.

집짓는 자여, 그대는 알려졌다.

그대는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꺾였다.

마음은 형성을 여의고
갈애의 부숨을 성취했다.”(Jat.I.76)
 
 
이 게송은 법구경 ‘늙음의 품’ 153번과 154번 게송과 병행한다. 자타까에서는 깨달음에 대한 감흥어로 되어 있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고 나서 아라한선언을 하고 난 다음 읊은 게송이다. 이를 부처님의 오도송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보살이 발견한 것은 갈애(tahā)이다. 이는 게송에서 “집짓는 자여, 그대는 알려졌다.”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보살은 집을 짓는 자를 찾아 나선 것이다. 그것은 갈애이다. 이와 같은 갈애에 대하여 법구경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나는 개인이라고 하는 집을 짓는 자인 같애[愛: tahā]를 찾아서 오랜 세월 백천의 거듭 태어남으로 이루어진 윤회를 하는 동안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유행해왔다.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 깨달음의 지혜를 구하기 위해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인 디빵까라(dīpakara:燃燈佛)의 발아래 엎드렸다.”(DhpA.III.128)
 
 
보살이 수메다라는 이름으로 살았을 때 배를 깔았다. 연등불이 온다는 소리를 듣고서 물웅덩이에 배를 깐 것이다. 등을 짚고 지나가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에 수메다 존자는 수기를 받았다. 그 결과 사아승지십만겁동안 십바라밀을 닦아 부처가 되었다.
 
게송에서 거듭태어남은 고통이라고 했다. 이는 늙음, 질병, 죽음으로 과정 자체가 고통이라는 것이다. 집짓는 자를 발견하지 못하는 한 그 고통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보살은 집짓는 자를 찾아 유행한 것이다.
 
보살은 마침내 집짓는 자를 찾았다. 찾고 보니 그것은 갈애였다. 그래서 “집짓는 자여, 그대는 알려졌다. 그대는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는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의 지혜로 꿰뚫어 그대의 정체를 알았으니 더 이상 이 윤회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라는 개체의 집을 짓지 못할 것이다.” (DhpA.III.128)라는 뜻이다.
 
선사들의 오도송을 보면 부처님의 오도송과 다르다. 합일의 경지를 노래하는 것이 많다. 열반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갈애나 집착이라는 말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언어적 개념을 타파한 ‘견해청정’에 대한 견성을 말하는 것 같다.
 
선사들의 오도송은 견해청정에 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언어적 개념에 대한 타파이다. 이는 나라는 개념을 타파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부처님의 오도송에 대한 주석을 보면 역시 ‘나(我)’라는 개념에 대한 타파를 볼 수 있다.
 
선사들의 오도송이나 부처님의 오도송이나 나라는 개념에 대한 타파에 있어서는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더 나아간다. 갈애의 뿌리를 뽑아 버리는 것이다. 이는 ‘잠재적 성향의 오염원(anusaya kilesa)’까지 뿌리를 뽑아 버리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이는 다름 아닌 탐, 진, 치의 뿌리를 뽑아 버리는 것과 같다.
 
탐, 진, 치의 뿌리를 뽑아 버렸을 때 가장 청정한 상태가 된다. 이는 “태어남은 부수어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M4)라는 아라한선언으로도 알 수 있다. 이런 것이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과 선사들의 차이에 해당된다. 견성 이후에도 수행을 계속 해야 하는 이유에 해당된다.
 
갈애의 뿌리를 뽑기 위하여
 
수행을 하는 것은 갈애의 뿌리를 뽑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갈애는 이는 이미 오온에 집착된 상태로 태어났기 때문에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몸과 마음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는 견해가 집착된 것이다.
 
십이연기에서 집착은 갈애가 더욱더 강화된 것이다. 이는 “갈애를 조건으로 하여 집착이 생겨난다.”(S12.2)라는 정형구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번 집착이 생겨나면 달라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집착에는 네 가지가 있다. 이는 감각적욕망에 대한 집착, 존재에 대한 집착, 비존재에 대한집착, 자아교리에 대한 집착, 이렇게 네 가지 집착을 말한다. 이 가운데 ‘자아교리에 대한 집착’은 오온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유신견’에 대한 것이다.
 
유신견이 있는 한 세세생생 윤회할 수밖에 없다. 오온에 대한 집착이 땔감이 되는 것이다. 오온에 대하여 자신의 것이라고 여겼을 때 탐욕의 불, 성냄의 불, 어리석음의 불로 타오른다. 오온에 대하여 집착하면 할수록 더욱더 거세게 타오를 것이다. 집착(upādi)은 재생하게 하는 윤회의 땔감이 된다.
 
집착된 존재로 태어난 존재는 갈애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업을 짓게 되어서 세세생생 윤회한다. 수행은 먼저 갈애를 끊기 위한 것이다. 집착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왜 그런가? 집착된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삶의 과정에서 발생되는 갈애는 끊을 수 있다.
 
어떻게 해야 갈애를 끊을 수 있을까? 그것은 느낌 단계를 새기는 것이다. 왜 그런가? 갈애는 느낌을 조건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느낌에서 새기지 못하여 갈애의 단계로 넘어가면 이미 늦다. 마치 ‘루비콘강’을 건넌 것과 같고 ‘위화도회군’하는 것과 같다. 앞뒤 돌아보지 않고 수도를 향해서 돌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그래서 느낌 단계에서 막아야 한다.
 
위빠사나수행은 느낌을 새기는 수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느낌 단계에서 조치를 취하면 윤회의 출구가 있기 때문에 빠져 나갈 수 있다. 갈애의 강을 넘어 가지 않는 것이다.
 
느낌 단계에서 단지 그런 줄 알면 더 이상 갈애가 일어나지 않는다. 당연히 집착도 일어나지 않고 업도 일어나지 않는다. 업의 존재로 태어남도 없게 된다. 십이연기 환멸문의 시작이다.
 
나의 몸은 괴로워하여도 나의 마음만은
 
오늘 몸과 마음이 분리되는 듯한 느낌을 경험 했다. 삼십분이 지나자 몸 이곳 저곳에 통증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이런 통증을 접하자 불쾌감이 생겼다. 좌선을 그만 두고 싶었다. 이는 몸의 통증이 마음에 영향을 준 것이다. 육체적 화살에 정신적 화살까지 맞은 것이다.
 
부처님은 중병에 걸린 나꿀리삐따 장자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부처님은 “그대는 이와 같이 ‘나의 몸은 괴로워하여도 나의 마음은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배워야 합니다.”(S22.1)라고 말한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장자는 병이 나았다.
 
몸이 괴롭다고 하여 “아파 죽겠다.”라고 말한다면 제2의 화살을 맞은 것이다. 육체적 고통이 정신적 고통으로 전이된 것이다. 그러나 수행자는 육체적 아픔이 정신적 아픔으로 가게 하지 않는다. 자신의 몸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다.
 
삼십분 이상 좌선 했을 때 몸이 이곳 저곳 아프기 시작했다. 뒷목이 뻐근하기도 했다. 벌레가 기어가는 듯이 간지럽기도 했다. 이런 것을 접했을 때 그냥 지켜 보았다. 계속 지켜 보았더니 남의 몸 보듯 되었다. 몸과 정신이 분리된 것이다!
 
좌선할 때 몸과 정신을 분리해서 보아야 한다. 이는 위빠사나 1단계 지혜인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에 해당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왜 몸과 정신을 분리해야 할까? 이는 오온에 대한 집착이 있는 한 이어진 것, 한 무더기, 한 덩어리로 보기 때문이다.
 
위빠사나수행 1단계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관찰하는 것이다. 이는 집착된 무더기를 해체하는 것과 같다. 또한 정신과 물질을 분리하는 것과 같다. 몸과 마음에 대하여 ‘나의 것’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에 분리하여 관찰하고자 하는 것이다.
 
마하시수행 방법에서는 배를 보라고 한다. 배가 주관찰대상인 것이다. 이는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을 말한다. 어떻게 새기는가? 배가 부풀 때 부품이라는 물질을 새기는 것이 따로, 부풀 때 부품이라고 아는 것을 새기는 것을 따로 새기는 것이다. 이렇게 물질과 정신을 따로따로 새기면 “이어진 것으로, 한 무더기로, 하나로, 덩어리로는 드러나지 않는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127쪽)라고 말한다.
 
한 무더기나 이어진 것으로 보았을 때 문제가 된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간다. 이는 몸과 마음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는 유신견에 따른다.
 
유신견을 부수기 위해서는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관찰해야 한다. 집착된 무더기를 부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위빠사나 1단계 지혜에 해당된다. 이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nāmarūpa pariccheda ñāna) 를 말한다.
 
위빠사나 1단계 지혜는 칠청정에서 ‘견해청정(diṭṭhi visuddhi)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수행과정에 있어서 가장 기본 중의 기본이다. 이것이 되어 있지 않으면 앞으로 한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이 몸과 마음이 나의 것, 나, 나의 자아라는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을 제거하는 것이다.
 
느낌대로 살고 감각대로 살다 보면
 
오늘 좌선은 1시간5분 했다. 평소보다 삼십분 많이 한 것이다. 삼십분 이전까지는 고요해서 계속 앉아 있고 싶었으나 삼십분이 너머 가면서부터는 몸이 괴롭기 시작했다. 그만 두고 싶었으나 계속 가보았다.
 
통증이 일어났을 때 인내를 가지고 지켜 보았다. 배를 주관찰대상으로 하다가 더 센 것이 나타나서 통증을 관찰대상으로 한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강한 대상을 주관찰대상으로 한다.
 
몸의 통증은 느낌에 대한 것이다. 괴로운 느낌을 말한다. 그런데 느낌은 새겨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느낌을 새기지 못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느낌이 좋으면 거머쥐려 할 것이고, 싫으면 밀쳐 내려 할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탐욕과 성냄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탐욕과 성냄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어리석은 삶이 된다. 이는 ‘느낌대로’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또 다른 말로 ‘감각대로’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느낌대로 살고 감각대로 살다 보면 필연적으로 갈애가 일어난다. 연기가 회전되는 것이다. 그래서 갈애는 집착이 되고, 집착은 업이 되어서 업으로서 태어남이 있게 된다. 집착이라는 땔감으로 세세생생 윤회하게 되는 것이다.
 
윤회의 고리를 끊어 내야 한다.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리는 것이다. 느낌에 대하여 남의 느낌 보듯 하는 것이다.
 
다리에 통증이 발생 했을 때 남의 다리 보듯 해야 한다. 이렇게 느낌에 대하여 제3자의 위치에서 관찰하게 되면 몸과 마음이 분리된다. 이후 어떤 통증이나 가려움, 뻣뻣함 등 갖가지 몸으로 인한 괴로움이 발생되어도 나의 것이 아니라고 알게 된다. 오늘 이런 경험을 했다.
 
내가
분리된 것처럼‘몸 따로 정신 따로’
 
오늘 수행에 큰 진전이 있는 것 같다. 이전에도 ‘몸 따로 정신 따로’ 현상은 경험했다. 그런데 이번에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제 방법을 알았으니 계속 써 먹어야겠다.
 
오늘 내가 분리된 것처럼‘몸 따로 정신 따로’가 된 것을 경험 했다. 이는 삼십분 이상 앉아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왜 마하시 전통에서 한시간 앉아 있으라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몸 따로 정신 따로’를 경험한 것도 위빠사나 1단계 지혜인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에 해당될까?
 
 
2024-10-0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