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느낌은 있지만 감수자(感受者)는 없다

담마다사 이병욱 2024. 10. 7. 13:41

느낌은 있지만 감수자(感受者)는 없다

 

 

느낌은 있지만 감수자(感受者)는 없다. 오늘 아침 좌선에서 생각한 것이다. 통증 갖가지 느낌이 몸에서 일어 났을 때 내가 느낀 것은 아니다. 정신과 물질의 발생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다.

 

오늘 재가우안거 80일째이다. 이제 안거 끝날 때가 머지 않았다. 음력으로 9월 보름날인 1017일이 우안거 끝나는 날이다. 담마와나선원에서는 나흘 앞당겨 1013()에 우안거해제 탁발법회가 열린다.

 

무엇이든지 집중하면 삼매가

 

오늘 좌선은 드라마틱했다. 걸어서 하늘 끝까지 갈수는 없지만 이 작은 몸 안에서 갈 수 있는데 까지 가 본 것이다. 그렇다고 선정체험이나 열반을 말하지 않는다. 근접삼매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행선을 할 때 잘 집중 되지 않았다. 어제와 다른 상황이다. 어제는 집중이 잘 되어서 1시간 20분 행선했다. 오늘은 비틀거리면서 20여분 발을 옮겼다.

 

행선을 마치고 곧바로 금강좌에 앉았다. 명상공간에 있는 방석을 금강좌(金剛座)라고 하는 것이다. 금강좌에 앉으면 거룩한 자가 되는 것 같다. 세상에 미천한 자도 금강좌에 앉으면 왕권이 부럽지 않다.

 

오늘 좌선은 잘 할 수 있을까? 금강좌에 앉으면 늘 이런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 배의 부품과 꺼짐을 한번도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배가 부풀 때 새기고 배가 꺼질 때 새기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집중하면 삼매가 형성된다. 똑 같은 행위를 반복하면 역시 삼매가 형성된다. 뜨개질 하는 것에 집중하면 뜨개질삼매가 형성될 것이다. 백팔배에 집중하면 백팔배삼매가 형성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배의 부품과 꺼짐을 지속적으로 새기면 삼매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길 때 잡념이 치고 들어 올 수 있다. 알아차리지 못하면 망상이 된다. 한편의 작은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이럴 때는 부푼다, 꺼진다라며 동사형 명칭을 붙이면 효과적이다.

 

좌선 중에 이런 저런 생각이 일어난다. 경전적 지식에 대한 것은 번뇌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불청객 같은 생각이다. 그러나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경전적 지식은 피곤하지 않다.

 

해난(海亂)이 일어났을 때

 

금강좌는 인생의 막장이 앉는 것과 같다. 왜 그런가? 더 이상 도망갈 데가 없기 때문이다. 쫓기다 쫓겨서 절벽에 이른 것과 같다. 또한 적들에게 포위되어 창에 찔려 죽을 순간인 것과 같다. 또한 난파하고 있는 배에 있는 것과 같다.

 

쌍윳따니까야에 어느 선원이야기가 있다. 대양을 항해하는 배는 거친 파도에 난파되기 일보직전에 있었다. 다른 선원들은 자신의 신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었다. 그러나 그 선원은 그 자리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무협영화에서 주인공은 적들에게 쫓기고 있다. 적들에게 둘러 쌓이자 그 자리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조용히 최후를 맞이하기 위한 것이다.

 

위기에 순간에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를 것이다. 죽을 위기에 처하면 각자 자신이 신봉하는 신을 찾을 것이다. 어떤 이는 신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는다. 이럴 때 명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법화경에 관세음보살보문품이 있다. 칠난(七亂)에 처했을 때 관세음보살을 칭명하면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칠난 중에는 해난(海亂)도 있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가령 폭풍이 일어나 그들의 배가 나찰귀들의 나라에 닿게 되었을지라도 그 가운데 만일 한사람이라도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면, 여러 사람들이 다 나찰의 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리니, 이러한 인연으로 관세음보살이라 이름하느니라.”(묘법연화경 356, 동국역경원)

 

 

불자들은 늘 관세음보살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언제 어디서나 관세음보살하는 것이다. 난파 되어 침몰 위기에 있는 배에서도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면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에 입문 했을 때의 일이다. 천주교를 믿다가 온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어느 날 흥분해서 사람들에게 알렸다. 관세음보살보문품 소책자를 나누어 주면서 관세음보살만 부르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식으로 말한 것이다.

 

유일신을 믿는 종교에서는 신에게 크게 의지한다. 신의 이름을 부르면 신이 다 들어줄 것으로 믿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도 있었던 것이다. 관세음보살을 칭명하면 모든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을 보면 죄를 지어도 죄수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이는 또 어떤 사람이 죄가 있거나 죄가 없거나 간에 쇠고랑에 손발이 채워지고 몸이 묶였을지라도 관세음보살의 이름만 부르면 이것들이 다 끊어지고 풀어져 곧 벗어나리라.”(묘법연화경 357, 동국역경원)라는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쯤 되면 관세음보살은 절대자의 위치에 있다. 천주교회 다니다 온 사람이 흥분한 이유를 알 수 있주는 대목이다.

 

조용히 가부좌를 하고 죽음을 맞는 사람

 

대승불교 경전을 보면 초기경전에서 본 유사한 내용이 발견된다. 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 해난에 대한 것이 쌍윳따니까야에 주석에도 실려 있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상인들이 바다를 건너는데, 폭풍우가 몰아쳐서 배가 가라앉게 되었다. 그러자 그들은 각각 자신의 수호신을 외쳐대며 도움을 청했다. 싸뚤라빠는백 명의 외치는 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만이 결가부좌한 채 동요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한 동승자가 그에게 태연자약한 이유를 묻자 그는 여행을 떠나기 전 승단에 공양을 드리고 귀의했으므로 어떤 두려움도 없다고 했다.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려달라는 동승자의 부탁을 받고, 그들을 백 명씩 일곱 그룹으로 나누어 차례로 부처님의 오계를 가르치고 오계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 확실히 귀의하도록 했다. 배는 점점 깊이 가라앉아 모두 죽게 되었고 그들은 서른셋 신들의 하늘나라[忉利天]에 다시 태어나 제석천궁에서 살게 되었다. 싸뚤라빠 무리들은 이들이며, 지금 그들은 위대한 스승인 부처님을 찬양하기 위해 부처님을 방문한 것이다.”(Srp.I.54)

 

 

이 인연담은 쌍윳따니까야 참사람과 함께의 경(Sabbhi Sutta)’(S1.31)에서 발견된다. 천신이 된 싸뚤라빠 무리들이 부처님을 방문하여 예경 드리는 게송에 대한 인연담이다.

 

인연담을 보면 선원들은 모두 죽는다. 가부좌한 채로 죽는 것이다. 이는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과는 내용이 다르다. 보문품에서는 관세음보살을 칭명함으로 인하여 모두 살아남지만 니까야 주석에서 보는 인연담에서는 모두 죽는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죽어서 천상에 태어났다는 것이다. 욕계 삼십삼천에 태어난 것이다.

 

최후를 어떻게 맞이 할 것인가?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신의 이름을 불러야 할까? 관세음보살을 불러야 할까? 어느 경우이든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찾을 것이다. 이런 공덕으로 천상에 태어날지 모른다. 그런데 인연담을 보면 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조용히 가부좌를 하고 죽음을 맞는 것이다.

 

웨다나사마시시(vedhana samasisi)에 대하여

 

중병에 걸렸을 때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될 것이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위빠사나수행 지침서에 그는 비구였는데 임종을 맞이하고 있었다. 임종을 맞이하면서 그는 고통스러운 느낌을 계속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느낌이 사라진 순간 아라한이 되어 숨을 거두었다.”(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 요인, 313-314, 행복한 숲)라는 내용이 있다. 이는 웨다나사마시시에 대한 것이다.

 

웨다나사마시시는 죽기 직전에 느낌을 새겨서 아라한이 됨과 동시에 완전한 열반에 이르게 됨을 말한다. 이렇게 임종순간에 한번에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성취되는 것에 대하여 사마시시(samasisi)’라고 한다.

 

중병에 걸린 수행승은 느낌을 새겨서 두 가지 일이 성취되었다. 이에 대한 부연 설명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 그는 임종의 느낌 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그 느낌을 극복할 수도 없고 살아 돌아올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죽어 가는 사람은 대부분의 경우, 죽기 하루나 이틀 전에 이 사실을 알게 된다. 수행 경험이 많은 수행자도 수행해 보아야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알고 수행을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몇 시간 전에 그것을 알기도 한다.

처음에 그 비구도 이 느낌을 살아서는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느낌으로는 더 이상 살 수 없으니 몸과 생명에 대한 걱정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모든 주의를 모아서 수행에 집중하였다. 그는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고 노력하여 죽기 바로 직전에 성스러운 법을 얻을 수 있었다.”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 요인, 314, 행복한 숲)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수행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죽어도 다시 태어난다면 선처에 날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아난다여, 인간으로서 죽어야 한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그때 그 때 마다 인간이 죽을 때에 내게 와서 그 의취를 물으려 한다면, 아난다여, 그것은 여래를 괴롭히는 것이다.” (S55.8)라고 말했다.

 

흔히 죽음이 대수냐?”라고 말한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인간으로서 죽어야 한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 죄를 지은 사람은 죽음이 두려울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산그늘의 비유로 설명했다.

 

 

또한 수행승들이여, 어리석은 자가 의자 위에 올라앉거나 침대위에 올라 눕거나 땅바닥에서 쉬거나 할 때, 그가 과거에 저지른 악한 행위, 즉 신체적 악행, 언어적 악행, 정신적 악행이 있다면, 그것들이 그때마다 그에게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진다. 수행승들이여, 이를테면 커다란 산봉우리의 그림자가 저녁 무렵에 지상에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지는 것과 같다.”(M129)

 

 

일몰 때 커다란 산에 산그늘이 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죄를 지은 자는 임종 순간에 두려움에 떨 것이다. 과거에 지은 악행이 산그늘처럼 자신을 덮칠 것이다. 그래서 산봉우리의 그림자가 저녁 무렵에 지상에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지는 것과 같다.”(M129)라고 한 것이다.

 

수행자는 죽음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지금 보다 더 나은 세계가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일 것이다.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새김을 잃지 않는 이유에 해당된다. 잘 하면 한번에 두 가지 일을 성취할 수 있다.

 

고통스러운 느낌을 새겼을 때 법의 성품을 얻을 수 있다. 아라한이 되어 완전한 열반에 들었을 때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웨다나사마시시가 성취되는 것이다.

 

주석에 따르면 네 종류의 사마시시가 있다. 이는 수명의 사마시시, 질병의 사마시시, 느낌의 사마시시, 그리고 자세의 사마시시를 말한다. 이 중에 느낌의 사마시시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어떤 느낌을 느끼다가 느낌의 지멸과 더불어 번뇌의 소멸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임종순간에 두 가지 일이 성취되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이는 그는 앞도 뒤도 아니고 동시에 번뇌의 종식과 목숨의 종식이 이루어진다.”(A7.16)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무상에 대한 관찰의 경’ (A7.16)에 실려 있다.

 

느낌은 통증의 성품으로 인한 것

 

위빠사나지침서에서는 또 하나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한 수행승이 아라한이 되겠다고 목표를 세우고 정진하고 있었는데 병이 들었다. 그는 통증이 너무 심해서 죽을 것 같았다. 이에 대장로가 , 비구여, 그대는 인내하고 견디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미얀마 속담에 인내가 열반으로 인도한다.”라는 말이 있다. 중병에 걸린 수행승은 통증을 인내했다. 대장로의 말을 듣고 인내했다. 통증으로 몸부림치지 않고 고요하게 임종을 맞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그 비구는 그 느낌을 인내하기로 결심하였다. 복통을 따라다니면 서 알아차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복통이 배꼽에서 시작하여 가슴까지 곧바로 올라왔다. 복통이 가슴까지 왔을 때 그는 아나함도를 얻었다. 그는 아나함으로서 열반을 향한 마음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는 범천에 태어났다. 인내를 가지고 견뎠기 때문에 높은 세계에 태어난 것이다. 다른 비구가 이를 상기시켜 주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계속 통증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더라면, 집중이 생기지 않아서 위빠사나 지혜도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도의 지혜와 과의 지혜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내가 그를 열반으로 인도한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 요인, 315, 행복한 숲)

 

 

수행승은 임종시 통증을 새겨서 아나함도를 얻었다. 아나함이 되어서 범천에 태어났다. 이렇게 본다면 통증은 귀한 손님이다. 통증에 대하여 불청객으로 보고 쫓아 버릴 것이 아니라 반갑게 맞이하는 것은 법의 성품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통증을 관찰하기가 쉽지 않다. 통증이 왔을 때는 좌선을 끝내고 싶어진다. 그러나 통증을 참고 견디며 새기면 법의 성품을 볼 수 있다. 중병에 걸려서 통증이 극에 달했을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수행 중에 통증이 발생하면 이 느낌은 통증의 성품으로 인한 것이다. 이것을 알아차리는 것만이 할 일이다.”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 요인, 315, 행복한 숲)라며 냉정하고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라고 했다.

 

좌선 중에 머리가 환해질 때

 

금강좌는 도피처와도 같다. 금강좌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배의 부품과 꺼짐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새기면 삼매가 형성된다. 설령 그것이 약한 근접삼매에 지나지 않은 것일지라도 기쁨, 행복, 평온의 상태가 된다.

 

좌선할 때 마음 상태가 늘 똑 같은 것이다. 시시각각 변한다. 새김이 원활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때 번뇌와 망상이 일어난다. 그 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 오는 것이다. 마음은 한순간도 가만 있지 않는 것이다.

 

좌선 중에 머리가 환해질 때가 있다. 어느 정도 집중이 이루어지면 나타나는 현상이다. 창 밖에 햇볕이 강렬할 때도 나타난다. 이럴 때 밝음에 소소한 것은 묻혀 버린다. 잡념이나 통증, 가려움 등을 압도하는 것이다.

 

관찰하다가 몸과 마음이 피곤할 때

 

위빠사나수행은 강한 대상에 집중하여 관찰하는 수행을 말한다. 강한 대상을 주관찰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그 대상이 약화 되었을 때 더 강한 대상을 주관찰대상으로 바꾸어야 한다.

 

마하시 방식에서는 배의 부품과 꺼짐을 주관찰대상으로 한다. 통증이 발생하면 주관찰대상을 바꾼다. 이렇게 하다 보면 피곤해진다. 이럴 경우 좌선을 그만 두고 싶어진다. 그러나 위빠사나 스승은 인내를 가지고 계속 하라고 말한다. 쉬려거든 좌선 상태에서 쉬라고 말한다.

 

군대에 가면 유격훈련을 받는다. 유격부대에 입소해서 며칠 받는다. 가혹한 훈련이다. 그러나 50분 훈련 받고 10분 쉬는 식이다. 그런데 쉴 때 앉아서 쉬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와 열을 맞추어 서서 쉬는 것이다. 앉아서 쉬면 사고 난다고 보는 것이다. 너무 퍼지면 혹독한 훈련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서서 쉬어야 가혹한 훈련에 쉽게 적응될 수 있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도 이와 다르지 않다.

 

좌선할 때 피곤하다고 해서 그만 두어서는 안된다. 피곤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는 그렇게 드러나는 대로 따라서 관찰하다가 몸과 마음이 피곤할 때 선정에 다시 입정할 수 있습니다. 피곤이 풀리면 드러나는 물질-정신을 따라서 다시 관찰하면 됩니다.”(담마짝까법문, 213)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이는 선정에 기반한 위빠사나 수행자에 대한 것이다.

 

선정에 기반하지 순수한 위빠사나 수행자는 피곤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이는 기본 대상으로 돌아와 관찰하면 마음과 몸의 피곤함이 사라지게 됩니다.” (담마짝까법문, 215)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피곤함을 먼저 관찰한 뒤 원래 새김의 대상인 부품과 꺼짐으로 돌아와야 함을 말한다.

 

좌선 중에 해태와 혼침이 오면

 

인내가 열반으로 인도한다는 말이 있다. 좌선할 때 한시간 앉아 있어야 하는 이유에 해당된다. 삼십분 가지고는 부족한 것이다. 그래서 삼십분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을 때 무시하고 계속 달렸다.

 

좌선 해서 알람이 울릴 때 고요가 찾아 왔다. 마음에 밝음과 함께 온 것이다. 이를 즐기고 싶었다. 이는 쉬는 것이나 다름 없다. 통증 등 불편함으로 인하여 좌선을 그만 두는 것보다 낫다.

 

좌선 중에 졸음이 올 수 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광명상(光明想: ālokasaññā)’을 취하라고 했다. 이는  “빛에 대한 지각을 갖추어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려 해태와 혼침으로부터 마음을 정화합니다.”(D2.65)라는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어제 하루 유튜브를 보지 않았더니

 

오늘 좌선을 한시간 했다. 평소 삼십분 했는데 이것 가지고는 부족한 것이다. 좌선이든 행선이든 최소 한시간은 해야 삼매가 형성되어 법의 성품을 볼 수 있다.

 

명상을 하면 경험을 하게 된다. 좋은 경험이면 오래 간직하고 싶어 진다. 이 기분을 계속 유지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과 말하는 순간 깨진다. 또 하나는 TV나 유튜브 시청하는 것으로 깨질 수가 있다.

 

백권당에는 늘 혼자 있다. 찾아 오는 사람도 없다. 말할 상대가 없어서 좋은 기분은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무료를 참지 못해서 유튜브를 시청하면 그날 기분은 엉망이 된다.

 

어제 하루 유튜브를 보지 않았다. 2022년 대선 이후 일체 TV도 보지 않고 유튜브도 보지 않았는데 이번이 두 번째이다. 유튜브를 다시 보게 된 것은 작년 연말 부터이다. 그때부터 정세가 역전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유튜브를 보면 가스라이팅 당하는 것 같다. 마음의 위안을 찾아 이리 저리 옮겨 다녀 본다. 그러나 남는 것이 없다.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어제 하루 유튜브를 보지 않았더니 동네가 조용한 것 같다. 시끄러움에서 해방된 것 같다. 정치유튜브 뿐만 아니라 불교유튜브도 공해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들어 보면 비불교적인 것이 많다.

 

좌선이 끝나면 마음은 충만된다. 이런 상태에서 글을 쓴다. 더 나아가 이 기분을 계속 유지하고 싶어진다. 일상에서도 새김을 유지하고 싶은 것이다.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 가장 먼저 유튜브를 끊어야 한다. 일체 언어적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다. 일상에서도 새김이 유지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유투브를 보지 않으면 일상에서 실로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또한 삶의 여유를 가질 수 있다. 오늘이 두 번째 날이다. 언제까지 갈지는 알 수 없다.

 

느낌은 있지만 감수자(感受者)는 없다

 

오늘 좌선에서 느낀 것이 있다. 그것은 느낌과 감수자(感受者)에 대한 것이다. 이를 느낌은 있지만 감수자는 없다라고 해보았다. 집착된 덩어리를 정신과 물질로 분리해서 관찰해 보았더니 라는 존재는 없었던 것이다.

 

나라는 말은 명칭에 불과하다. 자전거를 분해하여 부품을 나열해 놓았을 때 더 이상 자전거라고 볼 수 없다. 부품이 결합되었을 때 자전거라는 명칭을 붙여 준다. 나를 오온으로 해체하면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다시 오온이 결합되면 나라는 개념이 형성된다.

 

 

위빠사나 수행은 나를 해체해서 보는 것이다. 집착된 무더기로 되어 있는 것을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관찰하면 더 이상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그때 통증 등 아픔을 느껴도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니다. 통증이라는 물질과 이를 아는 정신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느낌은 있지만 감수자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명색을 구분해서 관찰하면 느낌은 내것이 아니다. 죽을 것 같은 고통도 내것이 아니다. 중병에 걸린 자가 느낌을 새기면 아라한이 됨과 동시에 완전한 열반에 이른다고 했다. 한번에 두 가지 일이 성취되는 사마시시를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죽음은 두렵지 않은 것이다. 느낌은 있지만 감수자는 없는 것이다.

 

 

2024-10-0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