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선할 때 명칭 붙이니 재미가
금강좌에 오르면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다. 이 세계는 아니다. 현실의 세계와는 다르다. 이전과 이후는 확실히 다르다. 청정의 불꽃으로 타오르는 세계이다. 하루 종일 이런 기분이었으면 좋겠다.
오늘 재가우안거 82일째이다. 오늘은 잠을 잘 잤다. 난방을 한 것이 영향을 준 것 같다.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져서인지 방바닥이 차갑다. 어제 처음으로 난방 버튼을 눌렀다.
몸상태가 정신에도 영향을 준다. 몸이 탈이 없으면 마음은 날아갈 듯이 가볍다. 오늘 아침이 그랬다. 마치 황토방에서 잔 것처럼 개운했다. 먹을 것을 싸서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유튜브 없는 세상 사흘째이다. 유튜브를 보지 않으니 이렇게 세상이 조용할 수 없다. 그 동안 유튜버들에게 ‘가스라이팅’ 당했던 것 같다. 그들의 말에 녹아 나서 귀중한 시간을 허비했던 것이다.
유튜브를 보지 않으니 시간이 철철 남은 것 같다. 그렇다고 인터넷 검색하며 보고 싶은 것을 찾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도 보지 않는다. 책도 보지 않는다. 경전과 논서를 제외하고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우안거도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이번주만 지나면 끝물이다. 회향일은 10월 17일로 이제 딱 8일 남았다. 나는 그 동안 어떤 성과를 이루었는가?
행선할 때 명칭붙이기
오늘 아침 행선과 좌선을 각각 30분씩 했다. 할 때마다 새롭다. 특히 행선이 그렇다. 오늘 아침 행선할 때 명칭을 붙여서 해 보았다.
행선할 때 명칭붙이기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초보자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숙련자라도 명칭을 붙여야 할 때가 있다. 그것은 집중이 잘 되지 않을 때이다.
행선을 하기 위해서 행선대에 섰다. 왼발과 오른발을 번갈아 내딛는다. 발을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여섯 단계 행선이다. 그러나 처음 시작할 때는 새김이 약하다. 이럴 때 숙련자라도 명칭을 붙여야 한다.
여섯 단계 행선에 명칭을 붙였다. 발을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고”라고 마음으로 명칭을 붙인 것이다. 명칭의 효과는 있었다. 새김이 분명해진 것이다.
명칭을 붙일 때 발의 모양이나 이미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행선할 때 발의 모양이나 이미지가 떠오르면 이는 개념으로 행선하는 것이 된다. 언어적 개념이 개입된 것이다.
언어적 개념이 개입되면 실재를 볼 수 없다. 마치 그 사람 이름을 보면 그 사람 얼굴이 떠올려지는 것과 같다. 발이라는 말을 떠 올렸을 때 발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과 같다.
발을“올리고”라고 명칭을 붙이면 올려지는 운동성만 있게 된다. 중력의 법칙을 무시한 가볍고 경쾌한 움직임이다. 지수화풍 사대 가운데 풍대(風大)에 대한 것이긴 하지만,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를 보면 화대(火大)의 요소가 강한 것이라고 한다.
여섯 단계 행선에 명칭을 붙이니 재미가 났다. 여섯 단계가 분명히 새겨지는 것이다. 이럴 때 번뇌가 끼여들 여지는 없다. 번뇌가 없어서 기쁨과 행복과 평온이라는 초선정의 선정구성 요소가 드러난 것 같다.
재미 있으면 계속 하고 싶어 진다. 여섯 단계 행선에 명칭붙이기에 재미가 들자 길이가 4미터도 되지 않는 행선대를 왕복했다. 이렇게 재미가 붙자 이후에도 적용하고 싶어 졌다.
갈 때는 간다고 분명히 알아야
행선은 갈 때와 설 때 두 단계가 있다. 여기에 하나 더 붙인다면 회전할 때이다. 이 가운데 갈 때가 행선의 핵심이다.
갈 때는 간다고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 말은 대념처경에도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 ‘분명히 안다’는 뜻의‘빠자나띠(pajanati)’는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에 따르면 ‘다양하게 안다’라고 했다.
갈 때는 간다고 분명히 하는 것이 행선이다. 이는 오로지 가는 것에만 마음을 두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다양하게 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아는 것을 말한다.
위빠사나 수행의 핵심은 분리해서 아는 것이다. 집착된 무더기를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관찰하는 것이다. 이렇게 관찰해야 실재하는 법의 성품을 볼 수 있다. 무상, 고, 무아의 성품을 말한다.
행선은 걷는 수행이다. 또한 걷기명상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빠른 걸음으로 걷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마치 학이 춤을 추듯이 천천히 걷는 것이다. 여섯 단계 행선이 그렇다.
행선을 한지 오래 되었다. 위빠사나 수행처에 가면 가장 먼저 가르쳐 주는 것은 행선이다. 좌선하기 전에 걷는 방법부터 알려 주는 것이다. 먼저 수행한 사람이 초심자에게 알려 주기도 한다.
걷는 것만 보아 알 수 있다. 행선하는 것만 보아도 수행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한동작 한동작 새기며 걷는 수행자의 모습은 다르다. 초심자가 행선하는 것과 확실히 다른 것이다.
워킹메디테이션(walking meditation), 걷는 수행을 다 마스터한 것은 아니다. 행선할 때마다 새롭다. 오늘은 명칭을 붙여서 걸어 보았다.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무엇보다 재미가 있었다. 그것은 번뇌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서 있을 때 스캔하는 방법
행선에서 또 하나 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서 있을 때이다. 서 있는 것도 수행이다. 이는 ‘행, 주, 좌, 와’라는 네 가지 행동양식에서 머묾(住)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행선 중에 서 있을 때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재가불교단체 수련회에 가면 수행시간이 있다. 수행자를 초대해서 행선과 좌선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테라와다식 오체투지도 배운다. 그러나 단 한번으로 그친다.
수행은 매일 해야 한다. 수행은 먹듯이 하는 것이다. 매일 해야 몸에 붙는다. 마치 몸의 일부분처럼 되는 것이다. 행선과 좌선을 매일 하다 보면 자신만의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행선 할 때 걷는 것만 수행은 아니다. 서 있는 것도 수행이고 도는 것도 수행이다. 특히 서 있을 때가 문제가 된다. 강사는 자신의 몸을 ‘스캔(scan)’하라고 한다. 머리 끝에서부터 발 끝까지 훑어 내리라는 것이다. 느낌을 관찰하는 것이다.
강사의 말대로 느낌을 스캔해 보았다. 그러나 잘 되지 않았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오늘 아침에는 명칭을 붙여 보았다. 여섯 단계 행선에 명칭붙이기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서 있을 때 명칭을 어떻게 붙여야 할까? 나름대로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가장 먼저 발바닥이다. 그리고 무릎, 가슴, 입술, 눈꺼풀 순으로 명칭을 붙여 본 것이다.
명칭 붙일 때 개념이 되기 쉽다. 신체부위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실재를 보기 힘들다. 그래서 발바닥에 마음을 두었을 때는 ‘차가움’을 보고자 했다. 가슴으로 왔을 때는 ‘벌렁거림’을 보고자 했다. 입술로 왔을 때는 두 입술이 ‘닿음’을 보고자 했다. 눈으로 왔을 때는 ‘촉촉함’을 보고자 했다.
서 있을 때 두 번 스캔 했다. 발바닥에서 눈으로, 그리고 눈에서 발바닥으로 스캔한 것이다. 이렇게 두 번 스캔한 다음 몸을 돌린다. 이때 돌고자 하는 의도를 알아야 한다.
안되면 방법을 바꾸어야
안되면 되게 해야 한다. 안된다고 내버려 두면 안된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직장 다닐 때의 일이 생각났다.
첫 직장 때의 일이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을 때 모든 것이 서툴렀다. 이럴 때 선배사원들에게 배운다. 그때 들은 말 중에 “삼일동안 쑤셨는데도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바꾸어야 한다. 방법이 잘못된 것이다.”라는 충고가 있었다.
상품을 개발할 때 수없이 실험을 한다. 전자제품을 개발 할 때 납땜을 하게 되는데 엔지니어들은 이를 “쑤신다.”라고 말한다. 인두를 들고 부품을 납을 붙였다 떼었다 해보는 것이다.
삼일 동안 쑤셨음에도 나오지 않으면 방법이 잘못된 것이다. 잘못된 방법으로 계속 테스트 해보았자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을 수 없다. 그럴 경우 과감하게 방법을 바꾸어야 한다. 방법을 바꾸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행선을 할 때 명칭 붙이기 없이 들어갔다. 그러나 좀처럼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처음부터 삼매가 형성될 리가 없다. 어느 정도 시간을 필요로 한다.
똑 같은 동작을 반복하다 보면 집중이 형성된다. 행선 할 때도 그렇고 좌선할 때도 그렇다. 처음부터 집중 되지 않는다. 이럴 때는 명칭을 붙여야 한다.
명칭붙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숙련자라도 명칭을 붙여야 한다. 마치 시동을 거는 것과 같다. 명칭을 붙이면 더 빨리, 더 쉽게 시동을 거는 것과 같다.
행선과 좌선을 하다 보면 나름대로 방법을 알게 된다. 이런 것도 ‘노우하우’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만이 알고 있는 방식이다. 남에게 설명하기 힘든 것이다. 체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명칭붙이기도 해당된다.
방법을 알고 나면 이제 써먹어야 한다. 다음 번에도 활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드문드문 행선과 좌선을 한다면 효과가 없다. 매일매일 밥 먹는 것처럼 행선과 좌선을 해야 잘 써먹을 수 있다. 이제 방법을 알았으니 매일매일 써먹고자 한다.
근본물질과 파생물질에 대하여
매일매일 행선과 좌선을 하다 보면 깨닫는 것도 많다. 경전적 지식에 대한 것도 있다. 행선을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물질(rūpa)’에 대한 것이다.
십이연기분석경(S12.2)에 물질에 대한 정의가 있다. 명색에 대한 항목에서 발견된다. 이는 “네 가지 광대한 존재, 또는 네 가지 광대한 존재에서 파생된 물질을 색이라고 한다.”(S12.2)라고 물질에 대하여 규정해 놓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물질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근본물질’이고 또 하나는 ‘파생물질’이다. 근본물질은 지수화풍 사대를 말한다. 그렇다면 파생물질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육처’라고 보고 싶다.
육처가 왜 파생물질인가? 이는 보는 것, 듣는 것 등 여섯 가지 감역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수화풍 사대와 같이 큰 덩어리도 아닌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작고 미세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파생물질로 보고 있다.
물질의 영역은 매우 넓다. 눈이 있어서 형상을 보게 되는데 놀랍게도 보이는 대상도 물질의 영역으로 본다는 것이다. 귀가 있어서 듣게 되는데 소리도 물질로 본다. 몸이 있어서 감촉하게 되는데 닿는 것도 물질의 영역에 해당된다.
이런 생각도 해본다. 사념처에서 신념처는 사대에 대한 것이고, 법념처는 육처에 대한 것이라고 구분하는 것이다. 지수화풍 사대와 같은 근본물질을 관찰하는 것은 ‘몸관찰(身念處)’로 보고, 육처와 같은 파생물질을 관찰하는 것을 ‘현상관찰(法念處)’로 보는 것이다.
지금 창 밖에서 차 소리가 나고 있다. 오토바이가 폭탄음을 내고 달리기도 한다. 이 뿐이 아니다.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등 온갖 소리로 가득하다. 그런데 이 모두가 물질이라는 것이다.
빛도 물질이고 색도 물질이다. 소리도 물질이고 향기도 물질이고 맛도 물질이다. 이런 물질은 실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비담마 논장에서는 28가지 물질에 해당되고 이를 ‘구경법’이라고 한다.
구경법은 실재하는 법이다. 그래서 빠라맛타담마(parāmaṭṭhadhamma)라고 한다. 마치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원소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구경법은 생멸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찰나생찰나멸이다.
위빠사나수행은 실재를 보기 위한 수행이다. 개념을 보는 사마타와는 다른 것이다. 실재를 보려면 개념을 해체해야 한다. 명색으로 구분해서 관찰하는 이유가 된다.
쪼개고 또 쪼개서 보아야 실재를
오늘날 과학은 해체해서 보는 것에 근거한다. 물리학이나 화학, 생물학은 해체해서 보는 것이다. 물질을 쪼개고 또 쪼개서 보는 것이다. 그렇게 보아야 실재를 볼 수 있다. 위빠사나수행도 이와 다르지 않다.
위빠사나는 분리해서 보는 것이다. 이는 위빠사나(vipassana)라는 용어자체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분리한다는 뜻의 ‘위(vi)’와 꿰뚫어 본다는 뜻의’ 빠사나(passana)’의 결합어이다. 오온에 집착된 나라는 존재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로 구분하여 새기는 것이다.
오온으로 집착된 존재를 나라고 말한다. 나라는 존재는 무더기로 뭉쳐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마치 자전거가 여러 부속품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과 같다.
무더기를 해체하면 더 이상 나라고 말할 수 없다. 자전거를 수리하기 위해서 분해해 놓았을 때 자전거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행선과 좌선을 하는 것은 나라는 존재가 허상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집착된 무더기를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관찰 했을 때 더 이상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이렇게 되었을 때 번뇌에서 자유로워진다.
번뇌가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에는 ‘나(我)’가 개입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온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에 번뇌가 일어난다.
여기 내세울 것이 얼굴밖에 없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 얼굴에 뽀드락지가 났다. 얼굴을 자신의 생명처럼 여기는 사람은 안절부절할 것이다. 얼굴을 자신의 것으로 보는 것이다. 또한 얼굴을 자아와 동일시 하는 것이다.
유튜브 끊은지 사흘째 되는 날
안거가 끝나간다. 어느새 안거를 시작한지 82일이 되었다. 8일 후가 되면 90일이 된다. 보름달을 세 번 보는 것이다. 이 기간 동안 나는 얼마나 성과가 있었는가?
재자자의 안거는 한계가 있다. 생업에 종사하면서 안거를 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선원에 들어가서 나면 효과를 볼지 모른다. 그러나 준비 되지 않은 자가 들어가면 허송세월하기 쉽다.
재가자의 안거는 부담이 없다. 나홀로 안거 나는 것이 부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막행막식하는 것은 아니다. 선원에서처럼 팔계를 지키고자 한다. 그러나 단 한가지 가능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오후불식’에 대한 것이다.
노동하는 사람은 밥의 힘으로 일한다. 저녁에도 먹어야 한다. 재가자의 우안거도 저녁밥은 필요하다. 육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먹어야 일을 할 수 있다.
재가우안거를 하면서 방일한 것이 있다. 그것은 오후와 저녁에 유튜브로 보낸 것이다. 오로지 오전만 청정하게 보냈다.
유튜브를 끊은지 사흘째 되는 날이다. 유튜브로 인하여 시간낭비가 많았다. 무엇보다 정신적인 번뇌가 컸다. 정치유튜브에 매몰 되었을 때 이념투쟁의 장이 되었다.
유튜브 없는 세상에 산지 이제 고작 사흘 되었다. 유튜브를 보지 않으니 시간이 철철 남는다. 시간부자가 된 것이다. 이 남는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까?
유튜브를 보지 않으니 마음이 한가해졌다. 안거 막판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런 것도 어쩌면 수행의 진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남는 시간에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2024-10-0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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