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명학공원에서 본 천사(天使)

담마다사 이병욱 2024. 10. 16. 11:36

명학공원에서 본 천사(天使)
 
 
세상이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몸이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나만 무겁게 느껴진다. 이럴 때 지나간 과거를 돌아보게 된다.
 
재가우안거 89일째이다. 내일이면 재가우안거 회향일이다. 우안거가 끝났다고 해서 매일 아침 행하던 행선과 좌선을 그만 두는 것은 아니다. 매일 밥을 먹듯이 매일 행선과 좌선을 밥먹듯이 하는 것이다.
 
일상이 수행이 되려면
 
수행은 일상이 되어야 한다. 또한 일상은 수행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늘 새김(sati)이 유지 되어야 한다. 정신과 물질을 새기는 것이다. 또한 가르침을 새기는 것이다. 그리고 체험을 새기는 것이다.
 
새긴다는 말을 좋아한다. 마음챙김이라는 말보다 탁월하다. 왜 그런가? 마음챙김이라는 말은 명색, 가르침, 체험을 잘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싸띠의 제1의미인 기억이라는 말이 빠져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명색을 마음챙김한다’, ‘가르침을 마침챙김한다’. ‘체험을 마음챙김한다’라는 말은 매우 어색하다. 왜 그런가? 명색, 가르침, 체험이라 말에는 기억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기억이 빠진 마음챙김이라는 말은 화두 들 때 ‘화두챙긴다’와 같이 특별한 때나 사용되는 술어로 본다.
 
일상이 수행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늘 대상을 명색으로 구분해서 새겨야 한다. 새기는 방법은 정신을 새기고 물질을 새기는 것이다. 정신따로 물질따로 새기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고도로 마음이 집중된 상태여야 한다. 찰나삼매로 가능한 것이다.
 
일상이 수행이 되기 위해서는 늘 가르침을 새겨야 한다. 경전에서 본 기억할만한 문구를 새기는 것이다. 논서에 본 감동적인 문구를 새겨야 한다. 가르침을 기억하고 새기는 것도 수행이다.
 
일상이 수행이 되려면 체험한 것을 새겨야 한다. 수행과정에 있어서 체험이 있게 되는데 특별한 경험을 새기는 것이다. 마치 여행지에서 놀라운 광경을 보았던 것처럼, 수행 중에 있었던 특별한 체험을 늘 기억하는 것이다.
 
허리 뻐근함으로 인하여
 
오늘 아침 수행은 실패했다. 몸이 따라 주지 않은 것이다. 허리가 문제가 생겼다. 그러다 보니 세상이 무거운 것처럼 느껴졌다. 무력한 상태가 되었다. 몸이 마음에까지 영향을 준 것이다.
 
어제 저녁 책을 운반하다가 무리했다. 허리 다칠 것을 염려해서 허리를 곧게 펴서 두 팔의 힘으로만 운반하려 했으나 허리에 영향을 준 것이다. 아침이 되니 뻐근함으로 나타났다.
 
어제 저녁 책을 찾아 왔다. 11종류 22권의 책이다. 보관용으로 두 질씩 만들었다. 이렇게 함으로 인하여 만든 책은 137권이 되었다. 커다란 책장에 내가 쓴 책으로 가득하다. 집에도 보관용 책장이 있는데 공간이 부족할 정도가 되었다.
 
책 무게는 상당했다. 잘못하면 허리 다칠 것을 염려 했다. 예전에 허리를 다친 적이 있기 때문에 재발할 것을 우려한 것이다.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가벼운 허리통증이 나타났다. 작은 통증이 모든 것을 삼켜 버린 것 같다. 육체적 통증이 정신적 괴로움으로까지 전이된 듯 하다. 수행의 힘으로 극복하고자 했으나 속수무책이다. 하물며 중병에 걸린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할까?
 
명학공원에서 본 천사(天使)
 
글을 쓰고 나면 명학공원으로 산책 나간다. 공원에는 근처 요양원에서 산책 나온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도우미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를 타고 있는 모습이다. 그들의 모습에서 천사를 본다. 늙음의 천사, 죽음의 천사를 보는 것이다.
 
휠체어 탄 사람을 보면 힘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다. 어쩌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들의 표정을 보면 무표정한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고 희망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보인다.
 
타인은 나를 바라보는 거울이 된다. 타인의 행위에서 나 자신을 돌아 본다. 휠체어 탄 사람을 보면 미래 나의 모습이라고 생각된다. 근처 요양원에는 누워 지내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흴체어 탄 사람은 나의 미래 모습이다. 이렇게 본다면 명학공원 휠체어 탄 사람은 천사(天使)가 된다. 어떤 천사인가? 맛지마니까야 ‘천사의 경’에서 야마왕은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아, 인간 가운데 여자나 남자가 병들고 괴로워하는데 중태이고, 스스로 똥과 오줌으로 분칠을 하고, 다른 사람이 일으켜 주어야 하고, 다른 사람이 앉혀 주어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M130)
 
 
요즘 백세시대가 되었다. 내 나이 또래 사람들의 살아 있는 부모 나이는 구십대가 보통이다. 이제 노인이 노인을 케어(care)하는 시대가 되었다. 페이스북에서 보는 부모 보살핌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천사가 따로 없다. 늙음이라는 천사가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천사의 경고 메세지를 보면
 
주변에는 천사가 많다. 잘 보면 보인다. 어떤 천사인가? 다섯 천사가 있다. 맛지마니까야 천사의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다섯 천사를 소개하고 있다.
 
1)똥과 오줌으로 분칠하며 누워 있는 갓난아기천사
2)팔십세나 구십세가 되어서 허리가 서까래처럼 구부러지고 지팡이를 짚고 이빨이 빠지고 머리가 희어지고 주름이 지고 검버섯이 있는 노인천사
3)중병으로 괴로워하며 누워 지내며 똥과 오줌으로 분칠을 하고 남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 환자천사
4)갖가지 범죄를 저질러서 감옥에서 고통 받는 죄인천사
5)죽은지 며칠 되었을 때 부풀게 되고 푸르게 되고 고름이 생겨나는 시체천사
 
명학공원에 가면 중병천사를 볼 수 있다. 이는 천사의 경고 메세지나 다름 없다. 언젠가는 너도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애써 천사들을 피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런 게송을 읊었다.
 
 
“천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자는 방일하네.
비속한 몸을 받는 사람들
그들은 오랜 세월 슬퍼한다.
 
천사의 경고를 받고 나서야
이 세상에서 참사람들은
언제나 고귀한 가르침에
교훈을 찾고 방일하지 않는다.
 
집착에서 두려움을 보고
태어남과 죽음의 원인에
집착하지 않아 해탈하고
태어남과 죽음을 부수었다.
 
안온에 도달하여 행복하고
지금 여기에서 열반을 얻어
모든 원한과 두려움을 뛰어넘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M130)
 
 
지금 이 순간에도 천사는 경고의 메시지를 날리고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경고를 무시하며 마치 천년만년 살 것처럼 방일하게 살아간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인 것? 요양원에서 기저귀를 차고 누워 지내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천사의 메시지는 생, 노, 병, 사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 범죄가 하나 더 추가 되어 있어서 다섯 천사의 메시지가 있다. 공통적으로 “이보게, 그대는 방일한 탓으로 신체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선행을 하지 못했다. 어찌 그들은 그대의 방일함에 걸맞게 그대를 처리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대의 악한 행위는 그대의 어머니나 아버지나 형제나 자매나 친구나 동료나 친지나 친척이나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들에 의해서 행해진 것이 아니라, 악한 행위는 그대가 스스로 행한 것이다. 그대가 그 과보를 겪어야 한다.”(M130)라는 메시지다.
 
나는 후회 없는 삶을 살았는가?
 
흔히 ‘자업자득’이라고 한다. 이를 ‘자작자수’라고도 말한다. 자신이 지은 행위에는 반드시 과보가 따름을 말한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함부로 살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젊다고 해서, 지금 건강하다고 해서 막행막식한다면 천사의 경고를 무시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 왔는가?
 
부처님 가르침을 알기 전에는 막행막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알고나서도 한참후까지 계속 되었다. 최근에야 어느 정도 멈춘 것 같다. 누군가 말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오랜 세월이 걸린 것이다.
 
요즘 몸이 예전 같지 않다. 그날그날 컨디션은 다르다. 오늘 좋았다가도 내일 어떻게 악화될지 알 수 없다. 그래서일까 노인건강은 건강이 아니라고 했을 것이다.
 
나도 이제 노인이 된다. 몇 달만 지나면 국가가 인정하는 노인이 되는 것이다. 이는 지공거사가 되는 것으로 현실이 된다. 전철이나 지하철 무임 탑승권이 나오면 노인이 되는 것이다.
 
노인이 되면 언제 죽을지 모른다. 노인건강은 건강이 아니기 때문에 하루 앞을 내다 볼 수 없다. 이럴 때 젊은 시절을 방일하게 살았다면 후회가 클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후회 없는 삶을 살았는가?
 
시간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어제 저녁 제일기획에서 책을 가져 왔다. 한꺼번에 인쇄와 제본을 주문한 것이다. 본래 허리가 좋지 않은데 무거운 것을 들다가 허리에 이상이 생겼다.
 
조심한다고 노력했다. 자고 나니 허리에 아픔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참을 수 없는 정도는 아니다. 시간 지나면 사라지는 통증이다. 이런 것은 문제도 아니다. 진짜 문제는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불교에 입문한 것은 시간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들어 왔다. 결과는 어떠한가? 불교입문 20년에 어느 정도 해결의 실마리는 찾은 것 같다. 부처님 가르침 속에 있었던 것이다. 초기경전을 읽고 논서를 읽는 과정에서 알게 된 것이다.
 
스스로 대견해 보일 때
 
지난 시절을 돌아 본다. 나는 잘 살았는가? 현재 시점에서 본다면 어느 정도 성공적인 삶으로 본다. 이는 돈과 무관한 것이다. 돈으로 따진다면 실패한 인생이다. 그러나 가르침과 관련하여 이루어 놓은 성과로 본다면 어느 정도 성공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성공적인 삶의 근거는 무엇인가? 이는 글쓰기와 책만들기를 들 수 있다. 눈으로 보여 줄 수 있는 것이다.
 
2006부터 시작된 글쓰기는 이제 7,800개 가량의 글로 나타났다. 블로그에서 눈으로 볼 수 있다. 2018년부터 시작된 책만들기는 이제 136권이 되었다. 이것 역시 눈으로 보여 줄 수 있다. 블로그 ‘진흙속의연꽃’에서 ‘책만들기’ 카테고리에 들어가면 피디에프(pdf)파일이 모두 올려져 있다. 또한 피디에프 파일을 종이책으로 만들어서 책장에 진열해 놓았다.
 

 

백권당에는 커다란 책장이 하나 있다. 책장에는 136권의 책이 진열되어 있다. 남이 쓴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쓴 것이다. 내가 세상에 자랑할만한 것은 이것이다. ‘나는 이렇게 살았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것도 삶의 결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책상 앞에 있는 책장의 책을 늘 바라본다. 볼 때마다 “내가 큰일 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생을 살면서 제일 잘한 일 같다. 만약 내가 먹고 마시고 즐기는 삶에 세월을 다 보내 버렸다면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만일 중병에 걸려 누워 있다면 이런 일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할 것이다. 책을 볼 때마다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한다.
 
홀로서기 한지 19년
 
여기까지 오기까지 오랜새월 걸렸다. 직장생활 할 때는 직장이 삶의 전부인줄 알았다. 직장과 집을 오가는 세월을 20년 살았다. 그러다 어느 날 직장에서 쫓겨 나게 되었을 때 홀로서기를 해야 했다. 어쩌면 진정한 자신만의 삶이 시작된 것인지 모른다.
 
홀로서기 한지 19년 되었다. 이제 직장생활 한 세월만큼 세월을 산 것이다. 사십대 중반 이후 삶은 이전 삶과 다른 삶이 되었다. 글쓰기 하는 것이 시작이다.
 
글쓰기 하면 자신의 내면을 볼 수 있다. 자신과 대화할 수 있다. 이런 세월이 18년 되었다. 그렇다고 사람이 급격하게 바뀌지 않는다. 서서히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지금과 예전의 나를 비교해 본다. 확실히 변화는 감지된다. 화를 내지 않는 것이 크다. 예전에는 분노의 삶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글쓰기를 하고 경전을 읽음에 따라 서서히 달라 졌다. 지금은 거의 화를 내지 않는다.
 
전에는 탐욕의 삶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후를 염려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노후자금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는 현실이 너무 불안했기 때문이다. 직장을 수도 없이 옮긴 것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부동산과 주식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부동산에 관심 갖는 것은 불로소득을 노리는 것이다. 그러나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욕심을 부리면 부릴수록 악화된다. 주식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익을 내고자 하면 할수록 더욱더 까지는 것이다.
 
불로소득으로 한탕 챙기겠다는 생각을 접은 것은 오래 되었다. 특히 주식은 탐욕의 놀이터나 다름 없다. 단타매매로 하루를 보냈을 때 정신은 황폐화 되었다. 마치 도박장에서 가지고 간 돈을 다 털렸을 때 일어나듯이, 여유 돈이 다 털렸을 때 그만 두었다. 주식 그 자체를 손절한지 20년이 다 되어 간다.
 
삼십년 전쟁을 끝내고
 
십년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해 보면 확실히 차이가 있다. 이십년전의 나와 지금이 나는 비교가 안될 정도이다. 욕망에서 멀어지고 분노에서 멀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변화는 가정에서도 감지된다.
 
요즘에는 부부싸움을 하지 않는다. 불과 오륙년까지만 해도 감정싸움을 했다. 감정싸움 마저 그만 두게 된 것은 역시 담마의 힘이 크다. 꾸준히 글쓰기를 하고 경전을 읽는 등 나름대로 깨우친 것이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이런 가르침이 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 가운데 가장 먼저 마을에서 탁발하고 돌아오는 자가 자리를 마련하고, 음료수와 세정수를 마련하고 남은 음식을 넣을 통을 마련합니다.” (M31)
 
 
이 말에 감동받았다. 먼저 탁발 갔다 온 자가 식사준비를 하는 것이다. 나중에 온 자는 뒷처리를 한다. 이런 가르침을 생활속에서 실천해보고 싶었다.
 
여기 휴지가 떨어져 있다. 내가 줍지 않아도 누군가 주울 것이다. 집 안에 휴지가 떨어져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예전에는 줍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먼저 마을에서 탁발하고 돌아오는 자가 자리를 마련하고”라는 구절을 접하자 마음이 달라졌다. 먼저 본 사람이 줍는 것이다.
 
지금 해야 할 일이라면 지금 해야 한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잘 해야 한다. 이런 말은 도처에서 회자된다. 이런 말을 가정에 적용하면 화합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 첫 단계는 먼저 본 사람이 먼저 하는 것이다.
 
경전에는 부부화합에 대한 가르침이 도처에 있다. 승가의 화합에 대한 가르침을 응용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부부지간에 적용하면 싸움이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와 같이 ‘내가 나의 마음을 버리고 이 존자들의 마음을 따르면 어떨까?’라고 생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래서 저는 제 마음을 버리고 이 존자들의 마음을 따랐습니다. 저희들의 몸은 다 다르지만 마음은 하나입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의 몸은 다 다르지만 마음은하나입니다.”(M31)
 
 
흔히 ‘부부일심동체’라고 말한다. 그러나 동체가 될 수 없다. ‘부부일심이체’라는 말은 타당하다. 두 몸은 하나가 될 수 없지만 두 마음은 한마음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는 자신의 마음을 버렸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저는 제 마음을 버리고 이 존자들의 마음을 따랐습니다. 저희들의 몸은 다 다르지만 마음은 하나입니다.”(M31)라고 말하는 것이다.
 
의견이 다를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각자 견해를 주장하면 다툼이 일어날 것이다. 부부지간이면 부부싸움이 된다. 말다툼이 감정싸움이 되고 더 나아가면 마음의 벽을 쌓아 버린다. 이렇게 되면 불행한 삶이 된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 가르침대로 상대방의 마음이 되는 것이다. 상대방이 하자는 대로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런 식으로 삼십년 전쟁을 끝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안식처를
 
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다. 한번 형성된 성향은 그대로 가는 경향이 있다. 마치 얼굴이 바뀌지 않는 것과 같다. 그래서일까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사람은 정말 고쳐 쓸 수 없는 것일까? 죽을 정도로 사건이 있다면 변화가 있을 것이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변함 없는 일상에서 변화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사람은 변해도 서서히 변한다. 급격한 변화는 죽을 고비를 가져야 한다. 수행을 하면 좀더 빠르게 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고 가르침을 바르게 실천해서 체험 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알고 나서 서서히 변한 것 같다. 오년전의 나와 다르고, 십년전의 나와는 더 다르고, 이십년전의 나와는 아주 다르다.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고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만약 내가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정년까지 일했다면 부처님 가르침을 조기에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인생에서 우여곡적을 겪었기 때문에 가르침을 비교적 이르게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글쓰기한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본격적으로는 수행을 한 것이다.
 
수행의 효과는 매우 크다. 사람을 빠르게 변화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번 재가우안거를 통해서 감성적인 면이 옅어진 것을 들 수 있다. 이미우이음악에 의지해서 세월을 보냈는데 끊어 버린 것이다. 무엇보다 유튜브를 끊은 것이다. 일체 타인의 언어적 행위에 놀아나지 않겠다는 의지의 실행인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안식처를 찾았다.
 
천사의 경고 메시지를 무시하지 말아야
 
도시에 살아도 산중에 산 것 같다. 아침에 눈을 뜨자 마자 백권당에 오면 산중의 암자에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 일체 언어적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글을 쓰고 경전을 읽는 것은 예외이다.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는 것도 새김(sati)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제 안거가 끝나간다. 지난 세 달 동안 나는 얼마나 변했는가? 세 달 전과 비교하면 확실히 차이를 실감할 수 있다. 한살이라도 더 나이 먹기 전에 성과를 내야 한다.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방일하지 말아야 한다. 천사의 경고 메시지를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2024-10-1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