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서 있는 수행(住禪)을 어떻게 할 것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24. 10. 11. 12:01

서 있는 수행(住禪)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한시간이 금방 지나가버렸다. 행선만 한시간 했다. 그러나 오늘은 특별했다. 서 있는 수행 위주로 한 것이다. 이를 주선(住禪)’이라고 이름 붙여 보았다.

 

재가우안거 84일째이다. 우언거도 이제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앞으로 6일 남았다. 다음주 목요일 1017, 음력으로 9월 보름날에 종료된다. 담마와나선원에서는 이번주 일요일 1013일에 우안거해제 탁발법회가 열두 분의 상가스님을 모시고 열린다.

 

나는 이번 우안거기간에 얼마나 성과를 내었는가? 점진적인 향상은 있는 것 같다. 자신만 아는 것이다. 마치 글을 쓸 때 단계를 느끼는 것과 같다.

 

어떻게 해야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글쓰기 한지 18년 되었다. 2006년부터 쓰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블로그에는 7,800개 가량의 글이 있다.

 

거의 매일 쓰다시피 했다. 오전은 글쓰기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글을 쓰다 보니 어느 때 향상된 것을 느꼈다. 마치 한단계 올라간 듯한 느낌이다. 몇 번 있었다. 수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운동을 하면 근육이 생긴다. 매일 꾸준히 두세 시간 몇 년 운동하면 없던 근육이 생겨날 것이다. 남들과 비교 했을 때 근력이 월등하게 강할 것이다. 그 결과 엄청난 힘을 낼 것이다. 글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처음 글쓰기 했을 때 A4 한장도 채우기 힘들었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잘 쓰려고 노력하다 보니 시간이 걸렸다. 남들 보기 좋게 잘 쓰려고 하다 보니 더 안써지는 것을 발견했다.

 

어떻게 해야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여러 글쓰기 방법이 있다. 유튜브에서도 볼 수 있다. 하나의 방법이 있다. 그것은 말하듯이쓰는 것이다. 말하듯이 쓴 글이 가장 잘 쓴 글이라는 것이다.

 

필력(筆力)이 생겼는데

 

글을 배워 본 적이 없다. 직장 다닐 때는 기안서나 보고서 쓰는 정도에 그쳤다. 직장을 타의로 그만 두게 되었을 때 갈 데가 없었다. 시간이 철철 남는 시간부자가 되었다. 블로그를 만들어 처음으로 글이라는 것을 써 보았다. 2006년의 일이다.

 

처음 글 쓸 때 수필 쓰듯이 쓰고자 했다. 그날 가장 인상 깊었던 일 가운데 하나를 선정해서 보고 듣고 느낀 대로 쓰고자 했다.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쓰고자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구성도 엉성하고 맞춤법도 맞지 않았다. 블로그 초창기 때 글을 보면 확인된다.

 

블로그에 실려 있는 글은 글의 산역사나 다름 없다. 처음 글쓰기 할 때부터 시작하여 글의 변천사를 그대로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세월이 갈수록 글은 길어지고 내용은 풍부해졌다. 이런 것도 글쓰기의 진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른바 필력(筆力)이 생긴 것이다.

 

만시간의 법칙

 

만시간의 법칙이 있다. 어떤 일이든지 하루에 서너 시산 집중에서 매일 집중할 때 십년이 지나면 누구나 프로페셔널이 된다는 이론이다. 기술분야라면 장인이 될 것이다. 학문을 탐구하는 사람이라면 박사가 될 것이다.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나의 글쓰기는 18년 되었다. 십년이 훌쩍 넘어 이제 20년 가까이 된다. 만시간 법칙을 적용한다면 나는 프로페셔널이 된 것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일까 남들에게 없는 능력이 생긴 것 같다. 필력, 글 쓰는 능력을 말한다.

 

자화자찬하면 자만이 된다. 글쓰기 18년을 자랑하는 것도 교만일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은 만시간법칙에 해당된 것 같다는 것이다. 초창기 때와 비교하면 전문가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글을 쓸 때 쉬지 않고 쓴다. 한번 주제가 정해지면 그 주제를 향하게 맹렬하게 돌진한다. 한번 자리에 앉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보통 두세 시간 앉아 있는다.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끝난다.

 

글이라는 것을 배워 본 적이 없다. 그러다 보니 독수리타법이다. 손가락 몇 개 가지고 자판을 때리는 것이다. 그것도 자판을 보지 않고 두드린다. 모니터만 보고서 때리고 두드리는 것이다. 속도가 무척 빨라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생각했던 것이 하얀 여백에 척척 박힌다.

 

글은 논리이다. 논리가 성립되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다. 글을 쓰기 전에 먼저 씨나리오를 구성해야 한다. 머리 속에서 구성한다.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면 자판만 때리면 된다. 나중에 써 놓고 보면 고칠 데가 별로 없다. 소제목을 다는 과정에서 필터링 된다. 만시간의 법칙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내가 쓴 글로 공부를 하고 있다고

 

어제 페이스북에서 어느 페친으로부터 글을 하나 받았다. 놀랍게도 내가 쓴 글로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글을 남긴 페친은 오래 전부터 글을 보아 주던 분이다. 이름이 낯익다. 페친 J선생은 늘 남기신글들 또법문들 마음에 새기며 좋은글들은 노트에 체크해놨다가 저희 나눔단체방에 게재 합니다.”라고 글을 남겼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일개 블로거가 쓴 글을 공부모임에서 돌려 보고 토론한다는 것이다.

 

정보통신과 인터넷시대이다. 인터넷에 올린 글은 공유되고 가져 갈 수 있다.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실려 있는 글은 모두 가져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른쪽 마우스버튼을 풀어 놓았다. 인터넷에 올려지는 순간 내것이 아니다.

 

마음의 근육

 

운동을 하면 근육이 생기고 글을 쓰면 필력이 생긴다. 그러나 몇 번 해서는 되지 않는다. 매일 두세 시간, 또는 서너 시간씩 꾸준히 몇 년 해야 할 것이다. 십년하면 누구나 전문가가 된다. 없던 근육이 생기는 것이다.

 

근육이 생겨나면 남보다 비교할 수 없는 힘이 생겨난다. 수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매일 몇 시간 꾸준히 하다 보면 마음의 근육이 생겨날 것이다. 이를 심력(心力)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또 다른 말로 수행력(修行力)이 된다.

 

수행을 하면 수행의 힘이 생겨난다. 마음의 근육이 생겨나서 남보다 월등한 힘을 발휘한다. 매일 서너 시간 집중해서 십년 지났다면 프로페셔널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를 수행전문가, (도사)道士라고 해야 할까?

 

사무실에 명상공간을

 

수행을 처음 시작한 것은 200812월의 일이다. 그때 묘원선생이 지도하는 한국위빠사나선원에 다녔다. 강남구 논현동에 있다. 지금은 한국명상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일주일에 한번 다녔다.

 

위빠사나수행처에 가면 위빠사나수행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경행하는 방법과 좌선하는 방법을 말한다. 그러나 일주일에 한번 해가지고는 발전이 없다. 일년 다녔지만 매번 그 자리였다.

 

수행을 본격적으로 하려면 집중수행을 해야 한다. 선원에 들어가서 집중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업이 있는 재가자가 열흘 가량 시간 내는 것은 쉽지 않다. 어쩌면 이것도 핑계인지 모른다. 해외여행 가는데 일주일이나 이주일 시간 내기 때문이다.

 

미얀마에 간 것은 20181231일의 일이다. 양곤 외곽에 있는 담마마마까 국제선원에서 보름 머물러 있었다. 함께 간 사람들 상당수는 한두 달 있었다. 생업이 있어서 보름 이상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미얀마에 가면 수행이 자동으로 되는 줄 알았다. 마치 절에 살면 자동으로 깨달을 것 같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전에 수행과 담 쌓고 살던 사람이 갑자기 하루 종일 수행하려 하니 잘 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미얀마에 다녀와서 얻은 것이 있다. 그것은 수행을 생활화 하는 것이다. 마치 밥 먹듯이 수행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자리를 비우고 선원에 들어가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생각해 낸 것이 사무실에 명상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20201월 함께 사무실을 공유하던 사람이 나갔다. 거의 칠팔년 함께 있었던 것 같다. 공간이 남았다. 또 다시 사람을 들일까하다가 그만 두었다. 이제는 나를 위한 공간으로 활용하고 싶었다.

 

사무실은 열 평 가량 된다. 칸막이를 이용해서 반으로 나누었다. 그 결과 다섯 평의 공간이 확보 되었다. 화분 놓는 공간을 제외하면 세 평이 되었다. 매트를 깔고, 그 위에 카페트를 깔고, 그 위에 방석을 올려 놓았다. 방석 위에는 레자방석이 네 개 있다. 엉덩이를 받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금강좌(金剛座)’가 완성되었다.

 

수행이라 하여 앉아 있는 것만 말하지 않는다. 걷는 것도 수행이다. 걷는 수행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마하시 전통에서는 좌선과 행선을 동등하게 취급하다. 좌선을 한시간 하면 반드시 행선도 한시간 하는 식이다. 그래서 선원 일일수행시간표를 보면 짝수 시간에는 좌선을 하고 홀수 시간에는 행선을 하도록 되어 있다.

 

좌선공간은 완성되었다. 마하시 방식 수행을 하기 때문에 행선도 해야 한다. 처음에는 좌선 공간에서 했다. 그러나 효율이 나지 않았다. 푹신한 매트가 문제가 되었다. 딱딱한 바닥이어야 한다. 생각해 낸 것이 복도에 행선대를 만드는 것이다.

 

궁리하다 보면 아이디어가 떠오르게 되어 있다. 벽면 통로에 행선대를 만드는 것이다. 출입문에서 벽을 따라 들어 오게 되는데 약 5미터의 길이가 된다. 이를 보폭을 30센티로 잡아서 검정 테이프를 붙였다.

 

 

명색(정신과 물질)을 관찰하라는 말에 자극 받아

 

좌선공간도 마련되고 행선대도 마련되었다. 이제 매일 한시간씩 수행하면 된다. 그러나 처음처럼 잘 진행되지 않았다. 업무에 바쁘다 보면 앉을 시간이 나지 않았다. 오후가 되면 마음이 해이해졌다. 저녁에는 유튜브 시청 등으로 들뜬 마음이 되어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좋은 생각이 떠 올랐다. 안거를 해보는 것이다. 마침 작년 담마와나선원 우안거 입재법회 때 빤냐와로 스님의 법문이 떠올랐다. “정신과 물질을 관찰하는 안거가 되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에 자극 받았다.

 

빤냐와로 스님이 오는 날은 빠지지 않았다. 법문이 들을 만 했기 때문이다. 법회가 끝나면 반드시 후기를 작성했다. 그런데 작년 우안거 입재법회 때 정신과 물질을 관찰하라는 말이 크게 다가왔다는 것이다.

 

수많은 법문을 들었지만 정신과 물질을 관찰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수행처에서도 들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명색(정신과 물질)을 관찰하라고 했다. 참으로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 말을 듣고 안거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를 재가우안거라고 이름 지었다.

 

우안거 수행기를 작성하고

 

작년 우안거는 88일 동안 진행되었다. 매일 아침 한시간 좌선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행선은 좌선을 잘하기 위한 몸풀기 정도로 보았다. 이런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행선도 좌선 못지 않게 법의 성품을 보기 위한 훌륭한 수행방법이다.

 

작년에 우안거를 하면서 매일 후기를 작성했다. 한시간 좌선에 후기를 두세 시간 썼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후기 쓰는 것도 수행이다.

 

테라와다불교에서는 교학과 실천을 동등하게 보고 있다. 마치 새의 양날개처럼 보는 것이다.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pariyatti’)하고, 가르침을 바르게 실천 (patipatti)’하면, 법의 성품을 관통(pativedha)’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우안거 때 작성된 수행기를 하나의 책으로 만들었다. 90개의 글에 692페이지 달한다. 이를 ‘111 위빠사나수행기 VI 2023 재가우안거라고 제목을 달았다. 블로그 진흙속의연꽃책만들기카테고리에 피디에프(pdf)파일을 올려 놓았다. 누구든지 다운 받을 수 있다.

 

피디에프 파일로 되어 있는 것을 인쇄-제본해서 책 몇 권을 만들었다. 한권은 우안거를 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 준 빤냐와로 스님에게 보냈다. 읽어 보았는지는 알 수 없다. 또 한권은 담마와나선원 선원장 떼자사미 스님에게 주었고, 또 한권은 담마와나선원 재가운영위원장 최광희 선생에게도 주었다.

 

유튜브 없는 세상에서 살다보니

 

작년에 이어 올해도 우안거를 나고 있다. 생애 두 번째 우안거이다. 이런 재가우안거에 대하여 법랍으로 인정해 주는지 알 수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의 방식대로 안거를 보내고 있다.

 

안거를 하면 할수록 점차 향상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몸과 마음에도 변화가 생기는 것 같다. 이번 안거에서 시일이 지날수록 감각적인 것에서부터 멀어지는 것 같다.

 

지난 십수년동안 매일 듣던 이미우이 음악을 듣지 않게 되었다. 가장 큰 변화이다. 더 큰 변화는 유튜브를 끊은 것이다.

 

요 며칠 동안 유튜브를 보지 않는다. 안거를 하면서 오전은 수행과 글쓰기로 보내지만 오후가 되면 유튜브로 보냈다.

 

오후 2시가 되면 매불쇼를 봐야 했다. 정치관련 이슈에 빠지다 보니 길을 걸으면서도 유튜브를 듣게 되었다. 공원에 휴식 취하러 갈 때도 듣게 되었다. 저녁에 편한 자세에서도 듣게 되었다. 잠자기 전에도 들었는데 들은 채로 자기도 했다. 수행 따로 생활 따로가 된 것이다.

 

유튜브 없는 세상 닷새 째 되는 날이다. 유튜브를 보지 않으니 세상이 조용하다. 유튜브 없이 살다 보니 시간이 철철 남는다. 갑자기 시간부자가 된 것 같다. 한가하게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하고자 한다.

 

안거는 사람을 바꾸는 것 같다. 점진적인 변화가 보인다. 음악을 멀리하고 이제는 유튜브도 보지 않게 되었다.

 

감각적 대상에 마음에 가 있으면 시간을 빼앗긴다. 무엇보다 마음이다. 마치 악마의 영역에 있는 것과 같다. 나의 삶이 아니다. 그런데 감각적 욕망에서 멀어지니 이제야 나 자신의 삶을 사는 것 같다. 선원에서 사는 것과 다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주선(住禪)이라고 이름 붙여 보았는데

 

이번 안거에서 나름대로 깨우친 것이 있다. 그렇다고 깨달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수행방법에 대한 것이다. 나만의 수행방법이다. 오늘 아침 행선에서 서서 하는 수행이 그랬다.

 

수행이라 하여 좌선과 행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대념처경 몸관찰항목에 있는 네 가지 행동양식고찰에 대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는 또한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걸어가면 걸어간다고 분명히 알거나, 서있으면 서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앉아있다면 앉아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누워있다면 누워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신체적으로 어떠한 자세를 취하든지 그 자세를 그대로 분명히 안다.”(D22.5)라는 가르침을 말한다. 이는 행(), (), (), ()에 대한 것이다.

 

네 가지 행동양식 행, , , 와는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행하고 있는 것이다. 행은 행선에 대한 것이고, 좌는 좌선에 대한 것이고, 와는 와선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주()에 대한 것은 아직 보지 못했다. 이를 주선(住禪)’이라고 이름 붙여 보았다.

 

주선, 주선이라는 것도 있을까? 아마 누군가는 이런 말을 사용하는지 모른다. 오늘 아침 행선하다가 서 있는 것에 대하여 주선이라고 하면 어떨까?”라고 생각하여 이름 붙여 본 것이다.

 

머리 끝에서부터 발 끝까지 스캔 하고자 했으나

 

행선할 때 세 가지가 요청된다. 걸을 때, 멈출 때, 그리고 돌 때를 말한다. 모두 정신법과 물질법을 새겨야 한다. 이제까지 걸을 때만 명색을 새겼다. 돌 때는 의도를 새기고자 했다. 그런데 서 있을 때가 문제가 되었다.

 

서 있을 때 어떻게 서 있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위빠사나수행 지침서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다. 걷는 것만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그런데 위빠사나 지도법사는  서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알려 준다. 김진태 선생에게 배웠다.

 

수년전의 일이다. 정의평화불교연대(정평불)에서 일박이일 여름 수련회를 갔었다. 그때 수행법사로 김진태 선생을 초청했다. 내가 사무총장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나의 요청에 김진태 선생은 무보수로 기꺼이 응해 주었다.

 

수련회 시간에 수행시간이 있었다. 위빠사나 기초에 대한 것이다. 김진태 선생은 서 있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김진태 선생은전신을 스캔하라고 했다. 가만 서 있지 말고 느낌을 관찰하라는 것이다.

 

서 있을 때는 느낌을 관찰해야 한다. 어떻게 관찰하는가? 머리 끝에서부터 발 끝까지 보라고 했다. 초보자가 따라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아무리 해도 스캔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마치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색깔이 변하듯이 차츰차츰 내려 가며 스캔하는 것을 상상한 것이다.

 

하루 수행해서는 잘 모른다. 수련회 때 하루 해 본 것 가지고는 되지 않는다. 매일 똑 같은 행위를 밥 먹듯이 반복해야 한다. 일없이 무의미하게 반복 했을 때 터득된다. 서 있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안거 기간 중에 행선과 좌선을 각각 30분씩 했다. 행선이 잘 되는 날은 한시간으로 연장하고 좌선은 생략했다. 그런데 문제는 서 있을 때였다. 머리 끝에서부터 발 끝까지 스캔하고자 했으나 잘 되지 않는 것이었다.

 

명칭 붙여 스캔 했더니

 

잘 되지 않으면 방법을 바꾸어야 한다. 서 있을 때 스캔이 잘 되지 않자 명칭을 붙여 보기로 했다. 오늘 아침 처음 시도한 것이다. 결과는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서 있을 때 스캔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성급함이다. 빠른 속도로 하고자 했을 때 순식간에 내려 간다. 이래 가지고는 법을 볼 수 없다. 행선한다고 해서 발을 빠르게 이동하는 것과 같다.

 

위빠사나 수행자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지침서에 따르면 허리 아픈 환자처럼 행동하라라고 했다. 천천히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행선할 때도 발을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여섯 단계 과정을 거친다. 서 있을 때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서 있는 것도 수행이다. 주선, 서 있는 수행을 잘 하기 위해서 명칭을 붙여 보았다. 모두 다 붙일 수 없다. 중요 부위만 붙여야 한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발바닥, 무릎, , , , 눈이다. 이렇게 여섯 군데만 명칭 붙여 보고자 했다.

 

서 있을 때 스캔은 위에서 아래로 하고자 했다. 다시 아래에서 위로 올라 가면 마치게 된다. 2회 반복하는 것이다.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스캔 하는 것이 된다.

 

가장 먼저 눈에 마음을 두었다. 이때 , , 한다.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눈 모양을 떠올려서는 안된다. 감은 눈의 촉촉함을 느끼는 것이다. 다음으로 코로 가면 , , 하며 바람을 느낀다. 입으로 가면 , , 하며 두 입술이 닿는 감촉을 느낀다. 배로 가면 , , 하며 부품과 꺼짐의 움직임을 본다. 무릎으로 가면 무릎, 무릎, 무릎하며 뻣뻣함을 느낀다. 발바닥으로 가면 발바닥, 발바닥, 발바닥하며 차가운 감촉을 느낀다. 지수화풍, 사대에 대한 것이다. 

 

오늘 처음으로 명칭 붙여서 서 있는 수행을 해보았다. 이제까지 한번도 하지 않은 것이다. 누군가는 이런 방식으로 할지 모른다.

 

명칭을 붙여서 해 보았더니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었다. 스캔이 되는 것이었다. 이제 방법을 알았으니 다음에도 적용하고자 한다.

 

 

2024-10-1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