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지금 명색을 새기고 있는가? 2024년 테라와다 재가우안거 회향
명색과정을 새기다 보니 몰입이 되었다. 명색과정을 새기니 정신과 물질의 처음과 끝이 보였다. 멈춤도 보였다. 이 세상에 명색 아닌 것이 없다. 다른 것은 없다. 이 세상에 정신과 물질, 또는 물질과 정신의 과정만 있는 것만 같다.
오늘은 재가우안거 90일째이다. 오늘은 음력 구월 보름으로 안거가 끝나는 날이기도 하다. 이 모든 수행공덕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먼저 선망 부모님께 회향한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고자 하는 모든 존재들에게 되돌린다.
세 달 동안의 레이스
세 달 동안의 레이스가 끝났다. 음력 유월보름인 7월 20일 우안거가 시작된 이래 보름달이 세 번 뜬 오늘까지 구십일을 달려 왔다. 이제 그 경주를 마친다.
걸어서 하늘 끝까지 갈 수 있을까? 어떤 이는 오토바이로, 어떤 이는 차를 이용하여 대륙을 횡단하고자 한다. 몇 달에 걸친 대장정이다. 재가수행자는 이 작은 몸 안에서 달렸다.
매일 아침 행선과 좌선을 삼십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리고 매일 수행기를 작성하는 것 또한 목표로 했다. 목표는 이루어졌다. 오늘 이렇게 회향의 날에 또 하나의 수행기를 작성함으로 인하여 증명된 것이다.
재가자의 우안거는 백권당사무실이 장소가 되었다. 생업이 있는 자는 멀리 가기 힘들다. 선원에 들어가서 안거 나기 힘든 것이다. 이에 사무실을 반으로 나누어 명상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행선대도 만들었다.
요즘 회자 되는 말로 루틴(routine)이라는 말이 있다. 루틴이라는 말은 본래 컴퓨터용어이다. 특정한 작업을 실행하기 위한 일종의 명령인 것이다. 이런 루틴에는 메인루틴도 있고 서브루틴도 있다. 그런데 루틴이라는 말은 이제 생활용어로도 잡았다는 것이다.
루틴은 자신만의 정해진 생활과 습관을 말한다. 정해진 순서대로 하는 것도 해당된다. 부정적으로 본다면 틀에 박힌 일상에 대한 것도 된다. 매일 밥 먹듯이 하는 일도 일상이 된다.
수행이 일상이 되고자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부터 시작된다.
아침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여섯 시가 되면 일어난다. 새벽에 잠이 깨면 논서를 보았다. 머리맡에 있는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논서와 법문집을 말한다.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를 스승으로 삼은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해야 할 일이 있다. 먼저 샤워를 한다.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은 행사가 되었다. 성스러운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데 있어서 일종의 의식을 치루는 행위와 같은 것이다.
아침에 아침식사를 준비한다. 백권당에 가서 먹을 고구마와 계란을 찜기를 이용해서 찐다. 때로 감자와 단호박을 곁들을 때도 있다. 사실상 아침은 계란 한 개와 고구마가 하나가 주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것도 일상에 있어서 루틴이다. 세 달 동안 이렇게 달려 왔다.
동쪽하늘에 붉은 새벽노을이
백권당까지는 걸어 간다. 이른 아침 여섯 시대에 걸어간다. 요즘 같이 해가 점점 짧아 질 때는 어두컴컴하다. 그럼에도 출근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오늘 아침 6시 25분 비산사거리에서 마북연구소로 가는 전세버스에 젊은 사람들이 탑승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재가우안거 마지막날 회향의 날에 동쪽하늘을 보았다. 비산사거리 횡단보도를 건너다 보니 동쪽 하늘이 시뻘겋다. 잔뜩 흐린 날임에도 새벽노을이 형성된 것이다.
새벽노을은 마치 무지개를 보는 것 같다. 붉은 색 띠가 있는 노을이다. 이것을 보자 가슴이 뛰었다. 좀처럼 볼 수 없는 광경이다. 비산사거리에서도 찍었고 안양천을 건널 때도 찍었다.
붉은 새벽노을이다. 그런데 금방 사라져 버렸다. 영원히 그 자리에 있을 줄 알았는데 조금 지나자 희미해져 버린 것이다. 오피스텔 18층 꼭대기층에서 보았을 때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신기루처럼 사라진 것이다.
절구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아침이 되었으니 아침식사를 해야 한다. 준비해 온 찐 계란 하나와 찐고구마 두 쪽을 준비했다. 여기에 꿀물을 갖추었다. 이것이 아침식단이다. 허기를 면할 정도로만 먹는다.
아침식사를 했으니 커피를 마셔야 한다. 하루 가운데 가장 여유로운 시간이다. 백권당표 ‘절구커피’를 마신다. 볶아진 원두를 나무절구에 넣어서 공이로 절구질한 것이다.
절구커피 마신지는 오래 되었다. 절구질을 하는 등 커피를 만드는 데 있어서 노고를 필요로 하지만 카페의 아메리카노보다 더 낫다. 향과 함께 신맛, 단맛, 쓴맛이 고루 있어서 최상의 커피, 절구커피가 된다.
그날그날 다른 몸상태
행선과 좌선은 아홉 시 이전에 끝내야 한다. 고객사 담당들에게 전화가 걸려 올지 모른다. 행선과 좌선을 각각 삼십분씩 하는 것으로 제한 하는 이유가 된다. 그러나 안거가 진행될수록 시간은 점점 늘어난다. 어떤 날은 행선을 한시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좌선을 한시간 하기도 한다.
행선과 좌선은 각각 한시간은 해야 법의 성품을 볼 수 있다. 삼십분은 법의 성품을 보기에는 부족하다. 삼매가 형성되는 것도 어느 정도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날그날 다르다. 어느 날은 쉽게 삼매가 형성되지만 어느 날은 집중이 되지 않아 실패로 끝나기도 한다.
오늘 행선과 좌선은 성공적이었다. 어제와 여러 모로 대조된다. 어제는 어찌된 일인지 집중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의무적으로 삼십분 하는 것에 그쳤다. 그러나 오늘은 웬일인지 집중이 잘 되었다. 안거 마지막이어서 그런 것일까? 붉은 새벽노을을 보아서 그런 것일까?
행선과 좌선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마음가짐에 따라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한다. 그것은 집중으로 나타난다. 몰입이 되어야 새김이 있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몰입을 잘 할 수 있을까?
움직임에 대하여 명색으로 파악하고자
행선을 처음 시작할 때 날 것인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몸과 마음이 분리가 되지 않은 하나의 상태임을 말한다. 이런 상태에서는 자아개념이 있을 수밖에 없다. 집착된 덩어리로 있는 상태와도 같다.
집착된 덩어리 상태를 부수어야 한다. 행선할 때 부수어지고 좌선할 때 부수어진다. 정신과 물질, 또는 물질과 정신을 지속적으로 새기는 것이다. 마치 팔딱팔딱 뛰는 물고기와 같은 몸과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이다.
행선할 때 처음부터 발의 움직임을 새겼다. 발을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루는 여섯 단계 행선을 한 것이다. 발을 뗄 때에는 물질과 정신 두 가지가 있게 되는데 이를 의도적으로 새기고자 한 것이다.
명상을 매일 하다 보면 요령이 생긴다. 일종의 명상을 잘하는 방법 같은 것이다. 어떤 것인가? 움직임에 대하여 명색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누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다.
수행처에서는 대부분 호흡을 관찰하라고 말한다. 명색을 관찰하라고 말한 곳을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그런데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를 보면 명색, 즉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관찰할 것을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위빳사나 수행방론과 담마짝까법문, 아리야와사법문에서 본 것이다. 이에 논서 대로 따라 해보고자 했다.
변화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찰나삼매로
위빠사나 수행처에 가면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보라고 말한다. 이는 마하시 방식이다. 마하시 방식이 아닌 수행처에서는 호흡, 즉 들숨과 날숨을 보라고 말한다. 그런데 호흡 그 자체만 보면 사마타수행이 되어 버린다는 사실이다. 코 끝의 바람을 볼 때 위빠사나가 된다고 말한다.
명상한다고 하는 사람들 대부분 호흡을 관찰한다. 이는 사마타 수행을 하는 것이다. 마음챙김이라 하는 명상법도 오로지 들숨과 날숨만을 관찰한다면 이는 위빠사나가 아니라 사마타라고 말할 수 있다. 사마타는 개념을 대상으로 하는 명상수행방법이다.
위빠사나는 실재를 대상으로 한다. 이는 개념을 대상으로 하는 사마타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변화하는 것을 대상으로 하여 관찰하는 것이다. 관찰한다는 말을 새긴다는 말로 바꿀 수도 있다. 그런데 변화하는 대상, 즉 움직이는 대상을 새겼을 때 삼매가 형성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른바 찰나삼매(khaṇikasamādhi)를 말한다.
찰나삼매를 순간삼매라고도 한다. 변화하는 대상에 대하여 순간적으로 새기는 것을 말한다. 처음에는 이런 것이 있는 줄도 몰랐다. 당연히 개념도 몰랐다. 그런데 자주 해 보니 어느 정도 어렴풋이 감이 잡힌다. 오늘 아침 행선에서 그랬다.
저절로 걸어가는 것처럼
오늘 아침 행선은 좀 특별했다. 평소와 달리 집중이 잘 되는 것이었다. 이를 ‘몰입’이라고 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행선을 시작한지 오분도 되지 않아서 몰입상태가 된 것이다.
몰입상태가 되면 잘 보인다. 발을 떼서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여섯 단계의 과정이 분명하게 보이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새김이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위빠사나 수행은 분리해서 관찰하는 수행이다. 이 말의 의미를 처음에는 잘 몰랐다. 그런데 ‘명색분리’라는 말을 보면 분명해진다는 것이다. 변화하는 대상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 또는 물질과 정신으로 따로따로 분리해서 새기는 것이다.
행선이 잘 될 때는 재미가 있다. 걷는 재미가 있는 것이다. 이는 새김이 있기 대문이다. 새김이 없다면 무의미한 일을 반복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새김이 있을 때는 처음과 끝이 분명하게 보여서 마치 저절로 걸어가는 것 같이 된다.
자주 하다 보면 방법을 터득하게 돼
무엇이든지 자주 하다 보면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오늘 행선도 그랬다. 처음 발을 옮길 때는 시동을 거는 것과 같다. 이때 여섯 단계에 대하여 의도적으로라도 명색을 새겨야 한다. 어떻게 새기는가?
발을 떼는 것은 하나의 움직임이다. 이는 의도가 있어서 움직이는 것이다. 이때 의도는 정신이고 떼는 것은 물질이다. 움직임을 물질로 보는 것이다. 어떻게 움직임이 물질인가? 이는 풍대를 물질로 보기 때문에 움직임도 물질로 보는 것이다. 귀로 소리를 들을 때 소리도 물질로 보는 것과 똑같다. 그래서 의도는 원인이 되고 발을 드는 것은 결과가 된다. 의도에 따라 조건발생하는 것이다.
발을 들었을 때 이는 물질과 정신으로 구분된다. 발을 드는 것은 움직임인데 이를 물질로 보고, 발을 들었을 때 앎이 있게 되는데 이를 정신으로 본다. 이때 물질과 정신을 따로따로 새긴다. 발을 들을 때 드는 움직임을 물질이라 새기고, 발을 들 때 앎이 있게 되는데 정신이라고 새기는 것이다. 거의 동시에 물질과 정신을 새기는 것과 같다.
내가 고귀한 자가 되는 듯한
오늘 아침 행선할 때 정신과 물질, 물질과 정신을 새기고자 노력했다. 거의 동시에 새기는 것과 다름 없기 때문에 고도의 집중이 필요했다. 이럴 때 다른 것은 들어 오지 않는다. 창 밖에 차 소리도 인식하지 못한다.
새김은 집중이 있는 상태에서 선명해진다. 집중이 있어야 새김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일단 집중된 상태를 만들어야 한다. 몰입이라면 더 좋다. 그런데 움직이는 대상에 대하여 명색으로 구분하여 따로따로 새기고자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몰입 되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어느 순간 마음이 고요한 상태가 되었다. 마음이 고요하니 발의 움직임이 더욱 더 선명하게 보였다. 움직임의 처음과 끝이 분명하게 보인 것이다.
한번 집중이 되면, 한번 몰입이 되면 꽤 오래 가는 것 같다. 잘 깨지지도 않는 것 같다. 이번에는 눈을 뜨고 행선해 보았다. 눈 뜨고 행선해도 움직임의 처음과 끝이 분명했다. 비틀거리지 않고 똑바로 걸을 수 있었다. 마치 저절로 걷는 것 같았다. 명색을 새기는 것이 자동으로 되는 것 같았다. 새김이 착착 달라 붙는 것 같았다. 이렇게 걷자 마치 내가 고귀한 자가 되는 듯해 보였다.
언어적 행위가 개입되었을 때
오늘 행선은 30분 했다. 5분이 지났을 때 몰입이 되어서 새김이 분명해졌다. 20분이 지났을 때 눈을 뜨고 했다. 발을 떼고, 올리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전과정이 선명했다. 이는 움직임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로 따로따로 새기고 있다는 말과 같다. 움직임이라는 물질을 새기고, 움직임을 아는 앎이라는 정신을 새기는 것이다.
오늘 행선에서는 집중이 잘 되었다. 명색으로 구분되어서 새김이 분명할 때 혹시 이것이 카니까사마디(찰나삼매)가 아닌지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노트에 기록하는 과정에서 집중과 새김은 점차 약화되었다. 언어적 행위가 집중과 새김을 방해한 것이다.
지속적으로 명색을 새기면 삼매에
행선을 마치고 금강좌에 앉았다. 행선에서 형성된 집중이 남아 있어서 고스란히 좌선으로 가져가고자 했다. 그럼에도 처음 자리에 앉으면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이럴 때 배의 부품과 꺼짐에 대하여 미얀마식으로 “부푼다, 꺼진다”라며 동사형 명칭을 붙여 본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길 때도 명색을 새기고자 했다. 배가 부풀 때 명색을 어떻게 새기는가? 배가 부풀 때 이는 물질에 대한 것이다. 배가 부풀 때 아는 마음이 있는데 이는 정신에 대한 것에다. 배가 부풀 때 부품이라는 물질을 새기고, 배가 부풀 때 앎이 있는데 앎이라는 정신을 새기는 것이다.
명색을 새기는 것은 거의 동시적이다. 그래서 고도의 집중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런 과정 자체가 몰입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부품과 꺼짐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명색을 새기면 삼매에 이르게 된다.
명색으로 구분해서 새기는 방법에 대하여
스승 없이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있다. 오로지 마하시 사야도 논서를 보고서 응용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런 방법이 맞는지 틀리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끊임 없이 명색을 새기라고 하는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명색을 새기라고 말한다. 이는 몸관찰에 대한 것이다.
마하시 방식의 특징은 몸관찰에 대한 것이다.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도 몸관찰이고 행선하는 것도 몸관찰에 대한 것이다. 더 나아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도 몸관찰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명색으로 구분해서 새기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지금까지 설명한 대로 새기면서 새김, 삼매, 지혜가 예리해지고 힘이 구족되면 ‘배의 부품’이라고 하는 물질과 ‘부푼다’하며 새기는 마음, ‘배 의 꺼짐’이라고 하는 물질과 ‘꺼진다’하며 새기는 마음, 앉아 있는 물질과 그것을 새기는 마음, 굽히는 물질과 새기는 마음, 펴는 물질과 새기는 마음, (발을) 드는 물질과 새기는 마음, 나아가는 물질과 새기는 마음, 내려놓는 물질과 새기는 마음, 이러한 등으로 대상과 새기는 마음이 계속해서 쌍을 이루면서 마치 붙어 있는 것처럼 짝을 이루고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새김이 특히 좋을 때는 ‘부푸는 것이 따로 + 새기는 것 이 따로, 꺼지는 것이 따로 + 새기는 것이 따로’, 이러한 등으로 물질과 정신을 나누어 알 수 있을 것이다. 새겨 아는 것이 부품, 꺼짐 등의 대상 쪽으로 계속해서 달려 나가면서 달라붙어 버리듯 드러날 것이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78쪽)
명색은 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질이 있는 곳에 앎도 있다. 팔을 펼 때, 펴는 것은 물질이고, 펴는 것을 아는 앎은 정신이다. 팔을 펼 때 물질과 정신을 거의 동시에 새기는 것이다. 그런데 집중이 잘되어서 몰입 상태가 되면 저절로 새겨진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대상 쪽으로 계속해서 달려 나가면서 달라붙어 버리듯 드러날 것이다.”라고 했다.
일단 시동이 걸리면
오늘 행선은 한시간 했다. 삼십분 알람설정을 해놓았지만 무시하고 계속 달렸다. 행선할 때와 달리 노트에 기록하는 행위가 없었기 때문에 새김이 계속 유지 될 수 있었다. 이는 삼매가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는 말과 같다.
처음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볼 때는 낯설다. 또는 거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시동이 걸리면 그 다음부터는 달라진다. 자동으로 가는 것 같다. 그래서 배의 부품과 꺼짐도 저절로 새겨지는 것 같다. 특히 집중이 잘 되어서 새김이 좋을 때는 부품과 꺼짐을 전과정이 선명하게 새길 수 있다.
걸림 있는 듯한 멈춤(정지)을 보았는데
오늘 좌선하면서 하나 새롭게 본 것이 있다. 그것은 배의 부품과 꺼짐 사이에 있는 멈춤을 본 것이다. 집중이 잘 되지 않고 새김이 분명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부품과 꺼짐 사이에 분명히 멈춤이 있었다. 길지는 않다. 약 0.5초 정지한 듯한 기간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품, 정지, 꺼짐, 정지, 부품 순으로 진행 되었다.
정지를 보았을 때 하나의 느낌을 받은 것이 있다. 그것은 정지상태가 되었을 때 탁하고 걸린 것처럼 느껴졌다는 것이다. 스무스하게 정지되는 것이 아니라 걸림이 있는 것처럼, 마치 문턱치를 넘는 것처럼 걸림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것은 전에 보지 못했다. 오늘 처음 본 것이다.
움직임이라는 물질적 과정과 앎이라는 정신적 과정만 있는 것처럼
계속 달리고 싶었다. 걸어서 하늘끝까지 가는 것처럼, 한번 시동이 걸리자 끝까지 가고 싶었다. 몸은 가벼웠다. 닿는 느낌이 있기는 했지만 명색만 있는 듯했다. 명색의 끝은 어디일까?
이번에 새롭게 안 사실이 하나 있다. 행선과 좌선에서 몰입 상태가 되었을 때 분명한 새김이 있게 되는데 그것은 정신과 물질이라는 것이다. 움직임이라는 물질적 과정과 앎이라는 정신적 과정만 있는 것 같았다.
어는 것 하나 명색과정 아닌 것이 없다. 명상 상태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어떤 이는 배후에 관찰자가 있다고 하는데 그런 것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데 일상에서도 명색과정만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 명색과정 아닌 것이 없다. 눈으로 보는 것도 명색과정이고 귀로 듣는 것도 명색과정이다. 손을 뻗는 것도 명색과정이고 발을 움직이는 것도 명색과정이다. 그런데 명색과정은 매우 빠르게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순식간에 일어 났다고 사라진다. 그리고 명색을 조건으로해서 또 다시 명색과정이 진행된다.
궁극적으로 명색의 끊어짐을 보아야
흔히 수행한다고 할 때 호흡을 보라고 한다. 마하시 전통에서는 배를 보라고 한다. 그런데 아직까지 명색을 보라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 행선할 때 발의 움직임에서 명색을 보라거나 배의 부품과 꺼짐에서 명색을 보라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 그런데 분명히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에서는 수도 없이 명색을 새기라고 했다.
명색을 새겨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명색의 끊어짐을 보기 위함이다. 명색을 보아야 명색이 끊어지는 것이다. 들숨날숨이나 복부의 움직임만 보아서는 부족하다. 움직이는 대상, 변화하는 대상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 또는 물질과 정신으로 구분해서 따로따로 관찰해야 궁극적으로 명색이 끊어진다.
명색을 새겨야 이 세계의 끝에
이번에 두 번째 안거를 치루었다. 작년에 처음 우안거 했을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분명히 향상된 것을 느낀다. 작년과 올해는 다른 것이다. 명색을 알게 된 것이 크다. 그리고 새김에 대하여 자세히 알게 된 것이 차이가 있다.
새김(sati)은 명색만을 관찰하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는 것도 새김이다. 또한 수행과정에서 체험한 것을 기억하고 사유하는 것도 새김이다. 모두 기억과 관련 있는 것이다.
어떤 이는 ‘마음챙김’을 말한다. 그래서 ‘마음챙김명상한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알아차림’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원어대로 ‘싸띠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명색을 새김한다’라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
어느 테라와다 스님은 싸띠를 강조한다. 싸띠 이야기로 한시간을 말한다. 그러나 갈증만 날 뿐이다. 싸띠가 좋은 것이라고 말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말해 주지 않는다. 마치 사과는 맛을 보아야 알 수 있다는 식으로 싸띠하라고만 말한다. 그래서 어떻게 하란 말인가?
명색에 대해서 말한 사람이 있었다. 이제까지 들어 본 법문 가운데 빤냐와로 스님만이 “이번 안거에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관찰하는 안거가 되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작년 우안거 입재법회 때 말한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한다고 하여 누구나 싸띠를 말한다. 그러나 이것 이상은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마음챙김, 알아차림, 싸띠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싸띠 하는 것은 기본이다. 더 나아가 명색을 싸띠해야 하는 것이다. 변화하는 대상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 또는 물질과 정신을 각각 따로따로 새겨야 하는 것이다. 아직까지 이렇게 말하는 위빠사나 스승이나 명상지도자를 보지 못했다.
왜 명색을 새겨야 하는가? 명색을 새기다 보면 명색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도와 과에 이를 수 있는 길이다. 그러나 싸띠만 하면, 마음챙김만 하면, 알아차림만 하면 거기에서 그친다. 명색을 새겨야 이 세계의 끝에 이를 수 있다.
이제 방법을 알았으니 연습하는 것만
오늘 행선과 좌선 할 때 저절로 되는 것 같았다. 이는 처음부터 변화하는 대상에 대하여 명색을 새기고자 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았으나 집중이 될수록 처음과 끝이 분명하게 보였다. 부품과 꺼짐을 볼 때는 멈춤도 볼 수 있었다. 마치 탁탁 걸리듯이 분명한 멈춤이 있었다. 이런 체험은 처음이다.
오늘 행선과 좌선을 할 때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는 명상 전과 명상 후가 분명하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행선을 시작한지 20분 지났을 때 스스로가 고귀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좌선을 한지 30분 지났을 때는 스스로가 거룩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이 모두가 변화하는 대상, 움직이는 대상에 대하여 명색으로 구분해서 새기고자 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번 안거 동안 체험 한 것이 몇 가지 있다. 어쩌면 명상을 잘하기 위한 요령인지 모른다. 방법에 대한 것이기도 한다. 명상과정에서 체험한 것은 모두 기록해 두었다. 다음에 써 먹기 위한 것이다. 한번 길을 알면 그 길로 가는 것과 같다. 이제 방법을 알았으니 연습하는 것만 남았다.
그대는 지금 명색을 새기고 있는가?
담마와나선원에 가면 법당에 액자가 하나 있다. 액자에는 “그대는 지금 알아차리고 있는가?”라는 문구가 써 있다. 참으로 새겨야 할 아름다운 문구라고 보았다. 그런데 오늘 명색을 따로따로 구분하여 새기다 보니 이것 가지고는 부족해 보였다. 내가 액자를 만든다면 “그대는 지금 명색을 새기고 있는가?”라고 바꾸어 만들고자 한다.
오늘로서 재가우안거 삼개월이 끝났다. 안거가 끝났다고 해서 만행을 한다거나 쉬는 것은 아니다. 내일도 모래도 이 자리에서 명색을 새길 것이다. 걸어서 하늘 끝까지 이르지는 못하지만, 이 작은 몸 안에서 세상의 끝을 보기 위해서 명색을 새기고자 한다.
2024-10-1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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