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행선 중에 기쁨, 행복, 평온이

담마다사 이병욱 2024. 10. 6. 15:21

행선 중에 기쁨, 행복, 평온이

 

 

지금 이순간 기분을 계속 유지하고 싶다. 오랜만에 맛보는 법의 맛이다. 오늘 행선을 무려 1시간 20분 했다. 일상에서도 이런 기분 유지할 수 있을까?

 

재가우안거 79일째이다. 일요일인 오늘은 늦게 일어났다. 평소보다 사오십분 늦은 것이다. 당연히 행선도 사오십분이 늦은 839분에 시작되었다.

 

그날그날 날씨는 다르다. 그날그날 몸상태도 다르다. 오늘은 하늘에 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씨이다. 그럼에도 몸상태는 어제보다는 낫다. 오늘 행선과 명상은 잘 될 수 있을까?

 

승리하는 나날이 되고자

 

주고객사 담당이 퇴사했다. 그 사람은 건승하십시오.”라는 문자를 남겼다. 이 말에 대하여 늘 승리하는 날이 되십시오.”라는 말로 받아 들였다.

 

건승에 대하여 검색해 보았다. 국어사전에는 탈 없이 건강함의 뜻이다. 승리하라는 말과는 다른 것이다. 나무위키의 풀이에 따르면 건승은 건강이 승리하라라는 뜻인데 그냥 건강을 기원한다는 인사말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건승이란은 말을 승리하는 나날이 되기를 바라는 말로 받아 들였다.

 

승리하는 나날이 되고자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부처님 가르침과 함께 살아야 한다.

 

테라와다불교 전통에서 오랜 옛날부터 내려 오는 게송이 하나 있다. 수호경 가운데 하나인 자야망갈라가타(Jayamagala Gāthā)’를 말한다. 한역하면 길상승리게(吉祥勝利偈)’이다. 우리말로는 승리와 행운의 노래라고 할 것이다.

 

자야망갈라가타는 부처님의 여덟 가지 승리에 대한 게송이다. 정각을 이룰 때 악마와 싸워서 이긴 이야기 등 여덟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자야망갈라가타 각 게송에는 공통적으로 붙는 후렴구가 있다. 그것은  떼자사 바와뚜 메 자야 망갈라니(Tatejasā bhavatu me jayamagalāni)”라는 말이다. 이 말은 이 위대한 힘으로 승리의 행운 제게 임하길 바라옵니다.”라고 번역된다. 부처님의 여덟 가지 승리가 나에게도 임해서 승리하는 나날이 되길 바라는 수호주문이다.

 

항상 부처님 가르침과 함께 하는 나날이다. 요즘은 가르침을 실천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른바 재가우안거이다. 재가자가 생활속에서 생업에 종사하면서 행선과 좌선을 하는 등 매일 수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수행을 오래 해 오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코로나가 막 시작되기 시작했을 때인 20201월이다. 그때 사무실 반을 칸막이로 나누어서 명상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올해 두 번째 재가우안거를 나고 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다. 필요성이 있어서 스스로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좀처럼 수행이 진척되지 않는다. 이끌어 주는 스승이 없는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믿는 구석이 있다. 그것은 경전과 논서이다. 특히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와 법문집을 등불로 하여 매일매일 임하고 있다. 오늘도 승리하는 하루가 되고자 한다.

 

수행을 할 때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수행을 할 때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아침에는 일체 뉴스를 보지 않는다. 뉴스로 인하여 마음이 뒤집히면 그날은 분노로 보낼 수 있다.

 

아침에는 많이 먹지 않는다. 찐계란 하나, 찐고구마와 찐감자 약간이 주식이다. 허기를 때울 정도로만 먹는다. 여기에 커피를 마셔야 한다. 원두를 절구에 넣고 절구질해서 만든 절구커피이다.

 

노트를 준비한다. 떠 오르는 생각을 쓰기 위한 것이다. 흘러가는 생각을 잡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연필을 이용한다. 연필깍기를 이용해서 깎은 것이다. 모두 다이소에서 저렴하게 구입했다.

 

떠 오르는 생각, 흘러가는 생각은 스마트폰 메모앱에도 기록한다. 주로 걸어 갈때 키워드만이라도 써 넣는다. 글 쓸 때 필요한 것이다. 백권당에 도착해서는 노트를 활용한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 수행하기만 하면 된다.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백권당 불을 끄는 것이다. 자연채광에 의지하고자 한다. 오늘같이 흐린 날은 약간 침침하다. 창이 북동방향인 것이 큰 이유이다.

 

오늘 행선은 성공할 것 같은 예감

 

행선을 먼저 한다. 행선대에서 하는 것이다. 4미터 정도되는 길이의 행선대이다. 30센티 간격으로 검은 테이프를 붙여 놓았다. 행선할 때 보폭의 길이이다.

 

백권당 행선대에서 수도 없이 행선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똑같이 행선대를 왕복한다. 이때 눈을 감는다. 눈을 감고 행선하면 집중이 더 잘된다.

 

오늘은 다른 날과 달랐다. 왠일인지 집중이 잘 되는 것이었다. 발을 떼고, 올리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여섯 단계 행선을 시작하자 마자 삼매가 형성되는 것이었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런 날은 드문 것이다.

 

 

행선은 늘 잘되는 것은 아니다. 행선이 잘 될 때도 있고 잘 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날그날 컨디션에 따라 다르다. 오늘의 경우 흐린날이어서 약간 침침한 것도 좋은 상태가 된다. 몸은 별 탈이 없다.

 

흔히 이런 말을 듣는다. 똑 같은 때가 한번도 없다는 것이다. 명상을 할 때 한번도 똑 같은 상태가 아님을 말한다. 이는 명상의 단계가 모드 다름을 말한다. 얕은 때도 있고 깊은 때도 있는 것이다.

 

행선을 할 때 한번도 똑 같은 때가 없다. 그날그날 다르다. 그러나 한번 삼매가 형성되면 비슷하다. 오늘이 그랬다.

 

발을 내딛자 마자 느낌이 좋았다. 오늘 행선은 성공할 것 같았다. 삼매의 힘이 좋으면 새김의 힘도 좋기 마련이다. 행선하는 순간부터 다른 세상이 되었다. 다른 몸 상태가 되고 다른 마음 상태가 된 것이다.

 

 

삼매의 힘과 새김의 힘이 좋으면

 

집중이 잘 되면 근심걱정이 일어나지 않는다. 행선할 때 새김이 좋으면 부정적인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럴 때 대념처경에 있는 슬픔과 비탄을 뛰어넘게 하고, 고통과 근심을 소멸케 한다.”(D22.2)라는 말이 떠 오른다.

 

수행을 하면 근심, 걱정, 슬픔에서 해방된다. 행선대에서 행선을 하고 방석 위에서 좌선을 할 때 피난처가 된다. 수행처로 도망가는 것이다.

 

삼매의 힘과 새김의 힘이 좋으면 분명하게 보인다. 시작과 끝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행선의 경우 의도도 보인다.

 

의도를 보기가 쉽지 않다. 발을 움직이려 할 때 의도가 있어야 움직이는데 좀처럼 보기 힘들다. 그러나 삼매가 형성되어서 새김의 힘이 강할 때 보인다.

 

의도는 마음에 대한 것이다. 이는 오온에서 형성에 해당된다. 발을 움직이려고 하는 의도를 낼 때 발이 움직인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가 움직인다고 말한다.

 

내가 움직이는 것은 없다. 왜 그런가? 움직이게 하는 나는 없기 때문이다. 집착된 무더기를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관찰하면 나 같은 개념은 있을 수 없다. 오로지 정신과 물질의 작용만 있을 뿐이다.

 

나라는 관념을 부수어야

 

위빠사나수행은 관찰수행이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다. 자신을 제삼자가 보듯이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나라는 개념을 부수어야 한다.

 

나라는 개념이 있는 한 절대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이룰 수 없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해탈과 열반을 이룰 수도 없다. 먼저 나라는 관념을 부수어야 한다.

 

위빠사나수행은 나라는 개념을 부수는 수행인지 모른다. 위빠사나 16단계 지혜 가운데 1단계가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어진 것, 무더기, 덩어리를 부수는 것이다. 정신과 물질로 분리해서 관찰하면 부수어진다.

 

한국불교에도 수행이 있다. 선종계통의 불교이기 때문에 화두를 이용하여 수행한다. 화두를 의심하는 수행이다. 이런 수행도 언어적 개념을 부수는 수행에 해당된다. 마치 독을 독으로써 제독하듯이, 의심으로 의심을 부수고자 하는 것이다. 의심을 해서 언어적 개념을 타파하는 것이다.

 

오직 명색만이 있을 뿐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두 번째로 읽고 있다. 보고 또 보고 있다. 아무리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 아직 체험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제 이런 내용을 읽었다.

 

 

앉음, , 굽힘, , , 들림 등의 여러 동작 하나하나를 정신만으로도 성취하게 할 수 없다. 물질만으로도 성취하게 할 수 없다. 물질과 정신, 이 두 가지 모두가 결합해야만 성취 하게 할 수 있다. 이렇게 성취하게 할 수 있는 이 물질과 정신, 두 가지를 집착하여나는 앉는다. 나는 선다. 나는 간다. 나는 굽힌다. 나는 편다. 나는 본다. 나는 듣는다라는 등으로 부르고 표현하고 있다. 사실대로 말 하자면 앉음, , 감 등을 행할 수 있는’, ‘중생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단지 정신과 물질, 이 두 가지만 존재한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 132)

 

 

집착된 무더기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관찰하면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오로지 정신과 물질, 이 두 가지만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나 법문집은 철저하게 빠알리삼장에 근거한다. 또한 청정도론과 같은 논서에 기반한다. 위 내용은 청정도론에도 실려 있다. 이는 이와 같이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있을 때뭇삶이나개인이라는 명칭만이 있고, 하나하나의 사실로 관찰할 때는 궁극적 의미로는내가 있다.’라든가나이다.’라는 집착의 토대가 되는 뭇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는 오직 명색만이 있을 뿐이다.”(Vism.18.28)라는 구절로 알 수 있다.

 

위빠사나수행을 처음 시작 했을 때 명색의 의미를 잘 몰랐다. 단지 호흡에만 집중해서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얻으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경전적 지식이 쌓이고 논서를 접하게 됨에 따라 16단계 지혜가 있음을 알았다. 가장 첫번째 단계는 명색을 아는 것이었다.

 

명색을 어떻게 알아야 할까? 그것은 분리해서 아는 수밖에 없다. 덩어리로는 보이지 않는다. 잘게 부수어서 아는 것이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관찰하는 것이다. 위빠사나수행을 하는 이유에 해당된다.

 

근심, 걱정, 슬픔에서 도망가기

 

위빠사나수행은 나라는 존재를 해체하는 작업에 대한 것이기도 한다. 몸과 마음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며 강하게 집착되어 있기 때문에 먼저 이런 개념을 부수어야 한다. 행선을 해서 물질적인 것을 따로 새기고, 정신적은 것을 따로 새기면 개념은 부수어진다. 나가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내가 있으면 괴롭다. 이 몸과 마음을 내것이라고 여겼을 때 모두 내가 한 것이 된다. 근심, 걱정, 슬픔이 떠나지 않는 날이 없다. 어쩌면 위빠사나수행은 근심, 걱정, 슬픔에서 도망가기 위한 수행인지 모른다.

 

행선을 하자 몸과 마음이 편안해졌다. 삼매가 형성되어서 새김의 힘도 좋아 졌다. 발의 움직임 시작과 끝도 분명히 보였다. 발을 옮기려는 의도도 보였다. 여기에 근심, 걱정, 슬픔은 끼여들 틈은 없다.

 

새김(sati)의 세 가지 의미

 

행선 중에 필기를 한다. 노트와 연필을 가까이 두고서 떠오른 생각을 써 놓는 것이다. 이렇게 해도 지장 받지 않는다. 좌선에서는 어림 없지만 행선에서는 가능한 것이다.

 

행선은 움직이는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떠오른 생각을 필기 했을 때 이것 역시 움직이는 것이다. 이렇게 필기를 해도 삼매와 새김이 깨지지 않는다.

 

행선도중에 필기를 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띠를 마음챙김이라고 하는데 이런 용어가 타당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다. 왜 그런가? 사띠의 원래 뜻은 기억이기 때문이다.

 

사띠에 대하여 새김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이기도 하다. 또한 한국마하시선원에서도 새김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런 새김은 기억과 관찰 두 가지 쓰임새를 모두 만족하는 용어이다.

 

요즘 명상 용어 가운데 마음챙김이라는 말이 대유행이다. 스트레스완화 기법 가운데 하나인 MBSR 강사도 마음챙김이라고 말한다. 일반 명상 강사 역시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의 관점에서 본다면 다 담지 못하고 있다.

 

초기경전, 즉 니까야를 보면 사띠라는 말은 수도 없이 나온다.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을 한마디로 말하라고 한다면 사띠가 될 것이다. 그런데 사띠는 수행용어라는 것이다. 이는 일상에서도 사띠라는 말을 사용하기 때문에 일상도 수행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번에 사띠에 대하여 다시 한번 더 알게 되었다. 이는 사띠의 세 가지 의미를 말한다. 첫번째는 명색을 새기는 것이고, 두번째는 가르침을 새기는 것이고, 세번째는 경험을 새기는 것이다. 이렇게 세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는 것은 나의 방식이다.

 

명색을 새기는 것은 수행에 대한 것이다.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도 적용이 가능하다. 그런데 새겨야 할 것은 명색만이 아니다. 부처님 가르침도 새겨야 하는 것이다.

 

가르침을 이해하고 기억하고 새기는 것도 수행이다. 그러나 여기에 마음챙김이라는 말은 부적절하다. 그래서 가르침을 마음챙김한다라는 말은 어색하다.

 

경험도 새겨야 한다. 수행하다 체험을 하게 되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또한 그 경지에 가보고자 한다. 그래서 경험도 새겨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험을 마음챙김한다라는 말은 매우 어색하다.

 

좋은 생각이 나면 메모해 둔다. 오늘 아침 행선하다가 좋은 생각이 나서 메모해 두었다. 그것은 새김의 세 가지 종류에 대한 것이다. 마음챙김이라는 말에는 적용할 수 없는 것이다. 새김이라는 것은 1)명색을 새기는 것, 2)가르침을 새기는 것, 3)경험을 새기는 것, 이렇게 세 가지 기능이 있음을 말한다.

 

수행중에 체험을 하면 오래 간다. 이런 것도 새기는 것이다. 다음에도 그 상태에 도달하고자 한다. 또한 방법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다음에도 이 방법을 적용해 보는 것이다. 오늘 행선도 그랬다.

 

스케이트 타듯이 행선을

 

행선할 때는 눈을 감고 한다. 그래야 삼매가 형성되는 것 같다. 그러나 단점도 있다. 자꾸 비틀거린다는 것이다. 폭이 75센티에 불과한 벽과 칸막이에 자꾸 어깨가 부딪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똑바로 걸을 수 있을까? 이전에 발견한 것이 있다. 그것은 스케이트 타듯이 행선을 하는 것이다. 한쪽 발에 체중을 실어 지탱할 때 다른 쪽 발을 들어서 이동하는 것을 말한다. 마치 스케이트 타듯이 왼쪽 오른쪽 번갈아 몸을 기울이며 행선하는 것이다.

 

홀로 수행하면서 이런 방법 저런 방법을 시도한다. 방법이 좋으면 다음에도 적용한다. 행선할 때 마치 스케이트 타듯이 몸을 기울이는 방법도 좋은 예이다. 이렇게 한쪽 발에 몸을 기울여 체중을 지탱하게 했을 때 안정적이다.

 

좋았던 기억은 기억에 오래

 

행선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본다.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연꽃이 피는 것이다. 이는 빤냐완따 스님이 글에서 쓴 것이다. 스님이걷는 수행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라는 소책자에서 말한 것이다.

 

행선을 제대로 하면 미끄러져 가는 것 같다. 바닥을 떠서 가는 것 같다. 더 나아가 구름 위를 걷는 것 같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것은 개념을 배제 했기 때문이다. 나라는 관념을 없앤 것이다. 그래서 내가 간다가 아니라 명색이 간다가 될 것이다.

 

행선할 때 재미를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은 발을 밀 때이다. 발을 쓰윽 밀 때 날아가는 것 같다. 비행기 타는 것 같다. 공중에서 미끄러져 가는 스무스함이란 느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지수화풍 사대가운데 풍대에 대한 것이다.

 

좋았던 기억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행선이나 참선에서 체험 했던 것을 떠올리면 그 상태로 되고 싶어 진다. 이런 것도 사띠라고 말할 수 있다. 경험했던 것을 기억하는 것도 새김, 즉 사띠인 것이다.

 

쏘아져 버려진 화살이 되지 않고자

 

노인이 되면 과거에 사는 것 같다. 젊었던 시절, 황금시절, 리즈시절을 떠올리며 회상하는 것이다. 수행경험을 떠 올린다면 모를까 마음이 늘 과거에 가 있다면 현실은 좋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있다.

 

 

젊어서 청정한 삶을 살지 않고

재산도 모으지 못했으니,

쏘아져 버려진 화살처럼,

누워서 옛날을 애도한다.”(Dhp.156)

 

 

나이가 들어 병이 들면 누워서 지내게 된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못한다. 기저귀 차고 있을지 모른다. 이런 때 과거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황금시절, 리즈시절이다. 그러나 쏘아져 버려진 화살이다.

 

화살은 쏘면 끝난다. 저멀리 숲으로 날아간 화살은 찾지 않는다. 재활용하지 않는 것이다. 죽을 날만을 기다리며 누워 있는 자의 신세가 이렇다. 이럴 때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고, 놀고 한 것에 대하여 우리는 이와 같이 먹었고, 이와 같이 마셨다.’라고 통곡하고 애통해하고 회상하고 후회하며 누워 있게 된다.”(DhpA.III132-133)라고 했다.

 

쏘아져 버려진 화살이 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좀더 건강할 때 수행해야 한다. 한살이라도 젊을 때 수행해야 한다. 수행에서의 기억할만한 체험을 새겨야 한다.

 

자신과 타인을 위해서 기록을

 

행선을 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또한 좋은 생각이 나면 노트에 기록해 둔다. 삼매와 새김은 깨지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는 번뇌와 망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유하고 숙고한 것도 일종의 새김(사띠)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도 새김인 것이다.

 

 

행선과 좌선을 하고 나면 기록을 한다. 이른바 수행기를 작성하는 것이다. 한시간 수행하면 두세 시간 쓰는 것은 보통이다. 남들은 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왜 기록에 집착할까?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 사람은 수행을 했다고 말하는데 정말 했는지 알 수 없다. 그 사람은 체험을 했다고 하는데 말만 믿을 수 없다. 이럴 때 기록을 남겨 두었다면 신뢰성이 있을 것이다.

 

재가우안거를 하면서 매일 기록을 남긴다. 글을 써서 블로그와 페이스북에도 올려 놓는다. 이에 어떤 이는 글에서 배운다고 말한다. 자신도 따라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기록하는 것은 자신과 타인을 위해서도 좋은 것이다.

 

눈 뜨고 행선했더니

 

행선을 오래 하지 않는다. 삼십분 이내로 끝낸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평소와 달리 삼매가 빠르게 형성된 것이다. 그 결과 모든 과정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런 상태라면 좌선도 크게 기대된다. 행선에서 형성된 삼매를 그대로 좌선으로 가져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좌선은 하지 않았다. 행선이 너무 잘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좌선을 들어가면 거저 먹기나 다름 없다. 앉는 순간부터 고요가 찾아 올 것이기 때문이다. 황홀한 상태에서 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좌선은 그만 두었다. 오늘은 행선만 하기로 했다.

 

행선을 한시간 하는 것으로 목표로 했다. 본래 마하시 전통에서는 행선은 한시간이다. 한시간 좌선하면 한시간 행선하는 식이다. 이렇게 시간마다 번갈아 가며 한다. 그런데 오늘 행선에서 삼매가 형성되고 새김이 분명하기 때문에 한시간 아니라 두 시간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행선을 한시간정도 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눈 뜨고 행선하면 어떨까?”에 대한 것이다. 삼매를 형성하기 위해서 눈을 감고 행선하는데 오늘 같은 날은 너무 새김이 좋아서 눈 뜨고도 가능할 것 같았다.

 

눈을 뜨고 행선했다. 우려와는 달리 새김은 그대로 유지 되었다. 마음도 산란되지 않았다. 한발 한발 딛을 때 비틀거리지 않았다. 눈을 감고 하면 비틀 거리기 쉬워서 실눈을 뜨며 스케이트 타듯이 행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행선 중에 기쁨, 행복, 평온이

 

행선은 저절로 되는 것 같았다. 눈을 떠도 삼매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런 삼매는 선정삼매와는 다른 것이다. 일종의 근접삼매이다. 움직이는 대상으로 하는 삼매는 찰나삼매에 해당된다.

 

행선할 때 기쁨과 행복과 평온이 있었다. 이 세 가지는 선정삼매 요소에 해당된다. 초선정 상태인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따르면 찰나삼매는 그 효과 근접삼매와도 같고 또한 초선정 상태와도 같은 것이라고 했다. 이는 행선 중에 기쁨, 행복, 평온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행선이 저절로 되면 자신을 잊어 버린다. 무아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명색만 있게 되는 것이다. 변화하는 물질과 아는 마음만 있는 상태가 된다.

 

빠알리어 대역(對譯)을 보니

 

행선이나 좌선을 하면 경전적 지식이 떠오른다. 이는 망상과는 다른 것이다. 담마, 즉 가르침이나 진리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이런 것도 새김(사띠)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 새벽에 읽은 것 중에 명색에 대한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Nāmarūpāna yāthāvadassananti “ida nāma, ettaka nāma, na ito bhiyyo. Ida rūpa, ettaka rūpa, na ito bhiyyo'ti ca tesa lakkhaņasallakkhaņamukhena dhammattabhāvadassana, Attadişodhanato diṭṭhi visuddhīti veditabba, (Pm.ii.367)

(
빠알리어 대역)

“N
āmarūpāna yāthāva dassananti ‘정신과 물질을 사실대로 바른 성품에 따라서 봄이란, ‘ida 새겨 아는 이 성품이 nāma 대상 쪽으로 기울어져 항하는, 대상을 알 수 있는 정신법이다. ettaka 새겨 아는 이 정도가 nāma 대상을 아는 정신법이다. (새겨 알 수 있는 그 모든 정신들을 대상으로이 정도가 정신일 뿐이다. 나가 아니다라고 아는 것을 말한다) ito 새겨 아는 이 정신법보다 bhiyyo 더 넘어선 나라든가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na 없다.

 

또한 ((“dhammattabhāvadassana attadiṭṭhimalavisodhanato 단지 성품법들일 뿐 임을 보는 것은 자아사견이라는 더러움을 씻어내기 때문에)”라는 뒷 구절을 근거로 해서 적당하게 번역한 바른 의미이다. 법 거듭관찰 중 무더기 장에서 설명한뼈 무더기(atthika)’와 혼동해서 의심 하지 말라.)) Idam 새겨 알아지는 이 성품이 rūpam 분명하게 무너지고 변화하는 물질법이다. Ettakam 새겨 알아지는 이 정도가 rūpam물질법이다. Ito 새겨 알아지는 이 물질법보다 bhiyyo 더 넘어선 중생이 라고 하는 것은 na 없다.

 

iti ca라고 또한 이렇게 tesam 그 물질과 정신 들의 lakkhanasallakkhanamukhena고유특성을 주시하는 것을, 즉 새김 을 기본으로 하여 dhammamattabhāvadassanam ‘라든가중생이라 고 할 만한 것이 아닌 단지 성품법들뿐임을 보고 아는 것은 attadiṭṭhimalavisodhanato 자아사견이라고 하는 더러움을 씻어내고 사라지 게 하기 때문에 diṭṭhivisuddhi견해청정이라고 한다. iti veditabba 이렇게 알아야 한다.”(Pm.ii.367,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136-137)

 

 

이 문장은 청정도론에 실려 있는 제1828절에 대한 복주석이다. 마하시 사야도는 빠알리와 미얀마어로 대역했다. 미얀마 경전이나 논서는 대역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단지 한글로만 번역되어 있는 것과 다르다.

 

대역(對譯)은 빠알리 원문을 일대일로 번역한 것을 말한다. 더구나 대역에서는 설명도 붙인다. 이런 미얀마 논서를 한국마하시선원의 일창스님이 역시 우리말로 빠알리-한글로 대역해 놓은 것이다.

 

물질법은 무너지고 변화하는 성품법

 

대역을 보면 인상적인 구절이 있다. 정신법에 대해서는 대상 쪽으로 기울어져 항하는, 대상을 알 수 있는 정신법이다.”라고 정의한 것이다. 이는 비물질인 정신은 이라는 성품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물질법에 대해서는 무너지고 변화하는성품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 정신법과 이 물질법에 대하여 이것 이상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라든가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니까야를 보면 물질에 대하여 부서지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물질은 끊임 없이 변화되고 있음을 말한다. 이 말에 매료 되었다. 왜 그런가? 행선과 좌선을 하다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행선을 할 때 왼발, 오른발하며 걷는다. 이때 발을 떼고, 올리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육단계 행선을 한다. 이 여섯 단계 과정은 모두 새겨야 한다. 그런데 이런 여섯 단계의 움직임은 물질이라는 것이다. 지수화풍 사대 가운데 풍대를 말한다.

 

풍대는 움직임에 대한 것이다. 팔을 뻗는 것도 움직이고 배가 부푸는 것도 움직임이다. 이와 같은 바람의 세계도 물질인 것이다. 그런데 물질의 특징은 부서지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끊임 없는 변화이다. 이런 변화를 새기는 것은 물질을 새기는 것이 된다.

 

현존(現存)에 대하여

 

수행을 할 때 앉아만 있는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경전적 지식이 있어야 한다. 경전을 읽고 논서를 읽고 법문을 듣는 이유에 해당된다. 그래야 수행의 진척이 빠를 것이다. 또한 방향을 확실하게 잡을 수 있다.

 

물질은 부서지는 것이라는 말에 크게 감동받았다. 이것 하나만 알아도 큰 수확이다. 이는 생멸에 대한 것이다.

 

모든 정신법과 물질법은 생멸한다. 그래서 마하시 사야도는 생겨나는 그 순간에만 분명하게 존재한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오늘날 유튜브 견성채널에서 말하는 현존(現存)’과 같은 말일 것이다.

 

유튜브에서 어떤 이는 책상을 탕탕친다. 그러면서 이것입니다. 이것뿐입니다. 이렇게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한다. 현존을 알려 주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의 말에는 이론이 없다. 교학체계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수행도 없다. 수행체계가 없음을 말한다.

 

테라와다불교에서는 확고한 이론체계와 수행체계가 있다. 청정도론이 대표적이다. 또한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와 법문집이 있다. 이런 논서를 접하면 스승이 없이도 수행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결정적인 순간에서는 스승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마하시 사야도는 도와 과의 지혜로 열반을 직접 알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열심히 노력하기를 바라는 수행자라면 바른 스승에게서 방법을 배워 수행하기 바란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 120-121)라고 말했다.

 

자아사견이 제거될 때

 

위빠사나 수행은 현재를 보는 수행이다. 과거나 미래는 보지 않는다. 왜 그런가? 변화하기 때문이다. 또한 부서지기 때문이다. 분명하지도 않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생겨나는 것만을 새겨야 한다.

 

지금 이 순간 마의 몸과 마음에서는 정신법과 물질법이 끊임 없이 생겨난다. 그리고 즉시 사라진다. 이런 정신법과 물질법을 새겨야 한다. 새겨서 성품을 보아야 한다. 어떤 성품인가? 그것은 무상, , 무아라는 고유의 성품법을 말한다.

 

그렇다면 성품법을 새겨서 어쩌겠다는 건가? 이에 대하여 그 법들이 생겨나는 순간에 새기는 것을 통해서, 즉 새기는 것을 기본으로 하여 라고 할만한, 중생이라고 할만한 것은 없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 121)라고 했다. 이는 자아사견(attadiṭṭhi)’이 제거되는 것을 말한다.

 

자아사견이 제거될 때 두 가지가 성취된다. 하나는 위빠사나 1단계로서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가 생겨나고, 동시에 칠정정 가운데 일청정에 해당되는 견해청정이 이루어진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수행이 시작된다.

 

배후에 관찰자가 있다는데

 

나는 위빠사나 몇 단계에 해당될까? 아마 1단계도 되지 않은 것 같다. 아직도 자아사견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불교에서는 언어적 견해만 타파해도 깨닫는 것으로 보는 것 같다. 이른바 견성이다.

 

어떤 이들은 참나를 말한다. 본마음, 본래면목을 말하기도 한다. 견해청정이 이루어지면 이런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자칭타칭 깨달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배후에 관찰자가 있다는 등, 더 큰 자아가 있다는 식으로 말한다. 과연 그들의 깨달음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의심스럽다. 아마 위빠사나 1단계도 되지 않고 칠청정에서 견해청정도 이루지 못한 것으로 본다.

 

어떻게 해야 하루 종일 새김을 유지할 수 있을까?

 

행선이 끝났다. 오늘은 좌선하지 않고 행선만 1시간 20분 했다. 한시간 이상 걸었음에도 피곤하지가 않았다. 평상시와는 다른 상태가 되어서 그런 것 같다. 기분 같아서는 두 시간이든 세 시간이든 가능할 것 같았다.

 

행선할 때 막판에 눈을 뜨고 했다. 눈 감고 할 때와 다름 없었다. 이렇게 본다면 삼매가 형성되고 새김이 있을 때 평상시에도 가능할 것 같았다. 행선에서 형성된 새김을 일상으로 가져 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하루종일 새김이 유지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일상에서 새김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유튜브가 가장 큰 적이다. 유튜브에서 정치관련 이야기 등에 빠져 들었을 때 새김이 완전히 깨져 버린다. 이럴 경우 유튜브를 보지 않는 것이 좋다.

 

하루종일 새김을 유지하려면 일체 언어적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 선원에서 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오전만이라도 선원에서 사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

 

언어적 행위를 최소화 해야

 

오늘 행선만 1시간 20분 했다. 이렇게 오래 한 경우는 드물다. 행선하면 나름대로 방법을 알았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이다. 스스로 터득한 것이다. 이런 것을 계속 적용하고자 한다. 또한 일상에도 적용하고자 한다.

 

일상에서도 새김이 유지되고자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늘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새겨야 한다. 이렇게 새겼을 때 형상은 단지 색과 빛으로만 보일 것이다. 소리는 파동의 파장의 길이와 높낮이로만 보일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오토바이폭음에 대한 스트레스도 완화되지 않을까?

 

오늘 글이 길었다. 오전에 이어 오후에도 쓰고 있다. 오전 10시부터 쓰기 시작한 글이 현재 오후245분이다. 점심시간 40분을 제외하고 네 시간 쓴 것이다. 그럼에도 지치지 않는다.

 

점심 때 스마트폰을 보지 않았다. 오로지 먹는 데만 집중했다. 앞으로 모든 일에 현재 하는 일에만 집중한다면 큰 성과를 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일상에서 새김을 유지하는 것이다. 언어적 행위를 최소화 해야 한다. 유튜브 보는 것부터 자제해야 한다.

 

 

2024-10-0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