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마 아니무스, 최종단계는 사랑과 말씀보다는 ‘지혜(智慧)’
흔히 한눈에 반하여 결혼 했다는 경우를 많이 본다. 처음 그녀(그이)를 본 순간 눈에 스파크가 일러나고 강렬한 끌림에 사로 잡혀 바로 이 사람이 내가 찾던 사람이라고 확신 하게 된다. 어딘지 모르게 언젠가 본 듯 하고 익숙한 모습이다. 나의 이상형이라고 생각 되기 때문에 주저 없이 선택하고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선택은 실망으로 바뀐다. 그녀(그이)는 자신이 바라던 이상형도 아닐 뿐더러 최악의 선택을 하였음을 깨닫게 된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 하였을까. 첫눈에 반한다는 속설이 맞지 않음을 증명 하는 것은 아닐까. 제 눈에 안경이라고 한다. 자신이 인식하는 만큼 세상이 보이게끔 되어 있다. 첫눈에 반한 상대는 알고 보면 자신의 내부에 있는 이상형이 상대방에게 투사 되어 보였던 것 일 뿐이다. 칼.G.융은 사람의 마음속에 특히 무의식속에는 또 하나의 자신의 인격이 들어 있다고 한다. 남자는 여성성이 여자는 남성성이 들어 있어서 어느 상황에서 투사 된다고 한다. 즉 남성내부에 있는 여성적 요소를 ‘아니마(Anima)’라 하고 여성내부에 있는 남성적 요소를 ‘아니무스(Animus)’라 한다.
아니마 아니무스의 부정적인 요소
우리는 가끔 씩씩하고 매사가 분명하고 논리정연한 남성이 어느 순간 섬세하고 여린 감정을 보이고 때로는 변덕을 부리는 마치 여성과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감정이 기복이 심해지고 센치멘탈해져서 보기에는 파멸로 이끄는 요부로 보임에도 불구 하고 내부의 아니마의 영향을 받아 강한 이끌림을 받는 경우도 볼 수 있다. 이때가 이 남성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미숙한 부정적인 아니마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어떤 여성은 그야 말로 착하고 현모양처형으로서 전형적인 여성임에도 불구 하고 어느 순간 고집불통으로 변하는 경우도 있다. 게다가 논리적으로 따지고 들며 원칙을 주장하여 남자를 꼼짝없이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이 것은 여성의 내부에 있는 미숙한 부정적인 아니무스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자기주장을 고집하고 완고하게 밀어 붙여서 이기려고 하는 특성은 전형적인 남성성의 발현이라고 보아야 한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우리의 내부에 숨어 있는 또 하나의 자신이다. 남성속에 여성성이 여성속에 남성성이 개인 무의식에 숨어 있어서 비록 배우자 있다 할지 라도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마음속의 동반자 인 것이다. 남성속에 여성성과 여성속의 남성성이 들어 가 있지만 이들이 발현 하는 시기는 대체로 36세 이후의 중년으로 보아야 한다. 이 때쯤 되면 남성들은 유순해 지고 여성들은 드세지는 시기 하고 거의 일치 한다. 남성들은 남성에게 부족한 ‘에로스(Eros) 즉 사랑과 낭만등 감성적인 면이 채워지고, 여성들은 여성에게 부족한 ‘로고스(Rogos)’ 즉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면이 채워져서 서로 조화를 이루게 된다.
아니마 아니무스의 긍정적인 요소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사람마다 차이는 있으나 4단계로 분화 되고 발전 하여 간다. 아니마 즉 남성속에 여성성은 로고스적인 면을 보충 하여 주는데 4단계로 발전 된다. 즉 1단계는 성적인 에로스가 지배적인 관능적 단계이다. 대부분의 남성들이 이단계에 몰입하는 경향이 있다. 2단계는 관능적에로스가 남아 있지만 낭만이 곁들인 아니마 이다. 3단계는 종교적으로 승화된 영성화 단계이다. 기독교의 경우 성모마리아, 불교의 경우 관세음보살 숭배 정도가 되겠다. 이 경우 관능적인 아름다움 하고는 거리가 멀다. 오로지 종교적으로 승화된 지고 지순한 순수한 사랑과 자비의 에로스이다. 지구상의 대부분의 종교가 사랑과 자비를 강조 하는데 한계가 여기 까지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융은 여기에다 이 것으로 부족 했던지 한단계를 더 만들었다. 즉 제4단계가 지혜의 단계이다. 사랑의 아니마 위에 지혜의 아니마를 올려 놓고 이 것이 가장 높은 단계라고 말하고 있다. 상징으로서는 지혜의 여신인 소피아이고 이미지로서는 모나리자를 예로 들었다. 사실 이 지혜의 아니마는 다름아닌 자기와 다름이 없다. 여기서 자기는 의식과 무의식을 모두 포괄하는 본래의 마음으로서 불교의 불성과 같은 것이다.
여성속의 남성성 즉 아니무스도 역시 4단계로 구분 하였다. 여성에게 부족한 로고스적인 면을 채워주는 것으로서 1단계는 남성의 힘을 상징한다. 이미지로서는 운동선수, 근육질의 타잔등을 들 수 있겠다. 남성들이 관능적에로스인 1단계를 벗어 나지 못하는 것과 같이 여성들도 남성의 힘과 근육에 매료 당하는 경향이 있다. 2단계는 힘과 근육은 약화 되었지만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아니무스 이다. 유명한 작가, 시민운동가등 행동하는 양심가 등을 들 수 있겠다. 3단계는 남성의 특징중의 하나인 논리와 말이다. 이부분도 역시 여성에게 부족한 로고스이다. 이런 로고스를 대표 하는 이미지는 빌리그레함 목사 같은 대중
아니마 아니무스의 최종단계는 지혜의 완성
칼융은 아니마와 아니무스 이론을 소개 하면서 최종적으로 지혜로 귀착 시키고 있다. 아니마의 3단계가 지고지순한 사랑의 이미지인 성모 마리아 이고 아니무스의 3단계가 말씀을 위주로 하는 빌리그레함 목사 같은 이미지를 예로 들고 있으나 이 3단계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님을 분명이 밝히고 있다. 아니마이든 아니무스이든 최종단계 즉 4단계는 지혜의 완성으로 귀결시키고 있다. 과연 이 지혜는 어떤 지혜일까. 아니마의 이미지로서는 지혜의 여신인 소피아를 예로 들었고 아니무스에서는 행동하는 양심이며 지혜의 완성자로서의 간디를 예로 들었지만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불교에 더 가까운 듯한 느낌이다. 흔히 말하기를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고 불교는 지혜의 종교라고 말한다. 사랑도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보편적인 사랑이 있고 해당 종교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하고 편협한 사랑이 있을 수 있다. 반면에 지혜는 특별하고 편협한 사랑과 달리 세상을 꿰뚫어 보는 보편적인 진리이다. 따라서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아울러 최종완성단계로서 지혜를 강조 하였는데 바로 그 지혜의 완성자체가 자기와 같다는 것이다.
융은 자기라는 개념을 의식과 무의식을 다 포함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에게 있어서 그림자가 있듯이 우리에게는 의식하는 나만이 나이고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은 나가 아니라고 말 할 수 없다. 의식 하는 나만이 있다면 그것은 자아(Ego)이고 의식하는나와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모두를 포괄하는 전체를 자기(Self)라고 규정 하였다. 마찬가지로 종교에 있어서 신과 악마라는 것도 알고 보면 둘이 분리된 전혀 다른 개념이 아니라 알고 보면 한마음 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악마나 사탄은 신이라는 개념의 그림자로서 항상 따라 다니는 것이다. 아니마의 3단계인 사랑의 이미지인 성모 마리아의 반대 이미지는 마녀라 볼 수 있다. 성모 마리아의 지고지순한 사랑만 강조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그림자 개념의 마녀는 사악하고 나쁜 것으로서 억눌려 진다. 그 억눌려진 그림자는 어느 순간에 마녀사냥으로 돌변하기도 하는 것이다. 융은 이런 사랑만을 강조 하는 문제점을 보고 4단계인 지혜의 완성을 추가 하였다. 또한 아니무스의 3단계의 말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빌리그레함 같이 말씀의 이미지로서 표현되지만 이 것 만 가지고는 무언가 부족 하다. 그래서 행동하는 실천가형의 지혜로운 간디 이미지를 마지막 단계로 설정하고 지혜를 가장 궁극적으로 추구 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그런데 종교중에 유일하게 불교는 지혜의 완성을 최고의 목표로 추구 하고 있다. 불자들이 가장 많이 애송 하는 반야심경 자체가 지혜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경전이다. 반야라는 이름 자체가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융이 직접적으로 불교에 대하여 말은 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가 구축한 심층분석심리학은 너무나 불교의 교리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융연구소에서 수학한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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