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고령화사회에 ‘불교수행공동체’를 제안 하며

담마다사 이병욱 2007. 9. 9. 09:38

 

고령화사회에 ‘불교수행공동체’를 제안 하며

 

 

한국인의 정서와 맞고 친환경적인 불교공동체에서

경전공부, 염불, 사경, 절수행, 참선수행등으로 노년 보내기

 

 

 

출산율은 점점 줄어들고 노인인구는 늘어나는 고령화시대에 접어 들었다고 한다. 앞으로 20-30년 후가 되면 전체인구의 1/4이 노인 인구라 하니 가히 노령화 대국의 시대가 펼쳐질 모양이다. 지금의 40-50대의 연령층이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첫 번째 세대가 될 것이다.

 

노인들이 늘어나면 사회전체가 활력이 떨어지고 또한 생산성도 저하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젊은이가 너무 많은 노인부양을 위하여 지금보다도 훨씬 더 많은 지출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많은 노인이 집에서만 있는 다면 그리고 집에서 임종을 맞이 하게 된다면 이것도 또한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 현실에서 나이 50대만 되어도 사회적으로 퇴출당하고 또한 단순 노무직 외에는 특별히 할 일이 없다. 그런데 65세이상이 되는 노인이라면 더구나 받아 주는 곳도 없을 뿐더러 마땅히 갈 곳도 없다. 오래사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 되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이 들어서 불교에 귀의 하는 사람들이 많아 진다

 

불교에 귀의 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이 들어서 믿는 사람들이 무척 많다. 젊었을 때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가장 왕성한 시기이기 때문에 인생이나 존재에 대하여 고민할 여유가 적었으나 나이 먹고 힘이 빠질 때쯤 되면 한번 되돌아 보게 된다. 많은 종교 중에서 그래도 불교에 의지 하는 이유는 연륜에서 오는 경험의 산물일 것이다.

 

70-80년대는 기독교가 고도의 성장기이었다. 도시화가 진전되고 산업화가 이루어져 고도의 경제성장기와 일치 한다. 마땅히 마음 두고 갈곳 없는 젊은이들이 대거 교회에 몰려 들었고 교회 또한 경제성장 하는 것 만큼이나 급속히 성장 하였다. 그 때 당시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동네마다 교회가 있어서 쉽게 찾아 갈 수 있었고 또한 미션스클이라 불리는 종교재단학교에서 기독교를 접할 기회는 너무 많았다. 선점의 효과는 무시 하지 못하는 것이다. 교회에 꽉 묶어 두기 위하여 찬송가 중에도 ‘믿었다 안 믿으면 유황불이 펄펄 끓는 지옥에 떨어진다’ 식의 구절이 있었으니 심적으로 매우 부담을 주는 효과적인 ‘묶어두기’라 생각 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참으로 교리와 묶어두기는 참으로 유치하기 짝이 없는 유치원수준의 발상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미션스클에서도 기독교 경험도  한국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호기심반 기대반으로 교회경험은 한번쯤 다 있다고 판단된다.

 

너무나 멀리 있었던 불교

 

불교는 너무나 멀리 있었다. 주로 산중에 있다 보니 대중들하고 유리 되고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도시에는 눈을 씻고 찾아 보아도 사찰을 볼 수가 없었다. 이것이 70-80년대의 상황이었다. 설령 산중으로 찾아 간다고 해도 교통이 너무 불편해서 큰마음 먹지 않으면 접근자체가 되지도 않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접근자체가 어려운 불교도 90년대가 되자 상황은 변하기 시작 한 것이다. 가장 큰 요인으로는 자동차의 보급일 것이다. 길만 있으면 전국방방곡에 자동차가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따라서 심산유곡에 있는 암자 일지라도 접근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는 불교대학의 활성화라 볼 수 있다. 기독교와는 정서가 맞지 않은 수 많은 사람들이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불교대학은 이들의 마음을 잡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0년대에 와서는 인터넷의 보급으로 인하여 손쉽게 불교와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 졌다. 검색만 하면 불교교리는 물론 타종교의 교리와도 비교할 수 있는 기회도 많아 진 것이다.

 

21세기는 불교의 시대

 

70-80년대의 산업화시대에 기독교가 고도의 성장을 누린 시대 이었다면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90년대와 2000년대 시대는 불교의 가치가 알려진 시대라 볼 수 있다. 산중에만 고립되어 있던 불교가 교통의 발달로 사람들이 찾아 오게 되고 인터넷의 발달로 불교의 진면목이 여과 없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가속화 되리라 생각된다. 사람들은 이제 정보를 컴퓨터만 켜면 모두 알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종교의 교리에 있어서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도 남녀노소 도시와 농촌 구별 없이 네트워크만 연결 되어 있다면 손쉽게 알 수 있다. 누구도 막을 수 없고 거스를 수 없는 도도한 역사의 흐름인 것이다. 진정한 마음의 혁명이 인터넷으로부터 시작 되고 있다고 말한다면 너무 지나친 생각일까.

 

교통과 인터넷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배타적인 구원관을 지닌 기독교가 잘 먹혀 들어가는 시기 이었으나 지금은 정반대의 현상을 보이고 있다. 국민들의 싱식과 지식이 전반적으로 높아지고 여유롭고 풍요로롭게 삶의 질이 향상 됨에 따라 더 이상 과거와 같은 교리를 가진 종교에는 만족하지 않게 되었다. 동양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한 뉴에이지 운동과 신과학운동이 유행하고 적극적으로 받아 들여 지기 시작 한 것도 이때문이리라. 이들 사상 모두 기독교에 반하는 내용으로서 기독교가 가장 경계하는 이론 중의 하나이다. 오죽 했으면 뉴에이지는 사탄의 운동이라 하고 이것을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자고 집안 단속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뉴에이지와 같은 동양사상의 확산은 결국 교회의 설자리가 없어짐을 직감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뉴에이지나 신과학운동은 동양사상 그 중에서도 불교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원주의, 윤회와 환생, 영적성장 등 이제 까지 무시하고 잊어 버리고 살아 왔던 동양적인 가치가 21세기에 화려하게 부활 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미국을 포함한 유럽에서 열풍이 더 심해서 일시적으로 그칠 것 같지 않다. 새로운 세기를 맞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노령화 시대에 적합한 불교

 

21세기의 사회는 인간과 환경이 중시 되는 시대가 될  것이다. 삶의 질이 높아지고 지식이 많아 짐에 따라 거기에 걸 맞는 종교 또한 각광을 받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불교와 말로 21세기 정보화 시대 그리고 환경을 중시 하는 시대에 딱 들어 맞는 종교라 볼 수 있다. 불교는 믿음만 강조 하는 신행의 종교가 아니다. 불교의 가장 큰 장점중의 하나는 수행의 종교라는 것이다. 이점이 지구상의 그 어떤 종교와도 비교 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행을 통하여 내면을 관찰하고 관조 하는 삶이야말로 이 시대가 요구 하고 있는 사항과 정확히 맞아 떨어 진다는 사실이다. 단전호흡이 유행하고 요가 열풍이 부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젊었을 때 타종교를 믿다가도 나이 들어서 불교에 귀의 한다는 말은 상당히 일리 있는 말이다.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점이 불교에 귀의 하게 만드는 것일까. 불교는 철저하게 자각의 종교이다. 신에 의지 해서 구원을 바라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세상 모든 것이 공함을 깨달으면 지혜의 문이 열리고 동시에 자비가 생긴다는 말이다. 따라서 알아야 될 것도 많고 공부도 많이 해야 한다. 경전 공부는 물론이고 염불, 사경, 절수행, 첨선수행등 매우 다양한 수행 방법이 있다. 각자 근기에 맞는 방법을 찾아서 수행 하면 된다. 신행과 수행을 겸비한 불교야 말로 21세기 노령화시대에 적합한 최상의 종교가 아닐까 생각한다. 앞으로 당면 하게 될 고령화 시대에 불교수행공동체가 탄생된다면 노인문제 해결 뿐만 아니라 불교의 발전에도 매우 도움이 되지 않을 까 생각해 본다.

 

 

 

2007-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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