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사랑’과 ‘자비(慈悲)’의 개념은 지옥과 천국만치나 크다

담마다사 이병욱 2007. 9. 27. 11:15

 

사랑자비(慈悲)의 개념은 지옥과 천국만치나 크다

 

 

유일신교에서 사랑대신에 자비라는 말을 즐겨 사용 하는데

 

 

 

장로예배라는 말도 원래 불교용어이다

 

사랑과 자비라는 말이 있다. 종교적으로 본다면 사랑은 주로 유일신교계통에서 쓰이고 자비는 불교에서 쓰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요즈음은 유일신교에서도 즐겨 쓰는 것 같다. 수환추기경이 즐겨 사용 하고 있고 또한 개신교 목사들도 사랑보다 자비라는 말을 많이 쓰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자비라는 말이 사랑이라는 말보다도 더 포괄적이고 깊은 애정이 담긴 말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어떤 불자는 걱정하기를 자비라는 말마저 기독교에 뺏기는 것 아닌가 하고 우려 하기도 하다. 사실 유일신교에서 사용 하는 말중에 불교용어가 무척 많은 것은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장로라는 말을 들 수 있겠다. 금강경에 나오는 이말은 원래 부처님의 10대제자에게 붙여준 명칭이다. 장로 수보리는.라는 표현으로 말이다. 그리고 이외에도 예배라는 말도 마치 유일신교 전용어로 쓰이고 있지만 알고 보면 불교경전에 다 나오는 말이다.

 

조건과 이해관계를 따지는 것은 비즈니스 세계에서나 있는 일

 

사회생활은 이해관계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비즈니스가 철저하게 주고 받는 시스템이라는 것은 상식이다.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고 또 일반적으로 받기만 하는 비즈니스는 오래 가지 못하고 깨지게끔 되어 있다. 서로 간에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져야 거래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건을 따지고 조건이 맞아야 거래가 성사 되는 것이다. 심지어는 요즘 유행하는 중매전문회사에서도 이와 같은 조건이 붙은 거래형식을  볼 수 있다. 남자와 여자를 조건에 따라서 점수화 하고 그 점수에 맞는 사람을 연결 시켜 준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중매회사도 다름아닌 이해관계를 따지고 조건을 따지는 비즈니스라고 볼 수 있다.

 

조건을 따져서 거래 하는 경우가 비즈니스 세계에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종교세계에서도 그런 현상은 목격 할 수 있다. 믿음이라는 조건이 충족 되어야만 사랑이 베풀어지는 유일신교야 말로 조건부 사랑의 대표적인 케이스라 볼 수 있다. 믿지 않는다면 유일신의 사랑을 기대 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렇다면 왜 믿지 않으면 사랑을 기대 할 수 없을까. 다름 아닌 교리때문이다. 소위 창조론부터 시작해서 원죄론, 대속론, 종말론, 구원론등 믿음이 뒷 받침 되지 않으면 교리가 성립 할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장 첫번째 조건이 믿음인 것이다. 믿고 난후에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은혜로운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불교의 교리는 기본적으로 무아 이고 공사상이다

 

불교의 교리는 기본적으로 무아 이고 공사상이다. 여기에는 어떤 믿음이라는 조건이 붙지 않는다. 실상을 있는 그대로 관하여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으면 사랑을 받는 다는 조건부 사랑은 맞지 않다는 것이다. 제상이 공함을 깨달으면 한몸임을 느끼고 거기에서 진정한 자비가 우러 나오는 것이다. 즉 안쓰러움과 연민의 사랑인 것이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은 중생을 제도 하기 전가지 성불을 미루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지장보살은 지옥에 있는 중생들을 제도 하기 전까지 성불을 미루고 있다. 모든 중생들은 반드시 사람만을 의미 하지는 않는다. 금강경에는 태란습화 즉 태생으로 태어난 것, 알에서 태어난 것, 습지에서 태어난 것, 변화해서 태어난 것 이들 모두를 중생으로 간주 한다. 이것 만이 아니다. 물질로 이루어진 중생 뿐만 아니라 정신으로 만 이루어진 천신들도 중생으로 간주 한다. 이런 논리라면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신도 제도 해야 될 중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유일신교의 창조주도 제도 해야 할 중생일 뿐

 

유일신교의 창조주도 제도 해야 될 중생으로 생각 하는 불교의 스케일은 무척 광대 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미물의 중생에서부터 비상비비상처에 있는 천신들까지 모두 제도 해야할 중생이지만 제도 하였다는 생각을 가지고 제도 한다면 단 한중생도 제도 하지 못 한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상()을 버리라고 강조 한다. 그중에서도 아상(我相)을 버리라고 이야기 한다. 즉 무아를 강조 한다. 이점이 바로 유일신교와 가장 차별화 되는 이론이다. 유일신교에서는 나라는 존재를 끝까지 유지 하려 한다. 심지어 죽었던 사람들도 그 모습 그 대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한다. 물론 믿음이 뒷받침 되어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내가 있다는 생각이 있는 종교와 나를 버려라는 종교는 극명하게 대비 될 수 있다. 내가 있다고 생각 하는 종교는 모든 것이 나 위주로 돌아 가게 되어 있다. 따라서 나와 남과 구별이 생기고 사랑을 해도 조건을 따지게 된다. 그러나 나가 있을 수 없다라는 종교는 나와 남이 구분이 있을 수 없다. 즉 일심동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려운 사람을 보면 도와 주고 싶고 불쌍한 사람을 보면 위로해 주고 싶은 것이다. 어떤 조건에 따라 사랑을 주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유일신교의 사랑과 불교의 자비는 서로 다른 개념이다

 

유일신교에서 사랑이라는 말 대신에 자비라는 말을 즐겨 사용 하나 알고 보면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차이는 아마 지옥과 천국의 개념만치나 클 것이다. 오로지 믿음만을 강조 하는 종교는 믿지 않는 사람 그리고 미운사람, 보기 싫은 사람은 지옥에 쳐 박아 놓고 영원히 빠져 나오지 못하도록 하고 믿는 사람은 과거를 불문 하고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한다. 반면에 무아를 강조 하는 종교는 삼라만상이 일심동체이기 때문에 비록 지옥에 떨어진 중생일리자라도 업이 다 소멸 되면 빠져 나올 수 있다고 말한다. 더구나 지장보살 같은 이는 모든 지옥중생을 제도 하기 전까지는 결코 성불 하지 않겠다고 서원까지 하였지 않았는가. 또 선한 일을 많이 하여 천국에 태어 났을 지라도 새로운 공덕을 쌓지 않고 오로지 즐거움만 누린다면 그 업이 다하여 아래세상으로 떨어 질 수 있다고 강조 한다. 믿음만 강조 하는 종교와 무아를 강조 하는 종교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유일신교에서 사랑대신에 자비라는 말을 즐겨 사용 하는데 과연 이런 내용을 알기나 하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2007-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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