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빛의 다발’ ‘꽃의 다발’로 장식된 우주, 비로자나불의 광명이고 삼매이다

담마다사 이병욱 2008. 2. 10. 11:18

 

빛의 다발’ ‘꽃의 다발로 장식된 우주는 그대로 비로자나부처님의 광명이고 삼매이다

 

 

 

 

 

 

꽃을 던지는 풍습

 

以諸華香 而散其處(이제화향  이산기처)

금강경에 나오는 말이다. “여러가지 꽃과 향으로써 그 곳에 흩으리라라는 뜻이다. 부처님 당시 인도에서는 존경 하고 공양을 받을 만한 분 들에게 향을 뿌리고 꽃을 던지는 풍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풍습의 잔해는 색종이 뿌리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외국의 대통령이나 국위를 선양한 체육인들에게 환영 하는 의미에서 카퍼레이드 할때 옥상에서 색종이를 뿌리는 것이다.

 

화엄경은 책 제목이 말해 주듯이 꽃의 장엄이다. 이 세상에 존재 하는 모든 생명체를 꽃으로 본 것이다. 단순한 꽃이 아니라 존재 하면서 발생되는 번뇌의 꽃이다. 그 꽃다발이 모여서 우주를 장엄하면 꽃의 바다가 되고 그 꽃의 바다를 멀리서 보면 빛으로 보일 것이다.

 

바이로차나(Vairocana)광명변조(光明遍照)’

 

화엄경의 교주는 비로자나불이다. 산스크리트어로 바이로차나(Vairocana)이다. 한역으로는 법신불이다. 화엄경에서 비로자나 부처님은 직접 설 하지 않는다. 비로자나 부처님의 광명과 그 위신력으로 삼매에 들면 보살들이 설법하는 형식이다. 바이로차나라는 말도 풀이 하면 광명변조(光明遍照)’라는 뜻이다. 빛이 두루 두루 비춘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빛이 바로 번뇌의 꽃이고 업의 꽃이라는 것이다.

 

눈먼 장님은 사물을 볼 수 없다. 태양은 눈먼 장님이 볼수 있건 없건 상관 하지 않고 항상 비추고 있다. 내리는 비도 호 불호를 따지지 않고 골고루 뿌려 준다. 내가 눈을 감으면 나의 우주도 문을 닫지만 그에 상관 없이 객관적인 우주는 늘 존재 하면서 빛을 발한다. 눈에 보이는 것은 빛이다. 그 빛들이 모인 빛다발이 마치 꽃다발처럼 우주를 수 놓을 때 꽃의 장엄이 된다.

 

우주적인 번뇌와 업

 

우주가 시작 된 이래 수많은 빛이 있어 왔다. 새로운 빛이 나타나는가 하면 꺼지는 빛도 있다. 중생의 업과 번뇌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소설이나 드라마의 주제가 되는 이야기는 수천억만분의 일에도 못 미칠 것이다. 그런데 그 업과 번뇌라는 것이 대부분 개인차원이라는 것이다. 개인차원의 업과 번뇌는 빛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개인차원을 넘어서 우주적인 번뇌와 업으로 승화 시켜야만 빛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화엄경에서 말하는 꽃의 장엄은 우주적으로 승화된 번뇌와 업을 말함이다. 이 것을 극적으로 잘 표현 해주고 있는 말을 보현행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허공계가 다해야 나의 예배와 공경도 다하겠지만,

허공계가 다할 수 없으므로 나의 이 예배와 공경도 다함이 없다

 

법계와 허공계가 다 할 때 까지 모든 부처님을 예경 하겠다고 다짐 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들이 빛이 되어 우주를 장엄 하는 꽃이 될 때 까지 부처님으로 모시겠다는 것이다. 결국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과 같이 모든 중생들이 제도 되기 전까지는 결코 나 혼자만 성불하지 않겠다고 다짐 하는 것과 같다.

 

빛의 다발’ ‘꽃의 다발로 장식된 우주

 

수도 없이 많은 존재들이 업의 바다에서 새로운 업을 짖고 번뇌 하면서 우주가 존재 하여 왔다. 그 존재들이 사라질 지라도 새로운 존재 들이 나타나서 계속 업과 번뇌의 행진을 계속 할 것이다. 마치 사물을 볼수 없는 장님이건 아니건 상관 없이 태양이 비추듯이 말이다. 지금 짓고 있는 업과 고뇌, 번뇌는 개인차원이다. 이 하잘 것 없는 개인차원의 번뇌와 업을 허공계가 다 하도록 모든 부처님을 예경 하겠다는 차원으로 승화 시킬때 우주의 꽃이 되고 우주의 빛이 될 것이다. ‘빛의 다발’ ‘꽃의 다발로 장식된 우주는 그대로 비로자나부처님의 광명이고 삼매이다.

 

 

 

2008-02-1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