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기쁨을 먹고 사는 세상은

담마다사 이병욱 2008. 7. 7. 11:36

 

기쁨을 먹고 사는 세상은

 

 

 

 

개를 바라보면 측은 하다는 생각이

 

한국인들은 보신탕을 즐겨 먹는다. 보신탕용으로 사용 되는 개는 한적한 시골 구석진 곳에서 사육 되는데 그 곳은 언제나 개의 울부짖음으로 가득하다. 반 미친 상태라 보여 진다. 그런 곳에서 기품 있고 우수한 품종의 개는 찾아 보기 힘들다. 살코기를 제공하기 위하여 사육 되기 때문에 애완견이나 혈통이 있는 개는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소위 '똥개'라 불리우는 잡종들이 집단적으로 사육 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과 가장 친근한 동물은 단연 개이다. 같이 살아온 역사도 오래 되었지만 다른 동물 보다도 더 영리 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까지도 읽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홀로 사는 사람이나 노인층에서 또는 동물을 좋아 하는 사람들이 애완견으로 기르고 있다. 주인이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가장 먼저 반기는 반기는 것이 애완견이다 보니 사람 보다 정이 더 갈만 하다. 그리고 매우 충성스럽다. 한번 주인으로 모시면 끝까지 충성을 다 하고 배신 하는 법이 없다. 사람들에게 상처 받은 사람들 입장에서 보았을 때 사람보다 더 신뢰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 이다.

 

그런 개를 바라보고 있으면 귀엽다는 생각보다도 측은 하다는 생각이 앞선다. 어떻게 하다 개로 태어 났을까 하는 동정심이다. 그리고 혐오감도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정을 붙이지 않는지도 모른다.

 

윤회와 전생을 인정 하는 불교에서는 개도 언젠가 우리와 인연을 맺었던 형제 자매 이었을지 모른다고 생각 한다. 다만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개로 태어 났을 것이라고 여긴다. 평소에 개같이 행동 하였다면 개로 태어 날 확률이 크다는 것이다. 악행을 많이 하였다면 지옥에 태어날 가능성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짐승만도 못한 놈 이라는 이야기도 있는 것이다.

 

만일 동물이 왜 사는가 하고 고민 한다면

 

인간은 생각 하는 갈대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은 뒤에 붙는 수많은 수식어를 볼 수 있다. 그만치 인간은 사유 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사는가에 대하여 고민 하는 것도 인간만이 할 수 있다. 만일 동물이 왜 사는가 하고 고민 한다면 이미 동물이 아닐 것이다. 인간과 동급의 또 다른 존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 사는가 하고 고민 한다면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고민 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에 대하여 고민 하게 되고 점차로 사고를 넓혀 가다 보면 결국 종교에 다가갈 수 밖에 없다. 종교는 여기에 대하여 해답을 주기 때문이다. 어떤이는 절대자에 의지 하여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이는 좀 더 근원적인 해결을 찾아 마음의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느 경우이든 목적은 마음의 안정과 평화이다. 그런데 개의 겉모습이 다르듯이 똑같아 보이는 인간일지라도 사고의 폭은 천차만별하다는 사실이다.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는 인간들

 

뉴스를 들어 보면 세상이 끝날 것처럼 온갖 부정적이고 우려 스러운 뉴스가 많이 나온다. 지구온난화 자원고갈 식량문제등 아직 오지는 않았지만 곧 들이 닥칠 것 같은 재앙에 대하여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그런 우려의 목소리와 무관하게 여전히 흥청망청인 모습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마치 내일은 없고 지금 이순간만이 있는 것처럼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즐거움을 만끽 하고 있는 것이다. 환경이나 생명 문제는 나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먼 훗날의 문제이고 다음 세대까지 생각 할 여유도 없는 듯 하다.

 

쇠고기나 개고기는 인간이 좋아 하는 음식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보양식이다. 먹으면 든든하고 힘이 나고 게다가 정력까지 넘쳐서 일석3조의 역할까지 한다. 그런 고기를 값싸게 공급해서 국민들에게 제공해서 삶의 질을 높여 주겠다는 것이 쇠고기파동의 원인이다. 개나 소가 한낱 인간의 미각을 돋구고 힘을 발산 하게 해주는 살코기 제공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같은 생명임에도 불구 하고 한쪽에서는 이를 즐겨 먹고 한쪽에서는 살코기를 제공 하기 위하여 태어나서 사육 된 다음에 이삼십개월이라는 짧은 생을 마감 하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인간 보다 더 높은 지적존재에 의하여 사육 되어서 살코기를 제공 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 하면 어떤 생각이 들까. 아니 탐욕스런 인간의 모습에서 그런 모습을 발견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마치 개나 쇠고기의 살코기를 즐기듯이 인간이 인간을 사유화 해서 즐기는 모습은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인간과 같은 잡식성 동물도 없는 듯 하다. 무엇이 든지 먹어 치우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기쁨을 먹고 사는 세상은

 

천상이나 천국의 특징은 수고 없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곳이라 한다. 인간세계는 무엇을 하려고 해도 반드시 노고가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천상은 그런 노고나 수고가 필요가 없다. 마음 먹은 대로 다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또 천상은 기쁨을 먹고 산다고 한다. 반드시 먹지 않아도 기쁨을 느끼는 그 자체가 먹는 것과 똑 같은 것이다. 그런 천상에서 인간세계를 바라 본다면 틀림 없이 개나 소처럼 보일 것이다. 먹고 마시고 배설 하는 모습이 개나 소와 다를바 없고 행동 또한 이들 개나 소와 큰차이가 없게 여겨 질 것이다. 오직 본능에 의해서만 움직이고 사로 다투는 모습이 동물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오늘도 먹고 마시고 싸는 생활의 연속이고 자신이 누군인지도 모르는 상태라면 동물과 하등에 다른 점이 없는 것이다. 인간 보다 더 높은 존재가 보았을 때는 인간이나 개나 소와 다를바가 없는 또 같은 중생인 것이다.

 

만물의 영장이라 불리는 인간이 이 지구상에 주인이 된지 오래 되었다. 아니 지구의 역사에 비하면 순간적이라 볼 수 있다. 인간 이전에도 주인공이 있었지만 영원히 주인 노릇은 하지 못 하였다. 공룡이 한때 주인공 이었지만 왕성한 식욕과 탐욕에 의하여 덩치만 커지고 결국은 멸종 한 것을 지식을 통하여 잘 알고 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왕성한 식욕과 동물적 탐욕으로 인하여 멸망하지 말라는 보장은 없다. 이에 대한 경고의 메세지가 인간광우병과 같은 것이다. 그것도 서구문화중심지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촛불집회를 열고 생명과 환경운동을 벌이는 것도 어찌 보면 인간의 파멸을 막아 보자는 몸부림처럼 여겨진다. 그런 운동의 중심에는 불교가 있다. 불교의 불살생과 자비사상이 지금의 상항에서 돋 보이는 이유중의 하나 일 것이다.

 

누구나 이상적인 세상을 꿈꾸며 살아 간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 나고져 한다. 그런 이상적인 세상이라면 바로 천상과 천국과 같은 세상일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다 가는 것은 아니다. 짐승같은 행동을 일삼는 사람들은 축생의 세상에 태어 날 것이고 싸우기를 좋아 하는 사람은 아수라의 세계에 태어 날 것이다. 반면에 지혜와 자비가 가듣한 사람들은 천상에 태어 날 것이다. 천상은 무엇이든지 수고 없이 이루어지고 기쁨을 먹고 사는 세계라고 하였다. 인간세계가 수고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세계일지라도 천상 못지 않은 기쁨의 세계로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 만으로도 즐겁고 먹지 않아도 배부른 세상이다. 그런 기쁨을 먹고 사는 세상이 바로 천상의 세상이 아닐까..

 

 

2008-07-0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