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어떤 사람들이 개종 하는가

담마다사 이병욱 2008. 7. 12. 10:04

 

어떤 사람들이 개종 하는가

 

 

죽지 못해 사는 사람

 

들은 이야기이다. 박정희 시절에 대통령이 비서진을 대리고 한 사찰을 찾았다고 한다. 어느 덕망높은 고승으부터 한말씀 듣기 위해서란다. 그 때 그 고승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어 보았다고 한다. "도대체 왜 사는 겁니까". 여기에 대하여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자 재차 물으니 한쪽 켠에 앉아 있는 사람이 "죽지 못해 삽니다"라고 말 하였다고 한다.

 

다리 밑에 한사람이 쓰러져 있다. 주변에는 소주병과 막걸리통이 있다. 안주는 일체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안주 없이 나발 분 모양이다. 주변이 하천이 있는 산책가라 많은 사람이 운동 하면서 지나치지만 특별히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왜 저렇게 되었을 까 하는 염려 섞인 표정이다. 땅바닥에 엎어져 있는 모습이 마치 죽은 사람 모습과 같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 다만 숨을 쉴 때 등이 들썩거리는 것으로 보아 죽도록 술을 마신 것으로 보인다. 왜 저 사람은 환하고 상쾌한 여름날에 저런 모습으로 땅바닥에 엎어져 있을까. 남모르는 사정이 있음에 틀림 없을 것이다. 차라리 술 마시고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 했던 것일까.

 

 

 

 

아쉬울 때 찾는 종교

 

사람들은 위기에 처했을 때 종교를 찾는다. 몸이 아프다거나 사업이 잘 안되었을 때 또는 입찰과 같이 돈 버는 중요한 시점에 종교를 찾는다. 한마디로 아쉬울 때 찾는 것이다. 건강 하거나 모든 것이 원활하게 잘 나가는 경우는쳐다 보지도 않다가 꼭 위기가 닥치면 찾는 것이다. 한때 IMF가 발생 하였을 때 일시적으로 신자들이 늘어 났다는 것이 이를 증명해 준다. 먹고 살만 하면 절대자에 대한 관심도 종교에 대한 귀의도 상대적으로 줄어 든다. 종교신자가 늘어 나려면 위기상황이 닥쳐야 한다는 딜레마도 성립하는 것이다.

 

위기상황이 닥치면 가장 먼저 찾는 것이 절대자일 것이다. 우리말에 "아이쿠 하느님" 하는 말이 있다. 이때의 하느님도 일종의 절대자이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여 자신들의 유일신개념으로 설명 하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아마 관세음보살을 많이 찾을 것이다. 관세음보살 보문품의 7난에 대한 설명은 기독교의 유일신에 대한 믿음 이상의 강력한 내용이다. 타종교를 믿다 개종한 법우중의 한분이 이런 내용을 발견하고 매우 흥분 했던 기억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법우는 관세음보살보문품을 여러권 사서 선물하기도 하였다. 언제 어디서나 보라는 것이었다. 개종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도 절대자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던 것일까.

 

유일신교로 개종 하는 경우

 

사람들은 위기에 처하면 절대자를 찾고 기도를 한다. 이때 기도는 비는 행위를 말한다. 크리스찬이라면 자신의 유일신에게 소원을 들어 달라고 말할 것이다. 창조주이고 전지전능한 절대자이기 때문에 모든 소원을 들어 줄 것이라고 확신 하는 것이다. 때로는 큰소리로 외치기도 하고 어린아이가 응석을 하듯이 울부짖기도 한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행위가 당연 하다고 말한다. 마치 떼를 쓰는 것과 같은 기도는 절대자를 아버지로 보기 때문에 가능 하다는 것이다.

 

불자들 중에도 이처럼 기도를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이 마치 절대자라도 되는 듯이 매달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 저곳 유명 기도처를 전전 하거나 영험있는 곳을 찾아 다니기도 한다. 기도발이 잘 듣는 기도처가 있다느니 산신을 보았다느니 하는 영험담을 이야기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데로 너무 빠져 드는 사람들은 나중에 유일신교로 개종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을 일종의 절대자로 생각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기도라는 말 대신에 발원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기도와 발원의 차이는 수동적이냐 능동적이냐에 차이가 있다.

 

무상함을 깨닫게 되었을 때

 

세상에는 죽지 못해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행복에 겨워서 사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아무 의미 없이 흘러가는 대로 무덤덤 하게 사는 사람도 있다. 모두들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면서 그 세계에 갖혀서 사는 것이다. 그 밖의 세계에 대해서는 좀처럼 알아 보려고 하지 않고 매일 매일을 먹고 머시고 싸면서 사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쉬울 때 절대자을 찾고 기도 한다. 상황이 조금만 호전 되어도 금새 어려웠었던 일은 잊어 버리고 무관심 하게 된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 떨어 졌을 때야 절절히 무상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어느 것 하나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것이 없다고 깨달았을 때 모든 것이 집착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불교에서는 이런 무상함을 항상 이야기 한다. 영원한 것을 추구 하지만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복을 많이 지어서 천상에 태어 날 지라도 영원히 천상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번 천상이면 영원한 천상이고 한번 지옥이면 영원한 지옥이이라는 논리는 성립 하지는 않는 것이다. 천상에 태어나서 온갖 즐거움을 만끽하면 지낼지라도 즐거움에 취하여 새로운 복을 짖지 않는다면 복이 다 되어서 내려 와야 한다는 것이다. 지옥도 영원한 지옥은 없다. 과보가 다하면 지옥고도 벗어 날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영원한 천상도 없고 영원한 지옥도 없음을 불교는 말하고 있다. 이점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원한 천국과 영원한 지옥의 개념과 대비 되는 말이다.

 

영원함을 인정 하지 않고 무상함을 주장 하기 때문에 당연히 나라는 것도 영원한 나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나의 행위에 따라 과보를 받는 것이다. 무서운 인과의 법칙이다. 그리고 존재 하는 것은 모두 고통 스럽다고 한다. 영원히 지속 될 것 같은 행복도 잠시 뿐이다. 마치 날씨가 변덕 스럽듯이 또 몸상태가 그날 그날 다르듯이 항상 즐겁고 행복한 상때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그 자체가 고통이라는 것이다. 이 것을 정리 하면 그 유명한 3법인이 된다. 즉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이다. 이세상 삼라만상은 여기에서 그 어느 것도 예외 없이 적용 되고 있다.

 

종교에도 품격이 있다

 

불교는 교리는 매우 다양하다. 모아 놓으면 84천가지나 된다고 한다. 사람들의 근기에 따라 설명 하다 보니 이렇게 많아 지게 되었다고 한다. 근기가 낮은 사람들에게는 관세음보살보문품의 내용에 나오는 것과 같이 7난에 대한 방편이 더 먹혀 들어 가기도 하고 좀 더 수승한 사람들에게는 참선과 같이 정신집중 방법이 더 나을 것이다.

 

만일 겉 무늬는 불교인데 안으로 들어 가 보았을 때 절대자에게 비는 행위를 하는 기복이라면 이미 불교가 아닌 것이다. 무당집이나 점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관세음보살을 염하지만 하나의 절대자의 개념으로 생각 한다면 이 것도 이미 불교의 원래 모습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다만 관세음보살을 명호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청정히 하고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마음의 힘이 작용 하였을때 감응이 일어 날 것이다. 유일신교의 절대자에게 매달리는 기도와는 다른 것이다.

 

종교도 품위와 격조가 있다. 즉 품격이 있는 것이다. 절대자에게 매달리는 듯한 기도는 품격이 많이 떨어진다고 보여 진다. 특히 불자들이 그런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유일신교의 아류정도로 밖에 안 보여 진다. 이런 신행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결국은 유일신교로 개종 한다고 하였다.

 

불교의 품격은 3법인에 있다

 

불교의 품격은 역시 3법인에 있다. 3법인이야 말로 모든 종교를 아우르는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이라 볼 수 있다. 이세상 그 어느 것도 이 법칙에서 벗어 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현대과학 중의 하나인 '엔트로피 법칙'과도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이렇게 3법인은 불교의 품격을 유지 해 주고 있다. 3법인은 불교의 뿌리이고 근간이다. 그런데 겉 모양은 불교이지만 3법인을 이야기 하지 않으면 불교라 볼 수 있을까.

 

불교인가 아닌가 하는 판단은 바로 3법인을 말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이것이 원래 부터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이고 하신 말씀이다. 가장 초기로 가까이 다가 섰을 때 만이 불교의 품격이 높아 질 것이다. 복이나 빌고 부처님과 보살을 하나의 절대자 정도로 생각하여 빈다면 기독교의 아류 정도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3법인이야 말로 불교를 불교답게 만드는 품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처님 당시와 같은 상황으로 돌아 가는 것이 자장 바람직할 것이다. 근본불교에 대한 관심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2008-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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