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행고성(行苦性)과 엔트로피법칙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담마다사 이병욱 2008. 10. 20. 12:10

 

행고성(行苦性)과 엔트로피법칙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삿베 삿다 바완뚜 수키땃따" 우리말로는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이다. 이 말은 불교방송에서 들은 말이다. 미얀마에서 남방불교와 위빠사나를 공부 하고 온 재성교수의 경전공부시간에 들을 수 있었다. 본방송에 들어 가기전에 주문처럼 3번 독송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발음하기도 힘든 팔리어중에 '수키땃따' 만 유일하게 기억이 남아 있다. 그 것을 실마리삼아 인터넷을 찾아 보니 문장 전체를 알게 되었다.

 

 

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삿베 삿다 바완뚜 수키땃따)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모든 존재' 이다. 모든 인간만이 행복하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태란습화 사생만을 한정 짖는 것도 아닌 느낌이다. 모든 존재라고 하는 것을 보아 유정중생 뿐만 아니라 무정중생도 포함 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산천초목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 우주 삼라만상 모든 것을 모든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난해한 행고성(行苦性)과 능작인

 

불교는 고통을 자각 하고 고통을 소멸하는 종교이다. 부처님은 고통의 자각이야 말로 깨달음의 길로 가는 것이고 또 괴로움을 알면 열반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고통의 원인을 3가지로 설명 하였다. 첫째가 고고성(苦苦性)이고 둘째가 괴고성(壞苦性)이고 셋째가 행고성(行苦性)이라 하였다. 이중 고고성과 괴고성은 이해 하기 쉽다. 육체적 고통을 느끼는 것이 고고성이고 정신적인 고통을 느끼는 것이 괴고성으로 이해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고성은 매우 난해 하고 내용 또한 심오 하다. 이런 난해한 내용중에 능작인이라는 것이 있다. 불교적으로 볼 때 우주의 만물은 서로 되어 있고 서로 도와 주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아무 관계도 없을 것 같은데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서로 방해 받지 않는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주는 긴밀하게 연결 되어 있고 어느 것 하나 관계 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지워진 상태에서 무상하게 변하는 전체성을 행고성이라 하고 괴로운 것이라 하였다.

 

미국의 어느 마을에 있는 촌노하고 나하고는 분명 알지 못하는 사이이다. 이름도 모르고 본적도 없는 사이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존재 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서로 연결 되어 있다는 것이다. 내가 화를 내건 웃건 그 사람의 일상에 당장 영향을 주지 않는다. 지구를 떠나 어느 별에 사는 존재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나의 행동 하나가 우주의 변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도대체 엔트로피 법칙은 무었인가

 

엔트로피법칙이 있다. 물리를 배웠다면 누구나 알고 있는 법칙이다. 다른 말로는 열역학 제2법칙이다. 열역학 제2법칙의 별칭이 엔트로피 법칙이다. 열역학 제1법칙에서 닫힌 계에서 에너지의 총화는 똑 같다고 하였다. 그 상태에서 질서에 무질서로 이동 하는 것이 열역학 제2법칙이다. 가장 큰 실례로 드는 것이 비이커에 물을 집어 넣고 잉크 방울을 떨어 뜨리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 수록 잉크방울은 확산 되어서 본래의 잉크를 찾아 볼 수 없게 된다. 즉 질서에서 무질서로 변하는 것이다. 무질서가 극에 달하면 열평형상태에 도달했다고 말한다. 또 무질서로 변하면 질서로 환원 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 이것을 비가역성이라 한다.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르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비단 이런 현상은 잉크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뜻한 밥공기가 있는데 내버려 두면 식어 진다. 따뜻한 채로 유지 되어 있지 않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식어 지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누구도 막지 못하는 자연의  근본법칙이다. 마찬가지로 태양이 있다. 언젠가는 다 타서 불이 꺼질 때가 있을 것이다. 불이 꺼졌을 때 열평형 상태에 이르렀다고 하고 열죽음이라 부른다. 우주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은 계속 폭발중이지만 언젠가는 폭발을 멈추고 식어 갈 것이다. 식어 간다는 것은 엔트로피의 증대를 의미한다.

 

도처에서 엔트로피의 증대를 목격한다. 다리를 놓고 터널을 뚫으려면 자동차와 기계장비가 움직이여야 한다. 그 것을 움직이려면 석유와 같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가용 자원을 사용 한다는 것은 고갈 되어 감을 의미 하고 다시는 복원이 되지 않음을 의미 한다. 허공으로 날아 가 버리는 것이다. 결국은 지구라는 한정된 자원을 깍아 먹고 인류가 생존해 나가는 것이다. 제 살 깎아 먹고 살아 간다고 할까 언젠가는 자원은 바닥 날 것이다. 일회용 종이 컵을 만드는데도 돈과 에너지가 들어 간다. 들어간 에너지는 더 이상 복구 되지 않고 흩어져 버린다. 쓸 수 없는 무질서 상태로 되어 버리는 것이다. 자동차에 기름을 넣고 다니다 보면 사라지는 것과 같다. 다시는 복구가 되지 않는 것이다. 편하게 살기 위하여 만들어진 모든 전자제품과 자동차 심지어는 일회용 제품들도 엔트로피 증대에 한 몫을 하고 있다. 결국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엔트로피 증대를 초래 한다는 것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유유자적하게 놀고 있는 물고기와 나와는 지금 당장은 상관 관계가 없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한 행위가 충분히 영향을 주고 받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서로 관계가 있다는 말이다. 내가 한 행동이 엔트로피증대에 기여 한다면 같이 존재 하는 한 영향을 주는 원인을 제공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엔트로피법칙은 피 할 수 없는가

 

엔트로피법칙은 비가역성이다. 절대로 거꾸로 흐르지 않는 것이다. 단 하나 예외가 있다. 생명이다. 시간이 지날 수록 질서에서 무질서로 가는 것이 엔트로피법칙의 특징인데 거꾸로 시간이 지날 수록 질서가 잡혀 나가는 것이 바로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명도 일시적이라는 것이다. 늙어서 죽게 되면 분해가 되고 흩어져 버린다. 엔트로피 법칙을 벗어 날 수 없는 것이다. 도시도 마찬가지이다. 도로를 만들고 교통신호체계를 만들어 질서가 유지 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질서있게 앞으로 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런 질서를 유지 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에너지를 소비 해야 한다. 질서를 유지 한 만큼 그 만큼 댓가를 치루어야 하는 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관리 하지 않으면 교통체계는 엉망이 되오 버리고 무질서 그자체가 되어 버린다. 무질서로 가려고 하는 현상이 본질이고 이 것이 바로 엔트로피의 속성이라 볼 수 있다. 멀쩡 하던 기업도 관리를 하지 않으면 도산의 길로 가게 되고 몸관리를 하지 않고 막행막식한다면 망가지는 원리와 같다.

 

새만금 방조제가 있다. 끝이 안보일 정도로 바닷물을 막아 땅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여기에 투입된 돈은 천문학적이다. 지금에 와서 이 땅을 어떻게 활용 할 것인가를 고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한번 훼손된 땅은 복구 하기 어렵다. 방조제를 만들기 위해서 들어간 장비와 인력 그리고 시간을 따진다면 국민총생산의 향상에 기여 하였음에 틀림 없다. 트럭이 움직이게 되면 연료을 소모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주유소는 매출이 올라 가게 되고 정유회사도 돈을 벌게 될 것이다. 방조제 작업을 하게 됨에 따라 주변에 수 많은 사람에게 일자를 또한 제공 하게 될 것이다. 땅만 파고 덥는 다고 해도 국민총생산은 올라가게 되어 있다. 대운하를 파자고 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 따른 엔트로피 증대는 피 할 수 없다. 쓸데 없는 방조제를 만들고 대운하를 파는 행위가 반대편에 사는 나라의 농부와 물고기에게 아무 관련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엔트로피 증대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분명히 영향을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이 핵시설을 만들고 핵실험을 하는 것에 대하여 민감하게 여기는 것도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핵실험과 같이 커다람 사건은 지구촌에 사는 모든 존재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만 나의 작은 행위 하나는 그 영향이 매우 미미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우주전체의 엔트로피증대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은 피 할 수 없다.

 

부처님도 엔트로피법칙을 알고 있었다?

 

엔트로피증대는 변화함을 의미 한다. 질서에서 무질서로 변화 하는 것이다. 우주에 있는 모든 존재는 이런 엔트로피 증대에 매일 매일 기여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엔트로피가 증대 하고 함으로써 또한 시간을 인식 할 수 있다. 엔트로피의 변화가 없다면 즉 열평형 상태에 이르렀다면 즉 움직임이 없다면 더이상 시간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흔히 말하는 시간이 흐른다는 말은 엄밀히 말한다면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엔트로피가 증대 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시간자체가 흐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주는 매일 매일 무상 하게 변하고 있다. 단 하루도 변하지 않은 날이 없다. 무상하게 변하는 우주속에서 모든 존재는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고 받고 있다는 것이다. 즉 우주는 긴밀하게 연결 되어 있어서 어느 것 하나 관계 되어 지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나의 행위는 분명히 우주의 엔트로피 증대에 기여 하고 있고 그 결과 우주가 더 빨리 망하게 가는 길로 가게 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행동 여하에 따라 그 엔트로피 증대를 억제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우주에 있는 모든존재들 즉 인간을 포함한 삼라만상이 나와 관련 되어 있다면 엔트로피를 증대 하는 일을 함부로 하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은 우주만물이 어떤 상관관계 속에서 여러가지 다양한 조건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도 괴로운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괴로움을 행고성이라고 하였다. 거시적인 의미에서 우주만물의 변화 하는 모습도 무상한 것으로 보고 고통이라고 하였다. 더구나 그 변화가 비가역적으로 일직선상으로 엔트로피가 증대 되는 방향으로 갔을 때는 우주의 종말을 피 하기 어렵다. 부처님 당시에 엔트로피법칙을 과학적으로 규명하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주적 차원에서 서로 관계되어진 일체가 무상하고 변해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연민으로 바라 보았다면 현대에서 말하는 엔트로피법칙을 정확하게 인식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엔트로피를 감소 하는 방법은 없을까

 

물질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엔트로피증가로 인한 우주의 종말은 피 할 수 없다. 엔트로피의 증대로 인한 무질서가 확산 되었을 때 거기에는 어떤 흐름도 있을 수 없다. 흐름이 정지 되었다는 것은 시간이 멈추었다는 말과 같다. 이러 현상을 인식 하는 것도 고통스런운 것이라 볼 수 있다. 넓은 의미에서 보았을 때 행고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없을까. 불교에서는 고통을 없애는 길을 열반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즉 부처님이 설하신 4성제이다. 첫번째가 괴롭다는 진리를 깨닫고 두번째는 괴로움의 원인을 알아서 없애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는 열반으로 향하는 길을 제시 하였다. 전재성 박사의 글을 보면 엔트로피를 감소 하는 것도 열반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런 길이야말로 참답게 생명현상을 극대화 하는 길 이라고 말하였다.

 

행고성과 엔트로피법칙과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내가 한 행동 하나 하나가 우주의 질서를 무너 뜨리는 방향으로 가고 있고 우주안에 있는 모든 존재에게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우주 존재가 동시에 행위를 하고 있다면 우주의 질서에 더욱 더 영향을 주고 있을 것이다. 그 행위가 물질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는 엔트로피증대를 기여 하고 있음에 틀림 없다. 엔트로피를 멈추게 할 수는 없다. 다만 감소 시킬수 는 있다. 엔트로피를 감소 시키기 위한 불교적인 해법으로서 사성제를 들었지만 마음에 와 닿는 구체적인 실천방법을 제시한 경전이 있다. 바로 그 것이 자비경이다. 전재성박사의 글에서 보는 자비경의 근본 사상은 아래와 같다.

 

 

첫째로 전 우주적인 자비심을 ‘anadhiso pharana'라고 하여 무한편만(無限遍滿)의 자비이다.

둘째로 한정편만(限定遍滿)의 자비로 한정적인 어떤 것이 행복하길,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세번째로‘dhiso pharana'로 방향편만(方向遍滿)이라 한다. 이것은 특정한 어떤 방향을 정한 다음에 기도하는 것으로 동서남북이 있다.

 

 

자비경에서는 우주적인 자비심을 말하고 있다. 즉 우주와 나가 무한대로 연결 되어 있기 때문에 자비심 역시 온 우주에 무한히 가득차게 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한정적인 어떤 것이 행복해지고 잘 되기를 비는 것이다. 특징은 주변서 부터 시작해서 우주로 확대 해 나감을 볼 수 있다. 자비경의 기도의 특징은 우주의 모든 존재가 잘 되기를 기도 해야 된다는 것이다. 자신이 바라는 목적이 우주가 잘 되기 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자비경은 우주의 모든 존재가 잘 되어 지고 행복해지기를 기원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자비경이 알져진 것은 오래 되지 않는다. 남방불교가 본격적으로 소개 된 80년대 이후라 볼 것이다. 그 동안 소승으로만 알고 있었고 폄하 되었던 남방경전에서 환경문제와 같은 인류의 근원적인 고민을 풀 어 줄수 있는 해답이 들어 있는 것이다. 불교방송에서 들었던 모든 존재에 대한 팔리어 기도문이 바로 자비경의 한 구절일 것이다.

 

 

 

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삿베 삿다 바완뚜 수키땃따)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삿베 삿다 바완뚜 수키땃따)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삿베 삿다 바완뚜 수키땃따)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2008-10-2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