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엔트로피를 감소를 위한 불교적 해법

담마다사 이병욱 2008. 10. 18. 09:55

 

 

엔트로피를 감소를 위한 불교적 해법

 

 

 -전재성박사의 '불교와 환경문제'를 읽고-

 

 

"반야심경을 접하고 출가를 결심 하였다" 어느 스님의 말이다. 불과 260여자에 지나지 않은 반여심경에 매료 되어서 결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편의 글이나 책 또는 이야기가 인생의 방향을 결정 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인류역사 이래 수많은 사상가가 나타나고 종교천재들이 나타나서 존재의 근원에 대하여 고민 하였다. 그 결과물로서 책으로 또는 경전으로 남게 되어 후세에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 왔다. 그러나 똑 부러지게 이것이다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어렵고 난해한 것은 사실이다. 읽어도 무슨 뜻인지도 모를 뿐더러 가슴을 적시는 감동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 만한 수준이 안되고 경지에 올라 가지 못해서 이해 하지 못한 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말이라도 이해하기 쉽게 누구나 수긍이 갈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일종의 실력이라 볼 수 있다. 그런 글중에 하나가 전재성박사의 글이다. 인터넷상으로 접한 그의 글을 읽으면 구구절절히 부처님의 뜻을 직접전달 받는 느낌이다. 그리고 많은 것을 생각케 하고 다시 한번 부처님의 위대함을 느끼게 되고 불자로서 자부심을 한껏 고양 시켜 주고 있다.

 

다음글은 전재성박사의 '불교와 환경문제(http://blog.daum.net/bolee591/15976381)'를 읽고 되새기고 싶은 구절을 나열해 보았다. 마치 격언이나 명언집을 읽는 것 같이 메모 형식으로 나열한 것이다.

 

 

 

 

 

 

불교의 교리에 의하면 모든 것은 ‘고()’라고 했는데 이 모든 것이라는 것은 교리상 세 가지가 있다.

 

고고성(苦苦性)’이라고 하며 직접 느끼는 괴로움으로 돌맹이를 맞았다든지, 길거리에서 넘어졌다든지 할 때 우리는 괴로움을 직접 느낀다

 

괴고성(壞苦性)’인데 괴()자는 무너질 괴자로 이는 다른 여러 가지 사물들이 변해가고 죽고 하는 데서 느끼는 괴로움. 사랑하는 여동생의 죽음을 보고 괴로워하는 것이 괴고성

 

가장 범위가 넓은 ‘행고성(行苦性 ). 행고성은 우주 만물, 즉 모든 창조되는 것 또는 모든 조건 지어지는 것, 연기되는 것 말하자면 어떤 상관관계 속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조건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이 괴롭다는 뜻으로 행고성.

 

아비달마의 이론에는 이런 것이 있다. 어떤 사물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능작인(能作因)이라는 것이 하나 있는데 이 능작인이라는 것은 이를테면 지금 여기서 이야기를 하는데 저 남극의 바다에 있는 고래나 상어와 나는 사실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 볼 때 능작인이란 적어도 남극의 고래나 상어가 방해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있고, 또 내가 그들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도움의 관계에 있다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불교적으로 볼 때 우주의 만물은 서로 조화되어 있고 서로가 도와주는 관계에 있다. , 모든 인과관계 속에는 능작인이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 데도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전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은 최소한 그 사물이 성립하기 위해서 방해하지 않는 원인을 제공한다. 방해하지 않는 도움을 준 것이다. 그래서 우주 전체는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어느 것 하나도 서로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 이 조건 지워져 무상하게 변하는 이러한 전체를 부처님은 행고성(行苦性)의 세계라 하여 괴롭다고 설명

 


괴로움이라는 것은 세계를 향해서 열리는 순간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괴로움이 있어야 비로소 무상함을 느끼고 만물이 서로 연관지어져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는 순간으로 부처님께서는 괴롭다는 것의 거룩한 진리를 인식하는 순간에 바로 열반에 이른다.

 

 

 

부처님께서는 세 가지 괴로움을 알면 열반을 본다고 하셨다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세상은 결국 망하게 되어 있다. 우주는 망하고 생성되게 되어 있는 것이 불교적인 우주관.

 

우주의 생성과 멸망의 관계는 비단 그러한 큰 주기로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순간의 모든 물질과 정신현상이 반복. 그러한 것을 ‘찰나멸(刹那滅). 찰나찰나에 모든 물질들은 생겼다가 유지되었다가 사라지게 된다. 찰나의 생성소멸이 연기적인 관계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결국은 혼란도의 증가.

 

두카라는 말은 결국은 혼란도라는 말과 같다. 우주는 혼돈의 상태이고 괴로움의 상태.

 

혼란이나 괴로움이라는 것은 물질적, 정신적인 것을 철저히 파악할 때만이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괴로움을 인식하는 자만이 열반을 볼 수 있다.

 

 

 

열반이라는 말은 유일하게 과국에 직면하고 있는 환경문제를, 인류의 정신의 문제를 구제할 수 있는 희망적인 단어.

 

열반이라는 것은 불꽃이 꺼진 상태를 말하고 괴로움의 상태는 불꽃이 타고 있는 상태와 같으니 부처님은 세계는 불타고 있다고 했다. 번뇌가 불타는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 자체가 타고 있는 현상이고 생명자체 현상을 대변. 세상이 탄다는 것은 연기가 있는 불꽃을 말하고 있으며 번뇌와 엔트로피의 증가

 

 

 

우리 자신이 생명체라 알고 있는 것은 참다운 생명체가 아닐 수도 있다. 그래서 폭류처럼 흘러가는 물질현상과 마찬가지로 정신현상도 동시에 폭류처럼 흐르고 무상하고 변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가 개별적으로는 참된 자아라 할 수 없으며 무아라고 한다.

 

 

 

편안하기 위해서 다양한 욕구들을 채우기 위해서 여러 가지 물건들을 만들어내고 생산할수록 실제로 그것은 엔트로피를 증가시키고 거기에 따르는 정신현상을 복잡하게 만듦으로 엔트로피의 기하급수적인 증가를 가져와서 결국은 지구의 멸망을 초래. 유일한 방법은 괴로움을 없애는 길, 즉 혼란을 없애는 길로 가는 것. 괴로움을 없애는 길은 부처님이 명시하신 사성제에 있다. 모든 것이 괴롭다라는 첫 번째의 진리를 깨닫고 두 번째는 괴로움의 원인이 있으며 그것을 알아서 없애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엔트로피를 감소하는 것으로 그것은 열반으로 향하는 길이며 이 길이야말로 참다운 생명현상을 극대화시키는 길.

 

 

 

참선을 하고 정신적인 안정을 기했던 사람들은 많은 소유물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환경파괴를 하지 않는다.

 

 

 

 

<자비경>을 분석하면 나타나는데 불교는 매우 합리적인 종교.

 

첫째로 전 우주적인 자비심을 ‘anadhiso pharana'라고 하여 무한편만(無限遍滿)의 자비

전 우주와 무한대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괴로움에 대한 인식 후에 무한편만의 자비 - (자비의 마음이 전 우주로 편만하게 가득 차는 것을 말함) -

 

한정편만(限定遍滿)의 자비로 한정적인 어떤 것이 행복하길,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것은 인식의 전환이며 엔트로피를 감소시키는 열반으로 가는 길

 

마지막은 ‘dhiso pharana'방향편만(方向遍滿)이라 한다. 이것은 특정한 어떤 방향을 정한 다음에 기도하기도하는 것으로 동서남북

 

기도를 할 때에도 공해문제만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전 우주의 모든 존재가 잘 되기를 먼저 기도.

어떤 특정한 목적은 전우주가 잘 되기 전에는 그 목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주는 혼란의 경지로 가고 있는데 그 혼란이 감소하는 상태의 길이 있다는 것을 체득하고 그 길로 가는 사람만이 참사람.

 

 

깨달음은 특별한 경지가 있다기 보다는 우주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올바로 이해하고 있다면 그것이 깨달음이다.

 

괴로움의 시작인 인간의 욕심을 버리는 것.

의욕은 깨달음을 향한 의욕이라든지 우주의 실상을 알고자 하는 의욕은 아주 높이 사야 한다.

 

 

괴로움이라는 것도 양적인 측면과 질적인 측면이 있는데 우리가 웬만큼 괴로워 가지고는 괴로움이라는 게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많은 체험을 통해서 뼈저린 고통을 얻을 때만이 우주가 괴롭다는 것에 대해서 미미한 것이나마 알 수 있다

 

“이 수많은 중생들이 과거에 눈물을 흘렸고 또 지금도 눈물을 흘리고 있으니 그 눈물이 이 강물보다도 많고 저 오대양의 바다보다도 많구나”

 

부처님께서 파악하시는 괴로움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괴로움.

부처님이 실제로 모든 것을 버리고 행동했던 것도 이 많은 중생들의 눈물을 닦아주시기 위해서.

 

 

본질이 없다는 것은 그 속에 영원불변하는 한정된 어떤 실체가 숨어 있지 않다.

 

우리의 자아는 ‘나’라고 하는 영원불변하는 것이 우리의 몸속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무한한 우주 속에 열려있는 자아인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영혼이라는 것은 불꽃과 같아서 나무장작을 지펴야 불꽃이 생기는 것과 같이 이 불꽃은 장작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가 생각하는 실체니 하는 것이 있다고 보는 것도 지금 불꽃이 타고 있기 때문이다

 

윤회를 하게 되면 �불에 있는 불꽃을 옮기는 것과 같다

 

오늘 내가 먹는 음식이 어제 먹은 음식과 다르듯이 우리 몸의 구성성분도 하나하나 다르다고 볼 수 있으며 변해서 다른 사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일성의 법칙에 의해서 하나라고 보는 것뿐

 

 

모든 상황이 어제와 오늘이 다르듯이 변하지 않는 본질이라는 것은 없다. 얼마든지 물이 될 수 있으며 땅의 공동체는 물의 공동체가 될 수 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든지 병이 있다든지 등의 관계성이 분명히 있어 그 관계성에 의한 괴로움이지 독자적인 괴로움은 없다. 그 관계성이라는 것을 서양철학에서는 사건이라고 하며 그 사건만이 실제하는 것. 관계성을 일으키게 하는 힘을 불교에서는 . 궁극적으로 업은 의도에서 생기는 것

 

 

불교에서는 괴로움은 있어도 괴로워하는 자는 없다.

괴로움이라는 것은 그 순간으로 끝나며 그것으로 족하고 없어져 버리는데 자꾸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괴로운 것

 

 

 

참선을 하는 사람들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실질적으로 환경파괴를 하지 않는다

 

지금 일본에는 청빈사상이 강조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렇다할 만한 운동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

사회 전반적으로 청빈운동이 일어나야만 그것이 결국은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되고, 엔트로피의 증가를 막는 길.

 

 

우주를 총체적으로 관찰하고 파악하는 방법은 결국 탐욕과 분노를 없애고 마음을 고요히 하고 언어를 떠나 무한자로서 모든것을 파악할 때 비로소 진정한 자비와 사랑도 가능한 것이고 진정한 환경운동.(전재성 박사의 불교와 환경문제에서)

 

 

 

 

2008-10-1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