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행고성(行苦性), 이 세상은 서로 연결 되어

담마다사 이병욱 2008. 10. 22. 10:15

 

 

행고성(行苦性), 이 세상은 서로 연결 되어 

 

 

 

 

묻지마 살인. 이 말은 이제 새로운 말은 아니다. 매번 벌어지고 있는 살인 현장에서 심심치 않게 나오는 말이기 때문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살인을 하고 또한 영문도 모르는 채 죽어 가는 것이다. 인간의 목숨이 고귀 하다고 하고 생명은 존엄 하다고 하지만 묻지마 살인 앞에서는 고상한 단어는 의미가 없어 보인다.

 

언론과 매스콤에서 엽기적인 살인을 보도 해도 사람들은 대체로 무덤덤 하다. 나하고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서 일 것이다. 만일 내자식이 내 부모가 내형제가 그런 일을 당했다면 모를까 그런 일이 있었나 보다 하는 정도의 관심 밖에 보이지 않는다. 만일 자신의 일처럼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매우 특별한 사람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뼈저린 고통과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슬픔

 

사람들은 살아 가면서 즐겁고 행복한 날보다 괴롭고 고통스러운 날을 더 많이 보낸다. 그래서 예로 부터 '고해(苦海)'라고 하였다. 기본적으로 삶은 고통이고 그 과정에서 어쩌다가 즐겁거나 행복한 기분을 잠시적으로 맛 볼 뿐이다. 즐겁고 행복한 기분이 언제까지나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 다는 것이다. 다시 현실로 되돌아 오면 산더미처럼 해결 해야 될 짐이 쌓여 있는 것이다. 고통은 기본적으로 불편한 것이다. 그 불편한 정도에 따라 고통의 질도 달라 진다. 고통중에서도 가장 심한 고통은 무엇일까. 육체적으로는 아마 뼈저린 고통일 것이다. 실제로 다리에 골절상을 입어 뼈에 금이 갔을 때 그런 고통을 말하는 것이다. 뼈저린 고통이 육체적인 고통의 절정이라면 정신적인 고통의 절정은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픈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비록 육체적인 고통은 못 느낄지라도 그 아픔은 어쩌면 육체적 고통 보다 더 했으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식이 죽었다든가 또는 잘못 되었을 때 느끼는 고통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도 자식과 부모 또는 형제까지가 한계 일 것이다. 사촌정도만 되도 남의 일 같이 느껴 지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뼈저린 고통은 직접적으로 겪는 육체적인 고통이고 가슴이 찢어지도록 슬픈 고통은 정신적인 고통이다. 보통 육체적인 고통을 고고성(苦苦性)이라 하고 정신적인 고통을 괴고성(壞苦性)이라고 한다. 고고성은 고통 그 자체를 말하고 누구나 아프면 겪는 고통을 말한다. 괴고성은 일종의 간접적인 고통으로서 육체적인 고통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슬픔과 회환 같은 괴로운 상태를 말한다. 남의 고통을 바라 보고 있을 때 함께 느끼는 고통 같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부처님은 한가지가 더 있다고 하였다. 바로 행고성(行苦性)이라는 것이다.

 

이세상은 서로 연결 되어 있다는데

 

고고성과 같은 육체적인 고통은 오로지 나에게만 한정 되는 고통이다. 나를 떠나 범위를 조금 넓힌 다면 가족과 친지 또는 잘아는 사람이 잘 못 되었을 때도 괴고성과 같은 고통을 느낀다. 그렇다면 이 범위를 넘어서도 고통을 느끼는 것일까. 묻지마 살인이 나서 전혀 모르는 사람이 죽었다거나 교통사고가 나서 많은 사람이 희생 되었을 때 깊은 슬픔은 아니지만 동정이나 연민의 감정은 느낀다. 이렇게 범위가 넓은 고통이 바로 행고성이라 볼 수 있다. 범위를 더 넓혀서 지구 반대편에서 비행기 사고로 전원이 사망 했다든가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면 그 연민이나 동정은 훨씬 더 약해 질 것이다. 더욱 더 범위를 넓혀서 우주 차원에 까지 간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순간 순간 찰나 찰나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한 사실일 것이다.

 

묻지마 살인으로 희생된 사람하고 나하고는 전혀 아는 사이가 아니다. 따라서 전혀 관련이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동정심과 연민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왜 그럴까. 만일 부자로서 잘 먹고 잘살다가 천수를 누리고 행복한 삶을 살다가 갔다면 감정은 덜 할 것이다. 그러나 최악의 환경에서 살아 보겠다고 발버둥 치다가 억울하게 당했다는 사실이 안타까운 것이다. 가해자에 대한 분노의 마음과 피해자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서로가 마음을 공유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같은 공간에 서로 함께 존재 하기 때문에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만일 이 세상에 살아 있지 않아서 함께 존재 하지 않는 다면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세상이 서로 연결 되어 있다고 한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을 전혀 모를지라도 서로 영향을 주고 받고 있다고 본다. 다만 그 것이 직접적인 영향은 아니고 소극적인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범위를 확대 해 보면 이 우주 어딘가의 생명체와도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방해 받지 않는 도움을 주고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조건 지워져서 무상하게 변하는 전체를 행고성이라 하고 이 것도 괴로운 것 중의 하나라고 하였다.

 

꿈을 깨고 나면

 

이 세상이 하나로 연결 되어 있어서 서로 방해 받지 않은 도움을 주고 받으며 영향을 끼치고 있다면 하나의 정신체로 보아도 될 것이다. 실제로 대승기신론에서는 이 세상을 한마음으로 보고 있다. 단지 한마음을 어떻게 내느냐에 따라 부처의 세계로 가느냐 중생의 세계로 가느냐로 갈라 진다는 것이다. 그런 한마음에 대한 설명으로서 자경교수의 꿈의 비유가 인상적이다. 꿈을 꾸면 꿈속의 나와 꿈 꾸는 나가 있다. 여기서 꿈꾸는 나와 꿈속의 나는 다르다는 것이다. 꿈속의 나는 꿈속에서 객관적인 대상과 분리 되어 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알고 보면 꿈꾸는 나가 꿈속의 나와 꿈속의 모든 대상을 만들어 낸 다는 사실이다. 꿈을 깨고 나면 확연히 알 수 있는 사항이다.

 

사람들은 의식을 하면서 살고 있다. 의식 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관과 객관이 분리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즉 나가 있고 상대방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의식세계를 떠나 무의식세계로 들어 가면 주관과 객관은 사라 질 것이다. 오로지 한몸체이고 한마음이고 하나의 정신일 것이라는 것이다. 마치 꿈속의 나와 꿈꾸는 나와 같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묻지마 살인을 한 가해자는 꿈속에서 살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꿈을 깨고 나면 다 꿈꾸는 나가 만든 세상이었다는 것을 모르고서 한 행동일 것이다. 

 

 

 

2008-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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