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위빠사나수행기5] 즉문즉설 (卽問卽說)같은 인터뷰시간

담마다사 이병욱 2009. 2. 1. 11:04

 

[위빠사나수행기5] 즉문즉설(卽問卽說)같은 인터뷰시간

 

 

우리나라에서 여성신도를 부를 때 '보살'이라고 부른다. 남자신도를 '거사'라고 부르는 것에 비하면 파격적인 대우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남방 상좌부 불교에서는 여성을 보살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 남방불교에서 보살의 의미는 '구도자'를 의미 한다. 즉 부처가 되기를 서원한 자를 말한다. 그래서 남방불교 스님들께 우리 식으로 여성신도를 아무개 보살이라고 소개 하면 깜짝 놀라게 되고 극진하게 예경 한다는 것이다.

 

고통을 바랐기 때문에

 

자신이 처해 있는 위치와 상황은 모두 다 자신이 만든 것이다. 심지어 지금 받고 있는 고통 또한 자신이 선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고통을 바랐기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고통을 즐기고 있다. 왜 그럴까  무지하기 때문이다. 만약 부처가 되기로 서원 하였다면 구도를 목표로 하는 보살로 태어 났을 것이다. 즉 보살로 태어 나기 전에 이미 조건이 성숙 되었다는 것이다. 죽음의식 다음에 이어지는 재생연결식에서 부처님이 될 보살의 조건을 가지고 태어 나는 것이다. 그 것은 다음의 4가지로 요약된다.

 

무탐(無貪)

무진(無瞋)

무치(無癡)

기쁨과 함께 하는 마음

평온이 함께 하는 마음

 

 

부처가 될 보살로 태어난 존재는 재생연결식에서 이미 무탐 무진 무치와 같은 세가지 선한 근기를 가진 채 태어 난다. 또한 기쁨과 함께 하는 마음은 모든 중생이 행복해지기를 간절히 바랬기 때문에 가질 수 있었고 평온이 함께 하는 마음은 지혜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가질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재생연결식은 수도 없는 전생에 위 없는 깨달음을 바라는 선행과 선업의 결과로서 얻어진 것이다.

 

업의 힘은 너무도 강렬해서

 

사람은 태어 나면 반드시 죽게끔 되어 있다. 죽기 전에 일상적으로 살아 가면서 행위를 짖는 마음이 '평소의 마음'이다. 평소의 마음이 과연 본래의 나라고 하는 마음과 같은 것일까.

 

마음이 변했다느니 변덕이 죽 끓듯 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자신의 마음을 자신도 모르는 것이다. 따라서 전에 마음 먹었던 마음이 반드시 지금의 나의 마음 같다고 볼 수 없다. 순간 순간 일어 났다 사라지는 마음은 불과 수백만분의 1초라고 한다. 더구나 죽었을 때 죽음의식 다음에 이어지는 새로운 존재로 태어 나게 될 재생연결식으로 이어지는 마음은 너무나 빨라 인식 할 수 없을 정도라 한다. 또한 죽기 전에 강렬한 표상을 보게 되고 평소의 지은 업의 힘으로 다음 생이 결정 되어 버리는 것이다. 흔히 '혼불'이라고 볼 수 있는 업의 힘은 너무도 강렬해서 마치 로케트가 발사 될 때와 같은 강력한 추진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고정관념

 

죽고 태어남의 한 사이클을 형성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과보가 전달 해 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평소의 마음---> 죽기직전의 마음----> 죽음의식(여기까지가 현생임) ---->재생연결식(여기서 부터 새로운 존재임)---->잠재의식(바왕가 찌따) 순으로 돌아 가게 된다. 이런 일련의 마음의 흐름에 의하여 업이 쌓이고 쌓여서 다음 생을 결정 하는 요인이 된다.

 

내마음은 내가 잘 알 것 같지만 사실 알고 보면 내 마음을 나도 잘 모른다. 내가 내 마음 대로 살아 가고 있는 것처럼 보여 지지만 내 마음대로 살아 가고 있다고 볼 수 없다. 그 것은 철저 하게 전의 마음의 과보로 인하여 살아 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마음의 흐름대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 마음이 이라는 것은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고정관념이라 볼 수 있다. 이미 기억 속에 만들어져 있는 관념을 꺼내 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보는 것은 바르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내가 하는 일이 옳다고 하는 확실한 믿음은 매우 위험 하다. 현상을 잘 모르고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것은 평소의 마음이 바왕가의 흐름에 좌우 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일어 나고 사라지는 데 있어서 순간적으로 17단계를 거치는 것이 바왕가의 흐름이다. 이러 마음은 잠재의식 속에 모두 기억 되어 있어서 또 다른 행위의 원인이 된다. 삶이 이어지는 한 이런 사이클은 계속 되어서 죽었을 때 재생연결식으로 이어 진다.

 

'바왕가'의 흐름

 

보살과 범부중생의 차이는 바왕가 흐름을 얼마나 있는 그대로 알아 차리는가에 의하여 결정 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수행을 하는 목적은 이와 같이 변화 하는 마음을 알아 차려서 선과보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선과보를 만들려면 관용 자애 지혜와 같은 선심을 일으켜야 한다. 반대로 탐욕 성냄 어리석음과 같은 불선과보를 짖게 되면 업의 힘에 휩쓸리게 되고 그 업력에 따라 재생연결식으로 연결 되는 과보를 받게 된다. 윤회의 고리가 계속 되는 것은 불선심이 많기 때문이다. 불선과보를 받지 않기 위하여 탐 진 치를 소멸 시켜야 한다. 그러나 탐 진 치를 끊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다만 있는 그대로 알아 챠려야 한다. 분리해서 지속적으로 알아 차리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이다. 그런 방법 중의 하나가 "그렇네"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그렇네"

 

위빠사나수행의 가장 큰 특징중의 하나는 인터뷰이다. 수행 중에 일어 났던 체험을 스승에게 말 함으로써 수행의 깊이와 정도를 지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인터뷰 중에 나오는 말 중에는 반드시 수행에 관련 된 내용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현재 마음 상태나 고민 거리도 털어 놓기 때문이다. 어느 여성수행자의 경우는 자꾸 미워 하는 사람이 보인다고 한다. 수행장에 들어 오면 싹 사라지는 데 수행장만 벗어 나면 미운 사람의 표상이 떠 올라 괴롭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은 좌선 중에도 표상이 보인다고 호소 한다. 그런 말을 듣고 법사는 말하기를 잠재의식 속에 남아 있는 표상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냥 있는 그대로 "그렇네" 하면서 알아 차리라고 말한다. 지금의 마음이 아닌 과거의 마음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과거의 기억이 지배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도 자신이 잘 모르는데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남의 마음을 바꾸려는 시도를 하지 말라고 한다. 다만 자신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 차려서 선과보를 짖는 다면 그 마음이 그 대로 상대방에게 영향을 주어서 개선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인터뷰는 마치 '즉문즉설(卽問卽說)'같다. 즉문즉설 하면 법륜스님이 떠 오른다. 이미 몇 년 전에 인터넷으로 본 바도 있다. 요즘에는 책으로도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대중교화 수단으로서 인기 있는 듯 하다. 가끔 보는 블로그 뉴스에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위빠사나 수행에서의 인터뷰 역시 즉문즉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수행 과정에서 일어난 체험이 주된 내용이지만 그 것 못지 않게 살아 가면서 부딪치는 인간적인 갈등과 고민에 대하여도 털어 놓기 때문이다. 듣다 보면 모두가 내 문제인 것처럼 느껴 질 때가 많다. 인터뷰를 듣는 것도 하나의 큰 즐거움이다.

 

 

 

                      

picture: www.farrail.net/

 

 

2009-02-0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