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위빠사나 수행기3] 수행의 나라 미얀마와 한국

담마다사 이병욱 2009. 1. 11. 12:25

 

[위빠사나 수행기3] 수행의 나라 미얀마와 한국

 

 

내생은 있는 것일까. 한 번 죽으면 끝일까. 인류 역사 이래 수 많은 사람들이 고민 한 화두이다. 불교에서는 이것에 대하여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을 까.

 

죽으면 끝일까

 

대부분의 범부 들은 자신의 몸을 매우 소중 하게 여긴다. 자신의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음 또한 자신의 것이라 생각 한다. 이것을 '유신견(有身見)'이라 한다. 유신견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각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죽으면 끝이라는 '단견(斷見)'이고 또 하나는 변하지 않는 영혼이 있어서 다른 몸으로 옮겨 간다는 '상견(常見)'이다. 단견은 유물론적인 관점이다. 따라서 영혼의 개념을 부정한다. 만일 사람들이 단견에 사로 잡혀 있다면 이세상은 큰 혼란이 일어 날 것이다. 윤리와 도덕은 무너지고 무법천지로 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얼굴이나 성격이 다르게 태어 났는지를 보면 단견은 설득력이 없다고 볼 수 있다. 얼굴이나 성격, 성향이 다른 이유는 분명히 어떤 원인에 의한 결과의 산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변치 않는 영혼이 있어서 몸을 바꾸어 존재 한다고 생각 하는 것이 상견이다. 주로 유일신교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 경우도 나가 있다는 견해에서 출발한다. 전생과 현생이 같은 마음이라면 윤회의 고리를 끊어 버릴 수 없다. 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윤회계를 배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견이나 상견과 같은 유신견을 가지게 되면 원인과 결과를 부정하게 된다. 즉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잘 못된 견해를 제거 해야만 위빠사나 수행이 가능하다.

 

왜 무아인가

 

위빠사나 수행을 왜 해야 하는가. 가장 큰 목적은 윤회계를 벗어 나서 해탈 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렇게 하려면 대상을 정확히 보아야 한다. 있는 그대로 의심하지 말고 보아야 한다. 천상과 지옥에 대한 언급은 부처님도 말씀 하셨고 '아비담마(abhidhamma)' 논장에도 나와 있다. 성인이 하신 말씀이라면 의심 없이 믿어야 한다. 성인이 거짓말을 하셨을 리 없기 때문이다. 아비담마논장 또한 경전과 달라서 있는 그대로 말한 것이다. '법에 대하여' 라는 뜻이 바로 그것을 말한다. 부처님이나 아비담마 논장에 나와 있는 말을 의심 없이 받아 들였을 때 위빠사나 수행은 가능 하다.

 

위빠사나 수행은 철저 하게 12연기를 바탕으로 한다. 12연기를 이해 한다면 윤회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고 천상과 지옥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윤회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무아를 체득 해야 한다. 몸과 마음이 내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윤회계를 벗어 날 수 없다. 마음이라는 것도 멀리서 보면 하나의 선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작은 단위로 연결 되어 있다. 그래서 내마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마음이 비물질이긴 하지만 이를 몸과 분리해서 볼 수 있는 지혜가 있다면 마음과 마음이 원인과 결과의 과보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생하고 멸하는 현상을 보는 지혜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지혜의 힘으로

 

지혜와 지식은 다르다. '지식(Knowledge)'은 교육이나 학습을 통하여 재활용 할 수 있는 정보와 기술을 말한다. 지식이 많다고 하는 것은 살아 가는 데 도움은 되지만 올 바르게 살아 가는 방법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지식과 대비 되는 말은 지혜이다. 지혜의 사전적인 의미는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사물을 정확하게 처리는 하는 정신적인 능력'이다. 그러나 불교에서의 지혜는 번뇌를 끊고 생사의 얽매임을 끊는 것이다. 지혜의 불교적 용어는 반야 즉 '프라즈나(prajuna)'이다. 반야지혜를 추구 하는 목적은 저 쪽으로 넘어 가기 위해서이다. 저쪽 세상은 깨달음의 세상이다. 산스크리트어로는 '파라미타(paramita)'이다. 여기서 '파라' 라는 말은 저쪽을 의미한다. 프라즈나의 '프라'와 파라미타의 '파라'는 동일어원으로 보인다. 따라서 지혜를 추구 하는 것은 저쪽으로 건너 가기 위한 수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지혜를 얻기 위한 수단이 위빠사나 수행이라 볼 수 있다.

 

수행은 크게 두가지가 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이다. 사마타는 집중수행이다. 정신을 집중하면 신통이 열리기도 한다. 기도를 열심히 하거나 절을 열심히 하다 보면 이미지가 보이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그런데 그런 신통은 지혜가 아니라는 것이다. 유신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삿된 길로 빠지기 쉽상이다. 미래를 본다거나 치유능력이 생겼다고 해서 교세를 확장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이런 부류라고 볼 수 있다. 대부분 당대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 하다. 이런 사교의 교주는 스승이 없다. 자신이 스승이다.  그래서 매우 탐욕적이다. 무당들이 환청이나 환시를 보는 것과 같다. 마음 집중을 해서 자신 안에 있는 정보를 꺼내어 보는 것이다. 대부분 실재 하는 것이 아닌 마음장난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사마타 수행이 번뇌를 눌러서 얻은 포장된 지식이라면 위빠사나 수행은 번뇌를 분리해서 보고 번뇌의 씨를 말려서 지혜의 힘으로 뚫어 버림을 말한다. 최종적인 목표는 피안으로 건너 가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런 지혜는 책을 통해서 머리로 이해 해서 얻어 지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수행을 통해서 체득 해야 한다.

 

수행의 나라 미얀마와 한국

 

위빠사나의 종주국은 미얀마이다. 한국에서 미얀마로 구름처럼 달려 가는 이유가 사마타수행의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지관(止觀)'수행이라고 할때 '()'는 있었지만 '()'하는 수행의 전통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는 한국사람의 급한 성격 때문이라고도 한다. 당장 뿌리를 뽑고 해결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민족성도 크다는 것이다.

 

 

 

 

사진 ;  search.daum.net/

 

 

미얀마와 한국과 같은 몽골계통이라 한다. 한국이 동아아시아 3국 중에서 가장 수행의 전통이 살아 있다면 미얀마 역시 남방불교에서 수행의 국가로 알려져 있다. 흔히 '교학의 스리랑카' '계율의 태국' '수행의 미얀마' 하는 식이다. 그런 논리를 동아시아에 적용 한다면 '교학의 일본' '계율의 중국' '수행의 한국'이 되겠다.  이렇게 볼 때 여러모로 미얀마와 한국은 수행의 전통이 있고 또한 정서도 잘 맞는 듯이 보여 진다. 중국불교에 한계를 느낀 사람들이 남방 불교를 통하여 새로운 불교의 전통을 만들어 나가는 것을 보면 확실히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생에 위빠사나 수행한 공덕으로

 

위빠사나 수행은 여러 모로 이제까지 관행적으로 여겨 왔던 사고와 방식을 해체 한다고 볼 수 있다. 수행은 스님들이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고 재가 신자들은 절수행이나 다라니수행, 기도와 같은 마음집중 수행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이런 패러다임을 깨 버린다. 환경과 조건에 구애 받지 않고 누구나 참여 할 수 있다는 것과 더구나 아득하게 멀게만 느껴 졌던 깨달음과 해탈에 대하여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 한 것이다. 더구나 대상을 분리해서 봄으로서 나의 행동 하나 하나를 관찰 하는 것은 획기적이다. 화내는 나의 모습을 보고, 미워 하는 나의 모습을 봄 으로써 나란 존재를 객관적으로 관찰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것을 응용 한다면 무궁 무진 할 것 같다. 등산을 할 때 발에 마음을 집중한다면 힘들지 않게 정상으로 올라 갈 수 있을 것이고 아플 때 아픈 곳을 본다면 아픔은 덜 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여기에 앉아 있는 것도 과거 전생에 위빠사나 수행을 한 공덕이다" 라는 선원장의 말이 가슴에 남는다.

 

 

2009-01-1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