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위빠사나 수행기4] 와선(臥禪),자면서도 수행 할 수 있을까

담마다사 이병욱 2009. 1. 19. 13:21

 

 

[위빠사나 수행기4] 와선(臥禪),자면서도 수행 할 수 있을까

 

 

무명 행 식... 노 사 로 순환 되는 12연기에서 가장 이해 하기 어려운 부분이 죽음 다음에 이어지는 식이다. 죽음은 오로지 일생 일대에 있어서 한번 뿐이다. 죽는 순간의 마지막 의식이 다음 생을 결정 하는데 이 순간은 죽음의식과 재생연결식이다. 그런데 두식은 매우 빠르게 이루어진다. 죽어서 중음신 단계을 거쳐서 49일만에 다음생이 결정 된다는 이론과 다름을 알 수 있다.

 

환생이라고 하지 않고 왜 재생이라고 하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는 순간에 '죽음의식'을 거치게 된다. 이 때 다음생이 어디가 될 것인지가 어렴풋이 나타 나게 되는데 이것은 하나의 표상 즉 이미지가 보임으로서 결정 된다. 그 이미지에 따라 입태가 되고 새로운 삶이 또 시작 된다. 이것을 '재생연결식'이라 한다. 죽는 순간에 죽음의식이 일생에 단 한번 뿐 이었듯이 재생연결식 또한 일생에 단 한 번 뿐이다. 마지막 죽음의식에 나타난 표상은 평소의 행위의 결과이다. 선업을 쌓았다면 선업에 대한 표상이 나타날 것이고 악업을 쌓았다면 악업에 대한 표상이 나타날 것이다.

 

마지막 죽음의식에서 다음 생의 재생연결식으로 식이 전이 될 때 왜 재생이라 할까. 만일 환생이라 한다면 동일한 마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교의 12연기의 이론과 맞지 않는다. 무아론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재생이라고 말하는 것은 여러가지 비유을 들어 말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불의 비유를 들 수 있다. 등불이 있다. 그런데 새로운 등불의 불꽃은 이전의 등불이 아니지만 이전의 등불과 인과적으로 무관 하지 않다. 메아리가 있다. 원래의 소리가 끝까지 전달 되는 것이 아니라 파동에 의하여 소리가 전이 된다. 마찬가지로 한 개체가 가지고 있던 식도 원인과 결과에 따른 과보가 다음생으로 전이된다. 따라서 후생이 같은 마음이라 볼 수 없고 그렇다고 다른 마음이라 볼 수 없다. 중요한 한 것은 행위에 대한 과보, 즉 식의 형태로 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영혼불멸의 의미인 환생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재생이라는 말을 쓴다.

 

죽음의식에서 표상이 왜 중요한가. 그 것은 다음 생을 결정 하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 표상에 따라 4개의 세상이 결정 된다. 4악도와 욕계, 색계, 무색계이다. 4악도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를 말한다. 이들 4악도는 공덕이 없는 행을 한 존재가 태어 나는 곳이다. 공덕이 있는 행을 한 존재는 4악도를 제외 한 나머지 세계에 태어난다. 공덕이 있는 행도 두가지가 있다. 공덕을 바라는 행을 한 존재는 인간, 색계, 무색계에 태어 나고 공덕이 있는 행을 하되 바라지 않는 행을 할 때 윤회를 끝낼 수 있다.

 

'웰다잉(Well dying)' 하려면

 

죽음은 인간이면 누구나 한번은 맞닥 뜨려야 할 일생일대에 있어서 단 한번만 일어나는 사건이다. 수행을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확연히 차이가 있다. 수행을 한 사람이라면 원인과 결과를 구별하는 지혜가 개발 되기 때문에 죽음과 수태의 본성도 잘 알게 된다. 12연기를 제대로 이해 하면 모든 의문이 풀린다. 또 무상 고 무아 와 같은 현상을 바로 볼 줄 아는 지혜, 생멸의 지혜, 소멸의 지혜등과 같이 식 단위 들이 어떻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지를 보는 것이다.

 

사람이 죽어 갈때 가급적이면 들뜨지 않게 하는 것이 좋다. 울고 불고 하는 것은 나뿐 감정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좋았던 기억을 되살려 주고 미련을 갖지 말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을 한 사람 이라면 죽음의 순간에 어떤 표상도 나타 나지 않아야 한다. 식이 다음생으로 전이 되도록 하지 않기 위함이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새롭게 태어 나지 않고 열반이 성취 되는 것이다. 죽는 순간에 마지막 죽음의식까지 일어나고 꺼지는 호흡을 보라고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한다. 이것이 가장 잘 죽는 웰다잉이 아닐까.

 

 

 

 

 

 

자면서도 수행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매일 잠을 잔다. 잠을 잔다는 것은 잠재의식으로 들어 가는 것이다. 하루가 끝나고 다음날이 이어진다는 의미로 본다면 죽음으식과 재생연결식과 매우 유사 하다. 따라서 잠들기 전에 마지막 의식 또한 꿈속의 내용을 결정 할 것이다. 잠들기 전에 일어 나고 사라지는 호흡을 관찰 한 채로 잠들다가 깨어 나서도 호흡을 관찰 한다면 죽음-재생연결식의 축소판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수행 방법중의 하나가 '와선(臥禪)'이다. 누워서 하는 수행이다. 호흡을 관찰 하면서 잠에 드는 수행이다.

 

와선은 좌선과 달리 몸이 이완 되어 있다. 가장 편안한 자세 이므로 가장 반응이 잘 일어 나는 곳은 배부위에서 일어 나는 호흡이다. 이 곳에 마음을 놓고 일어나고 사라짐을 보는 것이다. 이렇게 일어나고 사라짐을 본 채로 잠들 수 있는 연습을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잠자는 것도 일종의 죽음을 체험 하는 것이다. 매일 죽었다가 살아 나곤 하는 것이 일상이다. 만일 잠들었는데 깨어 났을 때 내일 올지 내생이 올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와선은 매우 유용한 수행 방법이라 생각 된다.

 

불교의식을 하지 않는 이유는

 

토요수행이라 그런지 멀리서 오는 사람도 많이 있다. 그 중에 전라도 광주에서 오는 사람도 있다. 아마도 그 주변에 마땅한 수행처가 없었던 모양이다. 선원장이 경주와 대구에 내려 가서 수행지도를 하지만 호남지역은 아직 까지 그런 기회가 주어 지지 않은 것 같다. 수행자중에는 어린 학생도 보이지만 특이 하게도 수녀님도 있다. 이번 회가 마무리 수행이라 한다. 인터뷰를 들어 보면 어느 정도 수행의 진척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무래도 성직자라 받아들이는 것이 빠른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불교의 12연기 까지 받아 들였는지는 의문이다. 수행 받는 사람중에는 교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서로 이야기 할 기회가 없어서 교류는 없지만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도 상당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는 타종교 신자도 있을 지 모른다. 그래서 일까 일체 불교의식이 없다. 순수하게 불교인들로 만 구성 되었다면 3배를 한다거나 3귀의와 같은 불교의식이 있을 텐데 그런 것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일반인과 타종교인에 대한 배려로 생각 된다.

 

 

 

2009-01-1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