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위빠사나 수행기2] 죽음의식 재생연결식 잠재의식

담마다사 이병욱 2009. 1. 4. 11:48

 

[위빠사나 수행기2] 죽음의식 재생연결식 잠재의식

 

 

"새해에 복 많이 지으십시오" 새해 들어 처음 시작된 강의에서 선원장의 인사 말이다. 누군가 복을 주는 자가 아직 없기 때문에 복을 지으라는 말이다.

 

수행장에 수녀님이

 

강의장은 거의 다 차 있었다. 특별한 의식이 없기 때문에 빈자리에 앉아서 들으면 그만이다. 빙 둘러 보니 수녀님 한 분이 앉아 있었다. 오늘 처음 나온 분 같다. 불교공부 하는데 왠 수녀님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였지만 무언가 배우려고 오지 않았나 싶다. 강의를 듣다 보면 신이 개입할 여지가 한치의 틈도 없는데 어떻게 받아 들일까 걱정 되기도 한다.

 

법문은 12연기에 관한 내용이다. 오늘의 주제는 "행을 원인으로 식이 일어 난다"이다. 12연기에 관한 교재가 있지만 읽는 것 만으로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강의를 잘 들어야 이해가 빠르다. 그래서 일까 선원장은 자신이 하는 강의를 녹음 한다. 나중에 잘 이해가 가지 않은 사람을 위한 배려로 여겨 진다.

 

다른 사람은 그냥 듣고만 있지만 별도의 노트를 준비해서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고 필기 하려고 노력 하였다. 필기 하다 보니 상당한 분량이다. 정리를 하려 하는데 어디서 부터 해야 될지 난감 하다. 다 쓸 수는 없고 중요하다고 되는 부분만 요점정리 하는 수 밖에 없다.

 

죽는 순간의 마지막 마음이 중요한 이유

 

행에서 식으로 넘어 갈 때 과연 어떤 마음의 변화가 있을까. 이것은 결국 죽음의 문제와도 직결 되지 않을 수 없다. 죽는 순간의 마음이 다음 생을 결정 한다는 말은 많이 들어 왔다. 그러나 왜 그런지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지 못하였으나 강의를 들으면서 어렴 풋이 알 수 있었다.

 

 

행에서 식으로 넘어 간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말한다. 사람이 죽게 되면 마지막 마음이 매우 중요하다. 그 마음은 다음과 같은 단계로 새로운 생명에 연결 된다.

 

(1)죽음의식---->(2)재생연결식---->(3)잠재의식(바왕가 찌따)

 

여기서 죽음의식은 전생에서의 마지막 마음을 말하고, 재생연결식은 새로운 생명을 받기 위한 입태하는 마음을 말하고, 잠재의식은 새로운 생명이 삶을 살아 갈때의 일반적인 마음을 말한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1번에서 2번으로 연결되는 마음이다.

 

매순간이 생일인 이유

 

새로운 생명에 연결된 마음은 전생의 나와 무관할 수도 있고 무관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전생과 금생은 같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것도 아니다. 왜 그럴까 그 것은 마음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일직선처럼 생각 되지만 알고 보면 단속 되어 있다. 끊어 졌다 이어졌다를 반복 하는 것이다. 먼저 마음이 사라지면서 과보를 남기고 살아 진다. 그 과보는 다음 마음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이런 과보를 '마음의 종자'라고 한다. 따라서 마음은 항상 있지 않고 순간적으로 존재 했다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마음은 나의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무아無我'라고 한다. 우리들이 생일 잔치를 하지만 알고 보면 매순간이 생일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죽는 순간에 어떤 마음이 일어 날까

 

사람이 죽으면 마지막 마음은 곧바로 다음 생의 마음으로 전달 된다. 그런 단계가 죽음의식-재생연결식-잠재의식을 거치는데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죽자 마자 순간적으로 다음 생으로 건너 가 버리는 것이다. 너무나 빨리 변하기 때문에 눈치챌 수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 죽는 순간의 한마음이 중요 하다는 것이다. 죽는 순간의 마음의 상태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3가지이다.

 

첫째 자신이 지은 과거의 행위에 대한 업이 나타난다. 살인과 같은 못 된 행위를 하였다면 살인하는 행위가 그대로 재현되고 보시를 많이 하여 선행을 베풀었다면 그런 행동이 나타난다. 수행자로 살았다면 수행 하는 모습이 나타 날 것이다.

 

둘째 자신이 지은 업에 대한 표상, 즉 이미지가 나타 난다. 음악가로 일생을 살았다면 악기가 나타 날 것이고, 신심이 두터운 불자로 살았다면 불상이 나타 난다. 낚시터에서 낚시로 일관 하였다면 낚시 바늘과 죽은 물고기가 나타 날 것이다.

 

셋째로 가장 중요한 다음생에 태어날 장소가 나타난다. 천상에 태어날 사람은 궁궐과 같은 천상의 모습이, 인간은 사람이 보이거나 집이 보인다. 지옥에 태어날 사람은 지옥불이 보일 것이다.

 

결국 이러한 것은 평소의 삶이 어떠 하였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런 3가지 마음 중의 하나가 죽음 직전에 그대로 투영 되어서 다음 생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몸과 마음이 사라졌지만 그 마음에 남겨진 과보가 두번째 단계인 '재생연결식'으로 전해 진다.

 

49재가 의미 없는 이유

 

재생연결식은 무엇인가. 다음 생의 마음이다. 그러나 전생의 마음은 아니다. 그렇다고 전생의 마음이 아닌 것도 아니다. 왜냐 하면 전생의 마음의 과보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생과 같은 마음이라면 새롭게 태어 났을 때 '환생' 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전생과 현생의 마음이 같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을 유일신교를 믿는 종교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따라서 무아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열반이 없기 때문에 계속 윤회해야 하는 것이다.

 

재생연결식은 태어 날 때의 마음이다. 죽은 다음에 곧 바로 다음 생을 위하여 '입태'를 하게 되는데 이 순간은 매우 빠르다는 것이다. 즉 죽자 마자 다음생이 결정 되어 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49재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중음이나 49재는 후대에 나온 학설로서 중생구제를 위한 방편으로 여겨 진다.

 

사람이 죽어서 태어나는 곳은 흔히 알고 있는 욕계, 색계, 무색계의 여러세계의 중의 한 곳에 태어 나게 된다. 그런데 대부분이 4악도에 태어 난다는 것이다. ,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이다. 99.999%가 이 곳에 태어나고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 나는 것은 매우 희귀한 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태어남'이라는 의미는 4악도에서 태어남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부처님이나 아라한은 재생연결식이 없으므로 어디에도 태어나지 않음을 말한다.

 

새로운 몸을 받고 나서

 

재생연결식으로 새로운 몸을 받고 나서는 그 다음 생이 시작 된다. 그런 생이 시작 되는 마음을 잠재의식이라고 한다. 빨리어로 '바왕가 찌따(Bhavangga citta)' 라고 한다. 바왕가 찌따는 한 생명체를 유지 하는 마음이란 뜻이다.. 또는 '유분심(有分心)'이라고도 한다. 즉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는 마음의 흐름을 말한다. 이러한 마음은 잠재의식 속에 있다가 여섯가지 감각기관과 부딪쳐서 일어나게 되고 일어 났다가 사라지곤 한다. 순간적으로 일어 났다 사라지는 마음에는 느낄 수 없지만 17단계를 거친다. 즉 순간적으로 17번 생멸 하는 것이다.

 

'안식(眼識)'을 예로 든다면 그 단계는 다음과 같다.

 

1. 지나간 바왕가(과거유분)-과보심

2. 바왕가의 동요(유분동)-과보심

3. 바왕가의 끊어짐(유분단절)-과보심

4. 전향하는 마음(전향식)-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

5. 안식-과보심

6. 받아들이는 마음(영수식)-과보심

7. 조사하는 마음(판별식)-과보심

8. 결정 하는 마음(확정식)-단지작용만 하는 마음

9-15. 자와나(속행)-아라한이 아닌 경우 선심 또는 불선심

16-17. 등록 하는 마음(보존식)-과보심

 

이상은 어떤 사람을 보았을 때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단계이다. 어떤 사람을 보았을 때 짜장면 생각이 나는 것도 이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었다고 울고 불고 하지 마라

 

보통이 사람이 죽어 갈때 옆에서 울고 불고 하는 장면을 많이 볼 수 있다.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한다. 왜냐 하면 마지막 죽는 순간의 의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되도록이면 선한 이야기를 해주 라고 한다. 또 훌륭한 일을 한 이야기를 해 주는 것이 좋다. 울고 불고 하는 것은 미련을 남겨두고 떠 날 수 없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미련 없이 떠나도록 방해하지 않은 것이 좋다는 것이다.

 

울고 불고 하는 것은 잘 못된 견해에서 나오는 것이다. 즉 항상 변하지 않고 있다는 마음, 즉 상견에 있다. 또 죽으면 끝이라는 허무주의적인 관점인 단견에 있기도 하다. 불교에서는 상견과 단견을 배격 한다. 대부분의 종교가 상견에 빠져 있다. 대표적으로 유일신교를 들 수 있다. 힌두교 또한 예외는 아니다. 힌두교 영향을 받은 대승불교도 이런 영향을 받고 있다. 오직 찰라생 찰라멸이 있을 뿐이다.

 

인터뷰 중에 나온 말

 

인터뷰 시간에 어느 분의 말이다. 수행중에 이미지가 보인다는 것이다. 이미지 즉 표상이 보인다는 것은 흔히 사마타 수행 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도깨비가 보인다든지, 귀신, 초월적 존재가 보인다든지 하는 상을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신자라면 예수가 보일 것이고, 불교신자자면 관세음보살이 보이는 이치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 낸 표상에 지나지 않고 유신견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욱더 자아를 강화 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아를 주장 하는 불교의 교리와 맞지 않는 것이라 한다.

 

사마타 수행은 정신집중 수행이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도 일종의 정신 집중이라 볼 수 있다. 정신을 집중하다 보면 표상이 나타 날 수 있다. 즉 자기가 만든 이미지에 자기가 걸릴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위빠사나 수행은 대상을 느낌으로 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 날 수 없다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의미를 두지 않고 보기 때문이다. 순간 순간 마음의 과보를 받지 않고 뚫고 나가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이다. 여기에서 지혜가 생겨 난다. 때에 따라서 아만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느낄 때도 있다. 즉 유신견을 떨쳐 나가는 고통인 것이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은 가장 강력한 수행이고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르른 수행이라는 것이다.

 

 

 

 

 

 

 

2009-01-0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