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대림스님 각묵스님의 팔리 삼장 역경불사와 한국불교의 자주화

담마다사 이병욱 2009. 4. 4. 11:40

 

대림스님 각묵스님의 팔리 삼장 역경불사와 한국불교의 자주화

 

 

박물관에 가보면

 

박물관에 가보면 화엄경 사경판을 볼 수 있다. 금니로 한자 한자 쓰여진 경전을 보면 그 내용 보다 우선 정성에 감탄 하게 된다. 거기에다 그림까지 곁들여 있어서 어느 정도 상상력을 자극 하기도 한다.

 

국립중앙박물관 또는 사찰의 성보박물관에서 보는 사경 경전은 대부분 고려시대의 것이다. 지금으로 부터 거의 천년 가까이 되는 작품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귀하고 귀한 경전을 그 때 당시 민중들은 얼마나 이해 하고 있었을까 의문스럽다. 출가한 스님조차 한문투의 경전을 이해 하려면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하물며 거의 문맹에 가까운 민중들이 불교의 심오한 사상을 공부 하거나 이해 하기는 무척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공부는 출가한 스님들이나 하는 것이고 민중들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나 열심히 염하는 것으로 만족 해야 했을 것이다.

 

요즘에 와서도 이런 현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열심히 보시 하고 지계 하면 천상에 태어 난다는 '시계생천(施戒生天)'사상과 위급할 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하는 타력신앙 또한 여전 하기 때문이다.

 

 

 

 

 

마치 외국어 같은 한문경전

 

현대를 살아가는 민중들은 이제 글을 다 안다. 문맹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자는 잘 알지 못한다. 어느 정도 읽을 줄은 알아도 한문투의 문장을 보여 주면 마치 프랑스어나 러시아어 같은 외국어나 다름이 없다. 따라서 뜻을 잘 모르면서 주로 외우려고 노력 한다. 천수경과 같은 경우 대부분 한문과 산스크리트 다라니로 구성 되어 있어서 별도로 뜻풀이를 보지 않으면 이해 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절에 오래 다닌 사람들이나 신심 있는 불자들은 1300여자에 달하는 천수경 쯤은 달달 외운다.

 

그런데 한문으로 된 금강경을 이해 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 이다. 우선 내용 자체가 천수경에 비하여 거의 3배 이상 많다. 5149자에 달하는 금강경의 내용은 심오해서 자주 번역본을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매일 독송 하는 불자들이 있다. 금강경을 많이 독송 하면 할수록 공덕을 쌓는 것이라 생각 하기 때문이다.

 

금강경을 독송하는 데 대략 40분 내지 50분정도 걸린다. 독송을 하다 보면 뜻도 모르고 독송하는 경우가 많다. 설령 뜻을 알고 독송 한다고 할지라도 번역을 보지 않으면 좀처럼 이해 하기 어렵다. 참고로 다음과 같은 경우가 있다. 금강경의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에 대한 내용이다.

 

 

"須菩提! 於意云何? 阿那含能作是念 我得阿那含果不?" 須菩提言: "不也.
"
수보리! 어의운하? 아나함능작시념 아득아나함과부?" 수보리언: "불야.
世尊! 何以故? 阿那含名爲不來 而實無不來 是故名阿那含."
세존! 하이고? 아나함명위불래 이실무불래 시고명아나함."

 

 

위 문구를 단순히 한자로된 문장만을 본다면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차라리 영어로 되어 있다면 이해하기가 더 쉬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한문투로 읽는 것은 1700년 불교의 역사 때문일 것이다. 경전은 한문으로 읽어야 맛이 나고 한글로 읽으면 어딘가 맛이 떨어진다는 선입관에서 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불교가 민중들과 유리 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고 불교의 포교에 커다란 장애 요소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위의 한문투의 내용에 대한 번역은 다음과 같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다원이 '나는 수다원의 경지를 얻었노라.'하는 이런 생각을 해서 되겠느냐? 아니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수다원을 이름하여 '들어간 자(入流)'라고 하지만 그는 들어감이
없습니다. 그는 형체에도 소리에도 냄새에도 맛에도 만져지는 것에도 마음의 대상에도 들어간 적이 없기 때문에 수다원이라 이름할 수 있습니다."

 

 

한글로 번역 되었지만 여전히 심오한 뜻을 알기 어렵다. 수다원이 나오고 수다원의 경지에 대하여 나오지만 별도의 설명이 있지 않는 한 정확한 뜻을 알기 어렵다. 왜 그럴까. 불교경전이 한문투이기도 하겠지만 기초가 없기 때문이다. 아함경 또는 팔리삼장에 대한 기초가 없다면 쉽게 이해 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한국불교의 가장 큰 문제인 기초가 없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난다. 한국의 불자들에게는 기초가 없이 응용만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불자들은 물론 일반국민들도 불교는 어럽고 난해 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아름다운 우리말 번역을 보면

 

현대를 살아 가는 불자들은 마치 외국어 같은  같은 한문투의 경전을 고집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부처님이 설한 내용이 정확하게 한글로 쓰여져 있다면 한문경전 못지 않은 훌륭한 경전이라 볼 수 있다. 그런 경전 중에 법구경이 이다.

 

 

1. 오늘은 어제의 생각에서 비롯되었고 현재의 생각은 내일의 삶을

만들어 간다.삶은 이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이니

순수하지 못한 마음으로 말과 행동을 하게 되면 고통은 그를 따른다.

수례의 바퀴가 소를 따르듯......

 

 

우리말로 번역된 게송은 너무나 아름다운 한편의 시를 보는 것 같다. 뜻도 의미도 모르는 한문투의 경전을 보다가 법구경이나 숫타니파타의 한글 해석본을 보면 부처님의 원음을 생생 하게 느낀다. 바로 이런식의 경전이 불자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중국으로 부터 불교를 받아 들였다. 우리글과 문자가 없던 시절에 오로지 한자로만 된 불경을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자로된 불경은 1차번역된 경전이다. 산스크리트어와 한자는 체계가 완전히 다르다. 산스크리트는 한글과 같은 표음문자이고, 한자는 글자 하나가 이미지를 갖는 표의 문자이다. 그러다 보니 정확하게 번역 되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능동태와 수동태의 구분이 잘 되지 않는 것도 커다란 단점이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 열반 당시에 '부처님이 가섭에게 두발을 보여 주었다'는 식의 엉뚱한 번역이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려운 한자경전을 이제 한글로 보는 시대이다.

 

1700년만에 불교의 자주화를

 

요즈음은 인터넷 시대이다. 부지런히 클릭하다 보면 때로는 유익한 정보를 많이 접하게 된다. 그런 정보 중의 하나가 동영상법문을 듣는 것이다.

 

각묵스님의 동영상 법문을 불광사 사이트에서 듣게 되었다. '가려 뽑은 앙굿따라 니까야'이다. 10회에 달하는 강의를 불과 몇 일만에 다 듣게 되었다. 책이 필요 할 것 같아 인터넷으로 주문하였다. 도착된 책의 서문을 보니 대림스님의 글이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내용은 한국불교 1700년 역사에 있어서 제2의 역경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한국불교는 1차번역된 한문경전과 2차번역된 우리말 경전을 사용 하고 있었으나 이제 부터는 부처님의 목소리가 생생 하게 담겨져 있는 팔리어로 된 삼장을 직접 번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본과 같은 경우 이미 오래전에 팔리삼장 번역을 마무리 지었지만 한국불교는 이제서야 역경작업을 시작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팔리삼장 역경작업이야 말로 불교도입 1700년 역사에 있어서 진정한 자주불교를 실현 하는 길이라 말하고 있다.

 

대림스님과 각묵스님은 초기불전을 번역하고 있다. 대림스님은 주로 번역에 종사 하고 있고, 각묵스님은 번역과 강의를 통하여 초기불교를 알리고 있다. 두분의 원력으로 인하여 한국불교가 한단계 '업그레이드' 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각묵스님 같은 경우는 불교방송에서 말하기를 자신은 생명이 다 할 때 까지 오로지 초기불전에 대한 역경작업을 하겠다고 말하였다. 과거 중국에 불교가 전래 되었을 때 산스크리트어를 한자로 번역 하였던 구마라집 스님이 연상된다.

 

 

 

 

 

한국불교는 부끄러운 역사

 

박노자교수가 있다. 노르웨이 출신으로서 한국에 귀화한 불자교수이다. 그가 법보신문 3 31일자에서 한 말이 있다. 한국불교는 '부끄러운 역사'라는 것이다. 왜 부끄러운 역사인가. 생사를 훨훨 벗어나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초월의 상태, 즉 열반으로 모든 중생들을 인도해야 하는 것이 불교이지만 한국불교사를 통째로 놓고 보면 사부대중이 불은(佛恩)에 보답한 일보다 '불은을 배반'한 일이 훨씬 많았다는 것이다. 그가 주로 비판 하고 있는 점은 ‘비불교적’이며 ‘반무소유적’인 모습들이다. , 불교계의 권력다툼, 대입기도, 사후에 관련된 온갖 재()나 기도들이 끝이질 않는 등 실제 불교를 인식하는 우리의 수준은 극히 일천하다는 것이다. 그는 또 이러한 불교계 모습이 오늘날만의 문제가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지속돼 왔음을 주장한다. 박 교수는 “부처님이 계획하셨던 승가공동체는 탈국가적이며 친민중적인 일종의 ‘원시 공산주의적’ 공동체였다”며 “한국불교가 나아가야할 길은 무소유의 실천으로 지금 여기에 계급(차별) 없는 사회를 일구어가는 사회주의 실현의 다른 이름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노자의 교수의 지적과 같이 불교가 전래된 이래 비불교적인 색채를 유지 했던 것은 부처님 당시의 불교와 직접적인 접촉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성제나 팔정도와 같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 보다 기초가 없는 중국화된 응용불교가 도입 되었고, 이런 어려운 불교를 민중이 따라 갈 수 없어서 기복신앙으로 발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불교 도입이래 1700년간 면면히 내려온 한국불교의 문제점을 박노자교수가 날카롭게 지적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노고에 보답 하려면

 

대림스님이나 각묵스님의 지적 처럼 이제는 한국불교는 자주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자주화의 첫 단계는 부처님의 원음이 생생하게 기록된 팔리삼장의 번역이고 많이 보급 되는 것이다. 뜻도 모르고 독송하는 한문투의 경전이 아니라 아름다운 우리말로 된 경전을 읽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한국불교가 한단계 업그레이드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한국불교의 자주화를 위하여 목숨이 다 할 때 까지 역경불사에 매진 하겠다는 스님들의 노고에 감사 드린다. 그런 노고에 보답 하려면 불자들이 우리말로 번역된 아름다운 초기경전을 많이 사보는 것이라 생각한다.

 

 

 

2009-04-0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