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제 (짜따리 아리야 사짜)는 왜 네가지 진리일까
고통에서 영원히 해방 될 수 없을까
살아 가면서 즐거운일이 더 많을까 괴로운 일이 더 많을까. 혹자는 괴로운일 보다 즐거운일이 더 많을 것이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고, 반면에 괴로운 일이 훨씬 더 많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즐거움과 괴로움이 반반씩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느 경우이든지 괴로움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누구나 살아 가면서 한번쯤은 극심한 고통을 당할 경우가 있다. 그 고통이 평생 갈 수 도 있고 단기간에 끝나고 마는 고통일 수도 있다. 장기간이든 단기간이든 누구나 고통으로 부터 해방 되고 싶어 한다. 그리고 다시는 고통에 빠져 들기 않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렇게 다짐 했음에도 불구 하고 똑같은 실수를 매번 반복 하는 것이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고통에서 영원히 해방 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 방법을 부처님이 발견 하였다. 바로 사성제가 그것이다.
짜따리 아리야 사짜
사성제는 '4가지의 성스러운 진리' 라는 뜻이다. 빨리어로는 '짜따리 아리야 사짜(Chattari Ariya Sacca)이다. 여기에서 짜따리는 '4'라는 뜻이고, 아리야는 '성스러운'의 뜻이고, 사짜는 '진리'라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말로 풀이하면 '네가지의 성스러운 진리'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진리가 하나가 아니라 4가지라는 점이 독특하다. 타종교에서는 진리는 하나 이지만 불교에서는 진리가 4가지인 것이다. 무엇이 네가지 진리인가.
첫째가 괴로움의 진리이다(고성제).
둘째가 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이다(집성제).
셋째가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이다(멸성제).
넷째가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 하는 도닦음의 진리(
모두 괴로움과 관련 되어 있다. 사성제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왜 괴로울까
괴로움은 무엇일까. 괴로움은 빨리어로 '둑카(dukkha)'라 부르는데 의미는 매우 다양하다. 육체적인 고통, 정신적인 괴로움, 육체적인 불편함, 정신적인 불만족등 온통 불쾌한 감각을 말한다.
이러한 괴로움의 진리는 현실을 바로 아는 것 부터 시작 된다. 지금 괴롭다고 느끼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이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가 '사고팔고(四苦八苦)'이다.
즉 '생' '노' '병' '사'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오음성고'를 말한다. 이중 생노병사는 가장 큰 괴로움이고 두가지로 줄이면 '생' '사'가 된다. 살고 죽는 것 만치 큰 괴로움이 없다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가장 큰 괴로움이라고 보는 것이 불교의 가장 큰 괴로움관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살아 있다는 것 자체에 넌더리를 낼 정도가 되어야 괴로움을 바로 볼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둘째가 괴로움의 세가지 성질인 '고고성(苦苦性)' '괴고성(壞苦性)' '행고성(行苦性)'이다.
고고성은 고통 그 자체를 말한다. 대표적으로 육체적인 고통이 이에 해당 될 것이다. 따라서 고통스럽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다음으로 괴고성이다. 괴고성은 변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행복과 즐거움이 영원히 계속 되었으면 좋으련만 오래 지속되지 않아서 괴로운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행복과 즐거움은 괴로운 것이라 볼 수 있다. 행고성은 이 세상이 조건 지워져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이미 형성 되어 있기 때문에 괴로울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오온으로 형성 되어 있는 것을 나라고 생각 하거나 또는 내것이라고 생각해서 오는 괴로움을 말한다.
왜 괴로움이 일어날까
괴로움의 발생 또는 괴로움의 원인의 진리라고 말 할 수도 있다. 먼저 빨리어의 어원을 살펴 보면 일어남을 '사무다야(samudaya)'라 한다. sam은 '함께' 라는 뜻이고, ud는 '위로'의 뜻이고, 나머지 aya는 영어로 'to go'라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말로 풀이 하면 '함께 위로 간다'라는 뜻으로 '일어남'이라고 해석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일어난다는 말인가. 바로 '갈애(渴愛)'라고 볼 수 있다. 갈애를 빨리어로' 딴하(tanha)' 라 한다. tanha의 루트는 영어로 'to be thirst' 이다. 우리말로 '목마르다'라는 뜻이다. 갈애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이 초기경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이다.
그것은 바로 갈애이니,
다시 태어남[再有]을 가져오고(ponobbhavikā)
환희와 탐욕이 함께 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다.
즉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갈애[無有愛]가 그것이다.
(상윳따 니까야 초전법륜 경(S56:11) §6)
여기서 주목해야 될 문구는 갈애가 다시태어남을 유발하는 근본원인이라는 것이다. 다시 태어남을 빨리어로 '뽀노바위까(ponobbhavika)'라 한다. 왜 다시 태어난다고 하는 것일까 '여기저기에서 즐기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에서 즐긴다'는 의미의 빨리어는 '따라 따라 아비난디니(tara tara abhinandinii)'이다. 이와 같이 다시태어남의 원인이 되는 갈애를 다음과 같이 세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가 욕애(慾愛)이다. 빨리어로 '까마딴하(kama-tanha)'이다. 문자 그대로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을 말한다. 다섯가지 감각적인 욕망이 여기에 해당 된다.
둘째가 유애(有愛)이다. 빨리어로 '바와딴하(bhava-tanha)'이다. 존재에 대한 집착을 말한다. 주로 색계와 무색계에 태어 나는 집착을 말한다.
셋째가 무유애(無有愛)이다. 빨리어로 '위바와딴하(vibhava-tanha)'이다. 존재하고 싶지 않은 갈애를 말한다. 죽으면 끝이라는 단견을 말하고 '자살'의 경우가 해당된다.
결과적으로 갈애를 없애면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괴로움을 소멸 할 수는 없을까
괴로움이 소멸된 상태를 열반이라 말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열반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으로서 사리불존자의 이야기가 잘 알려져 있다. 사리불존자는 탐진치가 사라진 상태를 열반이라고 말하였다. 즉 괴로움이 소멸된 상태를 말한다. 모든 괴로움은 갈애에서 부터 출발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갈애를 없애버리는 것이 열반으로 갈 수 있다는 말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열반은 빨리어로 '닙바나(nibbhana)'이다. 이 열반에 대하여 더 구체적으로 알아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첫째, 열반은 멸성제를 말한다.
초기경에 이에 대한 설명이 잘 나와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이다.
그것은 바로 그러한 갈애가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 없음이다.
(상윳따 니까야 초전법륜 경(S56:11) §7)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asesa-virāga-nirodha)’이라는 등은 모두 열반의 동의어들이다. 열반을 얻으면 갈애는 남김없이 빛바래고 소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갈애가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이라고 설하셨다.
둘째, 열반은 탐진치의 소멸이다.
초기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도반 사리뿟따여, '열반, 열반'이라고 합니다.
도반이여, 도대체 어떤 것이 열반입니까?”
“도반이여, 탐욕의 소멸, 성냄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 ―
이를 일러 열반이라 합니다.”
(상윳따 니까야 열반 경(S38:1) §3)
사리불의 대답으로 열반이 탐진치가 소멸된 상태가 열반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탐진치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열반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셋째, 열반은 갈애의 소멸이라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초기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다시 비구들이여,
그런 이 갈애는 어디서 없어지고 어디서 소멸되는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 있으면 거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거기서 소멸된다.
그러면 세상에서 어떤 것이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인가?
① 눈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귀는 … 코는 … 혀는 … 몸은 … 마노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된다.
② 형상은 … ③ 눈의 알음알이는 … ④ 눈의 감각접촉[觸]은 … ⑤ 눈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 ⑥ 눈의 인식은 … ⑦ 눈의 의도는 … ⑧ 눈의 갈애는 … ⑨ 눈의 일으킨 생각은 … ⑩ 눈의 지속적인 고찰[伺]은 … 귀의 지속적인 고찰은 … 코의 지속적인 고찰은 … 혀의 지속적인 고찰은 … 몸의 지속적인 고찰은 … 마노의 지속적인 고찰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된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라 한다.”
(디가 니까야 대념처경(D22) §20)
다섯가지 감각적인 욕망과 이에 따르는 마노를 갈애로 보고 이런 욕망에 대한 집착이 소멸 되어야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넷째, 열반은 버려서 실현 되는 것이다.
열반을 표현 하는 데 있어서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적극적인 표현이고 또 하나는 소극적인 표현이다. 적극적인 표현은 '궁극적인 행복' 이나 '평화'를 들 수 있다. 소극적인 표현으로서는 주로 '~이 아닌것'을 들 수 있다. 부정어법을 사용 하여 표현 하는 것이다. '탐욕에 집착하지 말라' '성내지 말라' 등과 같은 말이다. 한마다로 말하면 놓아 버리고 버려서 얻는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세속에 대하여 넌더리를 칠정도로 역겨워 해야 하고 이를 실천 하는 방법은 팔정도라 볼 수 있다.
다섯째, 열반은 삶에 대한 의미부여가 끝나야 드러난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각묵스님의 견해를 들어 보면 알 수 있다.
이처럼 열반은 온갖 종류의 삶에 대한 의미부여가 끝나야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를 위시한 인간들은 출가자든 재가자든 삶에 대한 무한한 의미부여를 하고 있다. 삶이 아닌 것은 허무요 끝장이라 생각하며 바들바들 떨어온 게 중생의 역사 아니던가? 물질문명의 극치를 구가하는 현대의 우리는 어느 시대보다 삶에 대한 강한 의미부여를 하고 있다. 그런데 삶에 대한 의미부여가 끝나야 열반이라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망발인가!
이런 인간들의 구미를 맞추려다보니 역사적으로 불교 안에서부터 가장 난도질당하고 곡해당해 온 것이 부처님 제일의 메시지인 이 열반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래서 열반은 무주처열반으로 이해되기 시작했고, 생사뿐만 아니라 열반마저도 허망하다고 이해되었고, 마침내 생사가 그대로 열반이라고 주장하게 되었으며, 탐진치 그대로가 열반이라는 말까지 서슴없이 내뱉어 왔다. 그런데 이런 말들의 이면에는 생사로 대표되는 삶에 대한 무한한 의미부여가 들어있고, 이 삶 속에서 오래오래 단맛을 쪽쪽 빨아먹으리라는 간절한 소망이 들어있다고 하면 너무 심한 표현일까?
혹자는 반박할 것이다. 생사를 떠난 열반이 따로 있다고 한다면 이분법적인 사고라고. 그에게 말하고 싶다. 그대는 이미 스스로가 이 삶에 의미부여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태도로는 절대로 열반을 알 수도 볼 수도 실현할 수도 없다고.
괴로움을 소멸하려면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
도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빨리어 막가(magga)로서 '완성된 도'의 의미이고, 또 하나는 빨리어 '빠띠빠다(patipada)'로서 행도(行道)의 의미이고 '도 닦음'을 말한다. 후자의 도 닦음의 진리가 팔정도라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초기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도반이여, 그러면 이러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도가 있고 도닦음이 있습니까?”
“도반이여, 이러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도가 있고 도닦음이 있습니다.”
“도반이여, [252] 그러면 어떤 것이 이러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도이고 어떤 것이 도닦음입니까?”
“도반이여,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구성요소로 된 성스러운 도[八支聖道]이니,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입니다.
도반이여,
이것이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도이고 이것이 도닦음입니다.”
(상윳따 니까야 열반 경(S38:1) §4)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苦滅道聖諦]이다.
[422]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支聖道]이니,
즉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삼매[正定]이다.”
(상윳따 니까야 초전법륜 경(S56:11) §8)
팔정도의 정견을 아는 것이 사정제를 아는 것이고 또 연기를 아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사성제는 철저하게
위와 같이 사성제에 대하여 살펴 보았다. 정리 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가 '빠린네야(parinneyya)'이다. 괴로움을 철저하게 알아야 된다는 '앎'이다.
둘째가 '빠하따빠(pahatabba)'이다. 갈애는 철저하게 버려야 된다는 '버림'이다.
셋째가 '사치까따빠(sachikatabba)'이다. 열반은 철저 하게 실천 해야 된다는 '실천'이다.
넷째가 '바위따바(bhavitabha)'이다. 도 닦음은 철저하게 닦아야 한다는 '닦음'이다.
이상으로 각묵스님이 불교tv 강의를 듣고 요약하였다. 그리고 약간의 견해를 넣었다.
진흙속의연꽃
'담마의 거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교의 우주관과 독화살의 비유, 월폴라 라훌라의 만동자 이야기 (0) | 2009.04.14 |
---|---|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명호(名呼)와 재가불자의 눈높이 (0) | 2009.04.11 |
대림스님 각묵스님의 팔리 삼장 역경불사와 한국불교의 자주화 (0) | 2009.04.04 |
숙명론과 연기론, 어떻게 다른가 (0) | 2009.04.01 |
수행자는 항상 기쁨과 희열에 충만해야, 37조도품중의 칠각지 이야기 (0) | 2009.03.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