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숙명론과 연기론, 어떻게 다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09. 4. 1. 11:22

 

숙명론과 연기론, 어떻게 다른가 

 

 

 

 

 

 

"사람이 죽으면 식물로도 윤회한다" 이 말은 공영방송의 특집프로에서 들은 말이다. 인도에 관한 특집 다큐멘타리에서 불교의 윤회에 대하여 설명할 때 나레이터가 한 말이다. 그 나레이터는 사람이 죽으면 천상에서도 태어 날 수 있고 지옥과 같은 악도에서도 태어 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동물로도 태어 날 수 있고 식물로도 태어 날 수 있는 것이 윤회라고 말 하였다. 아마도 작가가 써준 대본을 그대로 읽었기에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대본을 쓴 작가의 불교에 대한 상식을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상식이 없는 작가의 상상력에 따라 불교가 크게 왜곡 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사실을 발견 하였을 때 그때 그때 마다 지적 해 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식물도 윤회한다고?

 

불교에서는 윤회를 인정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불자들은 윤회를 믿고 있다. 선업을 지으면 천상에 태어나고, 불선업을 지으면 악도에 태어 난다고 믿고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악도는 어떤 곳일까. 보통 3악도를 들고 있다. 지옥 아귀 축생을 말한다. 남방불교에서는 아수라를 추가 하여 보통 4악도라 부른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악도는 축생이다. 즉 소나 말과 돼지 같은 가축을 말한다. 축생의 범위를 더 넓혀서 말한다면 정신적인 영역을 가지고 있는 모든 존재를 말한다. 그런면에서 볼 때 식물은 정신적인 영역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중생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중생은 '유정중생(有情衆生)'이다. 즉 정신을 가지고 있는 중생을 말한다. 이런 유정중생이 윤회 한다고 믿고 있다. 보통 유정중생의 태어남을 보면 크게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금강경에도 나와 있듯이 난생, 태생, 습생, 화생이다. 이중 화생을 제외 하고 태어남을 볼 수 있는 중생은  태에서 나는 태생, 알에서 나는 난생, 습한 곳에서 나는 습생이다. 화생은 갑자기 완성된 모습으로 출현 하였다고 해서 화생이라 한다. 천상이나 지옥, 아귀, 아수라와 같이 보이지 않는 세계에 사는 존재를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방송에서 식물이 윤회 한다고 말하는 것은 중생의 개념을 잘 못 파악 했거나 아예 불교에 대한 상식이 없거나  두가지 중의 하나 일 것이다. 이런 비상식적인 이야기를 보는 것은 방송뿐만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인터넷신문에서도 발견한다.

 

이미 결정된 것이기 때문에 이를 굳이 개선할 필요가 없다고?

 

"내 잘못이 아니며, 이미 결정된 것이기 때문에 이를 굳이 개선할 필요를 느끼지 않으며, 가난하다고 하여 불행하다고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 문구는 모 인터넷신문의 2009년 4월 1일자 '앙코르와트 야경이 아름다우면서도 슬픈이유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99611&PAGE_CD=N0000&BLCK_NO=5&CMPT_CD=M0034&NEW_GB= )'에 나와 있는 글이다. 위글은 이 기사의 결론에 해당 되는 부분으로서 내용을 알아 보기 쉽도록 특별히 색깔을 달리 하여 강조해 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기사의 내용으로 본다면 불교는 숙명론적인 종교이다. 과거 전생에 자신이 지은 업 때문에 현생에서 고스란히 받고 있기 때문에 굳이 개선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붓다는 이에 대하여 명쾌하게 해명 하였다. 바로 그것이 '연기법(緣起法)'이다.

 

붓다 당시에 인도에서는

 

붓다 당시에 인도에는 브라만교가 지배적인 종교이었고 이에 대항하는 수 없이 많은 사문의 사상이 난립하고 있었다. 그 사문의 사상 중의 하나가 불교이다. 브라만교와 사문의 종교에서 주장하는 수 많은 구원의 길에 대한 주장을 3가지로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가 존우론(尊祐論)이다.

둘째가 숙작인론(宿作因論)이다.

셋째가 우연론(偶然論)이다.

 

위의 내용을 설명하면 첫째가 '존우론'이다. 여기서 존우론은 브라만교에서 믿고 있었던 사상으로서 절대자인 창조주가 있어서 이세상을 창조 하였다는 이론이다. 여기서 창조주인 절대자로서의 신은 전지전능하고 모든 인간사에 다 개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운명도 결정하기 때문에 인간이 노력하거나 수행 또는 정진 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또한 신은 항상 선하고 정의의 편이라고 하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악과 불의에 대하여 설명 할 수 없는 자체 모순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붓다는 이러한 절대자로서의 창조주 개념의 신관에 이의를 제기하고 스스로 노력해서 중생에서 붓다가 되는 길을 몸소 보여 주어서 타파 하고자 하였다.

 

둘째는 운명론 내지는 숙명론과도 유사한 '숙작인론'이다. 중생이 전생에 지은 업력에 의하여 내세가 결정되기 때문에 노력해도 되지 않는다는 사상이다. 모든 것을 운명론 적으로 보고 현실 또한 이미 결정 되어 있다고 생각 해서 모두 운명에 맡겨 버리기 때문에 현재의 자유의지를 무시하는 사상이다. 자유의지가 없기 때문에 수행을 하여서 운명을 개척할 필요도 없을 뿐만 아니라 윤리도덕적인 근거도 희박 하다.

 

셋째는 '()' '()'에 있어서 인도 부정하고 연도 부정하는 '우연론'이다. 즉 인과응보를 부정하며 철저하게 '무인무연'을 주장하는 사상이다. 이런 사상은 도덕과 윤리의 부재를 초래 할 수 있어서 황금만능주나 쾌락주의로 빠질수 있는 위험이 있다.

 

위의 세가지 사상은 모두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또한 도덕도 부정하기 때문에 윤리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이론이다. 더구나 존우론 같은 절대신 개념에서는 모든 악도 신이 만들었다는 모순에 빠지기 때문에 더욱이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다. 불교는 이와 같이 창조론과 운명론 그리고 우연론 같은 도덕적으로 또 윤리적으로 모순이 있고 문제가 있는 사상을 배격한다. 결국 이와 같은 사상은 인간을 속이고 도덕적 윤리적으로 타락케 하는 사상에 대하여 내놓은 이론이 바로 연기법이다. 연기법이야말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 가게 할 수 있고 또한 도덕적 윤리적으로 문제도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좋은 방향으로 가게 하는 역할도 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는 자유의지의 종교

 

이와 같이 살펴 보았을 때 인터넷신문의 기사에 나와 있는 "내 잘못이 아니며, 이미 결정된 것이기 때문에 이를 굳이 개선할 필요를 느끼지 않으며, 가난하다고 하여 불행하다고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의 내용은 위의 숙작인론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불교에서 연기법은 부처님이 발견한 우주의 근본법칙과도 같다. 연기법을 이해 하면 윤회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특히 인과법칙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보통 '삼세양중인과'로 불리우는 인과의 법칙을 보면 금생의 운명은 물론 내생의 운명까지 바꾸어 갈 수 있다고 말한다. 금생에서 자신이 어떤 마음을 먹고 어떻게 행동 하느냐에 따라 미래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불교는 주어진 운명대로 내맡기는 숙명론적인 종교가 아니라 자신이 처한 현실을 적극적으로 극복해 가는 자유의지의 종교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2009-04-0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