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명호(名呼)와 재가불자의 눈높이
"할렐루야!" 이 말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그들끼리 서로 만났을 때 "안녕하세요" 하는 말 대신에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개신교인에게 있어서 매우 친숙한 단어인 할렐루야 라는 말은 고등학교 입학 하였을 때 처음 접하였다. 배정을 받아 간 곳이 기독교계통의 학교인 소위 '미션스쿨'이었기 때문이다. 그 곳에서 가르쳐 준 말은 인사할 때 "안녕하세요" 라는 말 대신에 "할렐루야!" 라고 말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의 할 때는 "아멘!" 하라고 교육 하였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하라는 데
정기적인 법회 모임이 있어서 참석 하였다. 약간 늦게 도착 하였는데 어느 스님의 법문이 시작 되고 있었다. 그 스님은 말하기를 어느 때고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하라고 한다. 즉 생활화를 말하는 것이다. 늘 입에 달고 다니면 나중에 죽어서 아미타부처님 계신 곳에 태어 나고,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관세음보살의 가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대화 중에도 동의 하는 뜻으로도 사용 하라고 말한다. 이렇게 강의 시간 초반에 교육시켜 놓자 그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법문 도중에 박수를 치는 대신에 모두들 "나무아무타불 관세음보살" 하는 것이었다.
불자들에게 있어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칭명은 너무나 익숙하다. 다른 교리는 잘 몰라도 이 두 칭호만은 누구나 다 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칭호는 불교가 전래된 이래 천년이상 사용해 왔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불자들의 신행생활에 있어서 절대적인 영향을 끼쳐 왔다. 실제로 인터넷 카페에서나 댓글에서도 마지막 문구를 '나무아미타불'로 끝맺음 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관세음보살'을 명호(名呼) 하는 것 역시 나무아미타불 못지 않게 많이 사용하고 있다. 특히 '관음정근' 할 때 절을 하면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며 칭명 하는 것은 불자들의 중요한 신행생활이다.
이와 같이 알게 모르게 생활화 되어 있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마치 후렴구 처럼 사용 하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서 미션스쿨을 다닐 때의 기억이 떠 올랐다. '할렐루야 아멘' 하라고 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고 생각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할렐루야 아멘' 하는 것이 불교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의 영향을 받아서 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하는 것을 후렴구 처럼 사용 하라는 것에 대하여 일종의 '개신교 따라하기'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흔히 '온라인'과 '오프라인'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인터넷이 생활화 되어 있다 보니 인터넷상에서 일을 하는 것을 '온라인에서 한다'라고 말하고, 인터넷을 떠나 실제로 대면 하면서 일을 처리 하는 것을 '오프라인에서 한다'라고 말한다.
온라인상에서 많은 사람을 만난다. 물론 글을 통해서이다. 직접 대면 하지 않기 때문에 글을 통해서 상대방을 판단 할 수 밖에 없다. 글의 내용을 보면 대충 성향을 판단 할 수 있다. 글에 어느 정도 생각이나 성향이 녹아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는 그런 상상이 빗나가기도 한다. 아마도 대표적인 예가 '미네르바' 사건 일 것이다.
이와 비슷한 케이스는 아닐지라도 법문을 마치고 난 스님의 이름을 듣는 순간 인터넷의 카페와 블로그에서 활동 하던 그 스님의 이름이 떠 올랐다. 인터넷에서의 법명과 방금 들은 그 스님의 법명이 일치 하였기 때문이다. 인터넷상에서 읽었던 그 스님의 글과 실제로 강의를 통해서 만났을 때 약간은 기대에 못 미쳤다. 특히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을 후렴 하는 것처럼 사용 하라고 말을 하였을 때 그랬다.
'법(法)'을 모르는 재가자들은
불자들의 의식 수준은 매우 다양 하다. 사찰순례를 하다 보면 많은 불자들이 법당에서 참배 한 후에 꼭 가는 곳이 있다. 바로 산신각이다. 이와 같이 반드시 산신각에 가서 참배 하는 불자에서 부터 교리와 수행을 병행하여 공부 하는 재가불자들 까지 그 스펙트럼의 폭은 매우 넓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불자들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안위를 빌고 또 사업번창, 소원성취와 같은 불보살의 가피를 바라는 기복적인 요소가 농후 하다. 그러다 보니 불보살에 빌고 가피를 바라는 신행 형태가 되었다. 불보살을 마치 유일신교의 절대자 처럼 생각 하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겨난 것일까. 가장 큰 요인은 불자들이 스스로 공부를 하지 않아서 이고, 두번째 요인은 스님들이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불자들은 열심히 기도나 하고 보시만 하면 된다는 사고 방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상은 매우 뿌리가 깊다고 볼 수 있다. 불자들이 글을 모르는 시대 부터 내려온 관행이기 때문이다. 즉 문자를 모르다 보니 법에 대하여 제대로 알리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재가자들은 열심히 보시하고 계를 지키면 나중에 죽어서 극락에 태어난다는 '시계생천(施戒生天)'사상이 있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무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을 명호 하는 것 역시 그와 같은 시대의 산물 일 것 이다.
눈 높이가 높아진 불자들에게
지금은 옛날과 많이 달라졌다. 첫째 문맹이 없어 졌다. 따라서 누구나 한글을 읽고 쓸 줄 안다. 또 교육을 좀 받았다면 한자는 물론 영어도 읽을 수 있다. 또 하나는 세계가 글로벌 화 되었다는 것이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불과 하루 만에 전세계에 어느 지역이든지 도달 할 수 있고 또한 각종 정보를 인터넷을 통하여 공유할 수 있는 '정보통신시대'이다. 이런 시대에 '6자칭명' 또는 '5자칭명'으로 불리워지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불자들에게 권하는 것은 약간은 시대착오적이라 볼 수 있다. 유일신체제와 같이 주종관계가 확실한 타력신앙이라면 가능한 일이겠지만 '무상' '고' '무아'를 기본으로 하는 불교의 근본 교리와 비교 하여 보았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자들이 교육수준이 낮고 어리석다면 '방편'으로서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의식 수준이 높아졌다.
똑 같은 자리에서 어느 교수님의 초기불교에 대하여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그 교수님은 남방에서 공부 하고 수행까지 하고 온 분이었다. 그 교수님은 주로 '무상 고 무아'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이 세상에 그 어느 것도 변하지 않은 것은 없다고 설명하면서 '무상'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행복이나 즐거움도 변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라 말하고 '고'에 대하여 말하였다. 또 방금 전의 나와 바로 지금의 나가 같을 수 없다는 '무아'에 대하여 말을 하였다. 따라서 그 어떤 존재도 '무상' 과 '고'와 '무아'의 법칙을 피해 갈 수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유일신은 3법인의 법칙에 어긋나기 때문에 존재 할 수 없다 말하고, 다만 있다면 변하는 신만 있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있다 보면 불자가 되기를 얼마나 다행으로 여겼는지 모른다. 그리고 불자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느꼈다. 또 인간의 관념이 만들어 낸 신을 믿고 그 프레임에 빠진 사람들이 그렇게 어리석고 불쌍해 보일 수 없었다. 이렇게 이미 눈 높이가 높아진 상태에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후렴구 처럼 염 하라고 하니...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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