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무인작용심 끼리야찌따(kiriya-citta)란 무엇일까

담마다사 이병욱 2009. 4. 30. 14:10

 

무인작용심 끼리야찌따(kiriya-citta)란 무엇일까

 

 

 

 

 

인식이라는 말이 있다. 영어로는 knowledge 라 한다. 우리말로 단순히 말한다면 '아는 것' 정도 이겠으나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 보기 위하여 인터넷 백과사전을 보았다.

 

인식이란 무엇일까

 

 

인식 (철학)  [認識, knowledge]

 

객관적 실재가 인간의 의식에 이론적으로 반영되는 과정과 그 결과.

 

 

사전에 나와 있는 단 한줄의 의미는 객관적실재가 인간의 의식에 이론적으로 반영된 결과라고 나와 있다. 즉 눈과 코와 귀등을 통해서 아는 대상을 말할 것이다.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은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인식은 인식과정의 결과로서, 넓은 의미로는 인간 지식의 총체를 말하며, 좁은 의미로는 일정 범위의 대상에 대한 지식을 뜻한다.

 

넓은 의미로 인간지식의 총체이고, 좁은 의미로서는 일정범위에 대한 지식을 말한다고 한다. 인식은 지식과도 같다는 말일 것이다.

 

이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은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인식의 토대와 출발점은 어떤 신비한 인식충동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실천과 실천적 욕구이다. 특히 생산과 관련된 실천 및 욕구가 인식의 발전 방향을 규정하며, 인식의 중요한 과제들도 실천에서 나온다. 자연대상의 속성과 자연법칙에 대한 인식은 인간이 자연력을 생산에 이용하기 위한 중요한 전제를 이룬다. 또한 사회 발전의 법칙에 대한 인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사회적 생활과정을 의식적·계획적으로 제어할 수 있게 해준다. 모든 인식은 직접적·간접적으로 결국 이와 같은 실천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이바지한다. 이렇듯 인식은 실천 속으로 유입되는데, 이때 그것이 어느 정도 객관적 실재와 일치하는지가 입증된다. 실천은 인식의 정당성을 판가름하기 위한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기준이다.

 

주로 인식의 실천적인 사항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인식은 실천속에서 유효하고 그 것이 객관적인 실재를 판단 하는 요소라는 것이다.

 

 

보충 설명을 더 보면 다음과 같다.

 

 

인간이 객관적 실재를 인식해나가는 과정은 복잡하고 다면적이며 지루한 과정이다. 개별적 인식과정이나 인간 인식의 총체를 막론하고 인식은 현상에서 본질로, 즉 사실의 수집·비교·분류에서 그 사실의 저변에 놓여 있는 일반적이고 필연적인 내적 연관, 곧 법칙의 발견으로 나아간다. 인식은 그 발전과정에서 끊임없이 한계에 부딪친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는 역사적으로 제약된 것이다. 인식은 사회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발전수준, 특히 과학적 도구와 장치 그리고 이미 도달된 지식수준에 의존한다. 따라서 인식은 계속 변화한다. 인식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절대적 진리가 확보되어 궁극적으로 완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늘 새로이 나타나는 상대적 진리를 인식함으로써 절대적 진리에 가까이 다가갈 뿐이다.

 

인식은 객관적인 실재를 아는 과정이고 이미 도달된 지식 수준에 크게 의존 한다고 한다. 따라서 인식은 계속 변하기 마련이고 상대적인 진리를 인식 함으로써 절대적인 진리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는 것 만치 보인다

 

인식을 한자로 풀어 보면 '아는 것을 인정 하는 것'이다. 영어로는 지식을 의미 하는 knowledgw이지만 좀 더 단 순히 말한다면 '아는 것 만치 보인다' 라는 말이 될 것이다. '인식하는 정도에 따라 자신의 세계가 형성 된다' 라는 말과 똑 같은 말로 여겨 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같은 공간에서 사는 사람과 개가 있다고 하였을 때 사람이 인식하는 세상과 개가 인식 하는 세상은 분명 같지 않을 것이다. 더 낮은 단계인 개미가 인식 하는 세상과 사람이 인식 하는 세상은 더 욱 더 차이가 날 것이다. 이러한 인식과정은 개나 개미 뿐만 아니라 같은 인간끼리도 크게 차이가 날 수 있다. 같은 대상을 두고도 서로 달리 보고 느끼고 생각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식과정은 전반적으로 경험에 크게 의존한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외국에 한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에 있어서 해당 외국에 대한 경험과 지식에 전무 하기 때문에 자신의 세계에서는 없는 것과 같다. 마치 개나 개미가 인간이 경험하는 세상을 모르는 이치와 같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경험 하지 못했다고 해서 또는 자신의 지식이 없다고 해서 객관적으로 존재 하는 세상이 없다고 볼 수 있을까. 분명히 지구 반대편에는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들의 문화와 전통을 유지 하며 그들 나름대로 하나의 세상을 이루며 살아 가고 있다. 또 지구를 떠나서 이 우주 어딘가에도 우리와 비슷한 존재들이 살아 갈지 모른다. 다만 눈으로 보고 귀로 듣지 않아서 확인하지 못 했을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고 귀로 들리지 않는 다고 해서 없는 것으로 간주 한다. 그러다가 외국에 나가 보면 '이렇게 살아 가는 사람들도 있었네' 하고 알게 될 것이고 인식의 영역에 저장해 놓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리의 영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불교를 모르고 지내다가 사성제, 연기법, 3법인과 같은 교리를 알게 되었을 때 비로서 이런 법이 있었던 것을 알게 된다. 그 전까지만 해도 몰랐기 때문에 없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알고 나니 그리고 어렴풋이나마 이해 하고 나니 실재화 되는 것이다. 그리고 믿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이런 사실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는 것이고 이제까지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다섯가지 감각을 대상으로 하는 오문인식과정

 

내가 진리를 모르고 있었다고 해서 진리가 없었다고 볼 수 있을까. 항상 진리는 있었다. 단지 인식을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인식을 못했다는 것은 실재적으로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과 같다. 보통 경험 한다 함은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생각과 같은 6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좋다' '싫다' '딱딱 하다' '부드럽다' '달다' 등과 같이 느끼고 아는 마음이다.

 

이렇게 감각대상을 받아 들이고 인식하면서 저장 하는 것 또한 마음이다. 이런 마음을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많이 알고 있을까. 불교의 아비담마 에서는 이런 마음을 세분화 하여 도표화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마음의 작용에 대하여 하나 하나 세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그 중에 하나가 인식과정일 것이다.

 

 

아비담마 공부를 하면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이 인식 과정이다. 왜 마음이 자극 받아서 선하고 불선한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는가에 관한 내용이다. 보통 17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하는 인식과정을 보면 주로 의문(意門)인식단계에 대한 설명이다.

 

 

먼저 심찰나 동안에 발생 하는 마음에는 17가지 단계는 다음과 같다.

 

 

↓잠재의식의 흐름(바왕가 찌따)

  1단계, 지나간 바왕가(과보심)

  2단계, 바왕가의 동요(과보심)

  3단계, 바왕가의 끊어짐(과보심)

  4단계, 오문전향식(무인작용심)

  5단계, 안식(과보심, 저장 되어 있는 정보를 보는 마음)

  6단계, 영수식(과보심, 받아 들이는 마음)

  7단계, 판별식(과보심, 조사 하는 마음)

  8단계, 확정식(과보심, 결정 하는 마음)

  9단계-15단계, 속행(무인작용식, 팔리어로 '자와나')

  16-17단계, 보존식(과보심, 등록 하는 마음)

↓잠재의식의 흐름(바왕가 찌따)

 

 

잠재의식의 또 다른 이름 '바왕가찌따'

 

여기서 잠재의식은 빨리어로 '바왕가찌따(bhavanga-citta)'라고 말한다. 바왕가의 마음이란 무엇일까. 쉽게 설명한다면 '깊은 잠에 들었을 때의 마음상태'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현생의 표상과 관련이 없고 업에 뿌리를 두고 있는 잠재의식의 흐름이라 볼 수 있다. 단지 이 바왕가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먹고, 몸으로 감촉할 때 변화가 발생 한다. 그 변화의 과정이 17단계이고 순간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인식과정으로 보고 있고 빨리어로는 '위띠찌따(vithi-citta)'라고 한다.

 

눈으로 무언가 보았을 때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먼저 어떤 형상이 눈에 들어 오게 된다. 그런데 형상을 보게 되는 눈은 물질이다. 이 물질은 매우 짧은 순간에 생멸한다. 이 생멸하는 물질 보다 더 짧은 기간 동안에 생멸 하는 것이 마음이다. 보통 물질이 한번 생멸 하는데 있어서 마음은 17번 생멸한다고 해서 17단계로 보고 있다. 이렇게 매우 짧은 순간에 눈이 형상을 보게 되는데 이 것을 인식 하기 전까지는 어떤 형상인지 알 수 없다. 인식을 하려면 우선 바왕가가 끊어 져야 한다. 그래야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보이는 대상이 익숙한 것이라면 바왕가의 마음은 쉽게 끊어 질 것이다. 그리고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 할 것이다. 이것이 바왕가의 동요(2단계)이다. 그 다음에 바왕가의 흐름이 끊어지고 본격적으로 형상에 관심을 두기 시작 할 것이다. 이 알려고 하는 마음을 전향 한다고 한다. 이 알려고 하는 마음은 보통 다섯 감각기관에 해당 하기 때문에 오문전향식이라 한다. 이 것은 마음의 4단계에 해당 된다. 이후에 안식이 일어 나고 형상을 수용 하고 살피고 받아들이는 식으로 진행 된다.

 

무인작용심(無因作用心) 끼리야찌따(kiriya-citta)란 무엇일까

 

17가지 단계에서 과보심과 무인작용심이 있다. 여기서 무인작용심이 있다. 매우 생소한 용어이다. 아비담마에서 무인작용심은 '업의 효력이 없는 단순한 행위를 뜻하는 작용만 하는 마음'이라고 설명 하고 있다. 빨리어로 '끼리야찌따(kiriya-citta)'라 하는데 이런 종류의 마음을 '아라한의 마음' 또는 '부처님의 마음'이라 하기도 한다. 인식단계의 4번째인 오문전향식이 바로 무인작용심이라 볼 수 있다. 과보와 무관하게 단지 작용만 하는 단계이다. 대상을 보면 보기만 하고, 들으면 듣기만 할 뿐이지 상카라에 기인 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반하여 바왕가는 과보에서 기인 하는 마음이다. 즉 과거에 선하거나 불선한 상카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보심이라 한다.

 

마음이 형상을 받아 들인 다음에는 그 것이 좋은지 나쁜지 이제 조사 하는 마음이 생긴다. 7단계이다. 그리고 좋은 것이라면 좋다고 생각 하는 결정을 하게 된다. 8단계이다. 그리고 나서 일곱번에 대하여 연속하여 재빠르게 속행 하는 과정이 일어 나게 되는데 이를 '자와나(javana)' 라고 한다. 그런데 이 자와나는 다른 과정과 달리 매우 빠른 속도와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만일 대상을 보고 탐욕이 생겼다면 그 대상을 거머 쥐려고 하고 맹목적으로 돌진 하려는 욕구가 내면에서 치솟아 오는 것이다. 이런 마음은 상카라에 기인 하는 과보심이 아니고 단순한 행위를 뜻하는 무인작용심이다. 오문전향에 있어서 무인작용심과 같다. 이런 자와나는 선하거나 불선한 마음부수와 관련이 되어 있다.

 

바왕가의 흐름 17단계에서 인식과정은 실제적으로 14단계이다. 즉 지나간 바왕가와 바왕가의 동요, 바왕가의 끊어짐과 같은 바왕가와 관련된 마음을 제외한 14가지 마음이 인식과정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14가지 단계를 모두 거친 다는 것은 인식 하는 대상이 매우 강력했을 때이다. 형상이 그다지 선명하지 않다면 여러 단계를 건너 뛸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경우는 단지 보는 것으로 그치기도 하고 지나 갔는지도 모르게 지나 간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17단계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보통 수행을 한다고들 한다. 조용한 곳에서 좌선을 하는 것 만이 수행일까. 어느 분은 말하기를 수행은 습관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수행이라는 말보다 '수습(修習)'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바왕가흐름 17단계와 14가지 인식과정을 보면 가장 중요한 단계는 결정단계라 볼 수 있다. 8단계 확정식을 말한다. 이 단계에서 끝나야 한다. 이 단계에서 머물러야 감각대상을 찾지 않거나 마음을 오염 시키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회상이 느려지고, 전향하는 마음이 약해지고, 안식이 명확하지 않고, 받아들임이 적절치 않고, 조사 하는 마음이 효과적이지 않고, 결정하는 마음이 명확 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두세번 결정 하는 마음이 일어난 다음에 바왕가로 되돌아 가는 것이 바람직 하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거나 연극을 볼 때 마음은 강한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직접 접촉 하는 것 보다는 덜하다. 보거나 듣는 것 보다 더 강한 대상은 맛보고 냄새 맡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자극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냄새와 맛은 접촉보다는 못하다. 몸으로 느끼는 접촉이야 말로 가장 강력한 느낌이다. 악수를 하고 포옹을 하는 행위가 단순히 보고 듣는 것 보다 더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신체적인 접촉 보다 더 강력한 것은 '마음의 자극'이다.

 

마음을 대상으로 하는 의문인식과정

 

의문인식과정이 있다. 오문인식과정과는 달리 대상이 마음이다. 오문인식과정이 보고 듣고 냄새 맡도 맛보고 몸으로 느끼는 다섯가지 감각 대상이었다면 의문인식과정은 마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다르다.

 

의문인식의 대상은 이미 경험했거나 때로는 사진이나 영화속의 한 장면같이 경험해 보지 못한 감각대상의 표상이 될 수도 있다. 이런 표상이 마음에 나타나면 바왕가가 흔들리고 곧이어 바왕가가 끊어 진다. 그 다음에 의문전향이 일어난다. 그리고 오문전향과 어느 정도 비슷한 과정이 의문전향에서 일어난다. 그런데 의문전향은 오문전향에 비하여 매우 강력 하다. 다섯감각 기관에서 일어 나는 자극은 약해서 더 큰 다른 과보도 생기게 하지 못하지만 마음의 자극은 다른 모든 과보들을 결정 할 정도로 강력 하다는 것이다.

 

의문인식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향하는 마음과 자와나와 등록하는 마음이다. 만일 희미하고 불분명한 대상이라면 등록하는 마음을 건너 뛰고 자와나를 거쳐서 바왕가로 돠돌아 갈 것이다. 대상이 아주 약하다면 자와나 조차도 얻지 않을 것이다. 의문인식과정에서 유일한 과보의 마음은 등록 하는 마음이다. 다른 두가지는 작용만 하는 마음으로 상카라에서 기인 하지 않는 마음이다.

 

 

의문인식과정은 두가지가 있다. 순수한 의문인식과정과 오문인식과정에 이어지는 의문인식과정이다. 전자를 '독립의문인식과정'이라고 하고, 후자를 '후속의문인식과정'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는 경우이든지 인식을 하는 것은 마음이다

 

오문전향에 이어지는 의문인식 과정은 각각의 감각기관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인식과정에 뒤이은 바왕가의 상태에서 빠져 나와 감각대상을 조사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이 인식과정이 일어 나기 전까지의 마노()는 구경법의 물질만을 대상으로 삼는다. 남자나 여자와 같은 개념과는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이 순간에 구경법을 인식 하고 있다면 겉모습에 현혹 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보는 즉시 듣는 즉시 냄새 맡는 즉시 관찰해야 한다. 그리고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과 관련 하여 또 다른 생각을 유발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순수한 물질로서의 다섯가지 감각요소가 아니라 하나의 개념으로서 받아 들이게 된다. 결국 이런 인식 과정은 불선한 자극에 쉽게 노출 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즉 남자나 여자와 같은 개념으로 받아 들이게 된다면 이에 끄달려 가는 것이다.

 

문득 문득 떠오르는 생각 들

 

살다 보면 문득 문득 떠오르는 생각 들이 있다. 과거에 경험했던 것들도 있으나 전혀 경험하지 못하였던 것들도 때때로 떠오른다. 경험은 했으나 기억하지 못하였을 수도 있다. 또는 과거 아득한 전생의 기억의 단편일 지도 모른다. 이렇게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나 흘러가는 생각 들은 나의 의지와 상관 없이 불쑥 불쑥 튀어 나오기도 한다. 심지어는 꿈속에서 조처 나의 의지와 관계 없이 비디오 테이프 돌아 가듯이 의식 전환이 일어나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

 

보는 대상 역시 마찬가지이다. 무언가를 보고 싶어서 본다기 보다 보여져서 보는 것이다. 눈만 뜨면 모든 것이 보는 대상이 된다. 듣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냄새 맡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이 다섯가지 감각과 생각은 나의 의지와 관계 없이 마음의 대상이 된다.

 

오문전향이나 의문전향 그리고 자와나를 다른 마음과 달리 무인작용심이라 한다. 원인 없이 작용 하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가 있는데 이들 마음 만은 원인 없이 나오는 마음이다. 의도 하지 않고 단지 보기만 했을 때도 무인작용심이고 어떤 대상에 재빠르게 돌진 하는 자와나 역시 원인 없이 작용만 하는 마음이다. 그러고 보면 의도가 개입 되지 않은 마음을 무인작용심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흔히 아라한의 마음과 부처님의 마음을 무인작용심이라 하는데 의도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업을 짖지 않았다라는 말과 같을 것이다.

 

과보심을 만들지 않으려면

 

밤꽃이 필 무렵이면 밤꽃냄새가 진동 한다. 그 냄새를 맡고 사람마다 마음에 어떤 작용이 일어 날 것이다. 단지 "밤꽃 냄새가 나는 구나"라고 맨느낌으로 받아 들인다면 결정하는 마음으로 끝날 것이다. 그런데 이 냄새를 맡고 불선한 마음이 일어 난다면 어떤 단어가 생각 날 것이고 결국은 그 단어의 개념의 작용으로 인하여 과거의 온갖 경험들이 촉발 되어서 수천 수만가지 마음이 폭발하듯이 일어날 것이다. 작은 연못의 바닥에 있는 진흙이 일어나듯이 순식간에 흙탕물로 범벅이 되는 것과 같다. 보는 것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보는 순간 어떤 마음이 개입 되다면 자와나와 등록 단계를 거쳐서 또 다른 생각을 촉발 시킬 것이다. 무언가를 보았을 때 또는 들었을 때 또는 냄새 맡았을 때 단순히 '' '' '냄새맡음'으로 그치지 않고 조사 하고 결정 하고 속행 하고 등록 하게 된다면 이미 새로운 과보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의도를 가지고 보는 것이다. 단순히 보이는 사물을  보는 것과 달리 의도를 가지고 본다는 것은 과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영화를 봄으로서 잊고 지내왔던 옛경험을 되살릴 수 도 있고 심지어 잠재의식의 깊숙한 곳에 있는 기억을 되살릴 수 도 있다. 영화에서 죽고 죽이는 칼싸움 장면을 보면 어쩌면 전생에서 기억도 떠 올려 질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감동있고 감명 깊은 영화를 보면 마음이 심란 한지 모른다. 저 밑바닥에 있는 마음을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부딪치는 대상은 모두 무인작용심이다. 원인없이 작용 하는 마음이다. 이런 마음을 단지 아는 것으로 그친다면 바로 아라한의 마음이고 부처님의 마음이라 볼 수 있다. 과보심을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볼만한 광경이 있더라도 그저 '보이는 구나 '라고 느끼고 아무리 자극적인 밤꽃냄새라도 '밤꽃냄새가 나는 구나' 라고 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나의 의지와 관계 없이 문득 문득 불현듯 생각이 떠 올랐을 때 그 생각이 선한 것이든 불선한 것이든지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그렇네' 라고 지켜 본다면 과보심으로 까지 발전 하지 않을 것이다.

 

 

 

2009-04-3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