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생과 윤회에 대하여 회의하는 사람들, 그들의 의식 수준은
세상에는 양심없고 수치심 없는 사람들이 무척 많다. 들은 이야기로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지구상에 약 십분의 일(1/10)정도 된다고 한다. 이들은 주로 ‘단멸(斷滅)론자’들로서 ‘죽으면 끝이다’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다.
내생과 윤회에 대하여 회의하는 사람들
내생과 윤회를 인정하지 않은 부류의 사람들 역시 이런 단멸론자들에 속한다. 이들은 오로지 눈에 보이는 것만 인정할 뿐이다. 자신이 아는 범위만 인정할 뿐이지 자신의 인식 범위를 벗어난 것은 인정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단멸론자들의 특징은 몸을 중요시 한다. 그리고 살아 있을 때 최대한 즐기자고 한다. 이들이 도덕적인 생활을 할 리가 없을 것이다. 집착하는 것은 감각적욕망이다. 밤의 문화를 즐기는 부류들 역시 전형적인 단멸론자들이라 볼 수 있다.
불교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이 있다.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이다. 상견은 ‘존재에 대한 갈애’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육신이 무너지고 난 뒤에도 자아는 불멸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다음으로 단견은 ‘비존재에 대한 갈애’를 말한다. 죽은 다음에는 생명의 흐름이 자동적으로 끝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들 단견론자들의 특징은 유물론적인 인생관을 토대로 하여 주로 쾌락에 탐닉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도덕적인 책임도 없다.
상견과 단견의 공통점은 나가 있다는 유신견(有身見)이다. 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욕락과 같은 감각적 욕망을 갈구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런 상견과 단견을 삿된 견해인 ‘사견(邪見)’으로 간주하고 배격한다. 그 대신에 원인과 결과의 법칙인 ‘연기법(緣起法)’으로 설명한다. 연기법을 아는 것이야말로 윤회의 고리를 끊어 버릴 수 있고, 열반 해탈 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겨자씨만한 유신견이 있어도 결코 열반 해탈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한다.
회의론자들의 구체적인 특징은
불교의 특징 중의 하나가 내생과 윤회를 인정 하는 곳이다. 연기법을 공부 하다 보면 내생과 윤회를 인정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불자중에서도 내생과 윤회에 대하여 회의적인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런 사람의 견해를 들어 보면 전형적인 단멸론이다. 부처님이 가장 경계하였던 이론 중의 하나이다.
내생과 윤회를 부정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마치 외도들이 주장 하는 것 같다. 그런 회의론자들의 특징은 무엇 일까. 가장 큰 특징은 ‘불가지론(不可知論)’이라는 것이다. 초경험적인 존재나 본질은 인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불가지론을 주장하던 사람은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 중의 한 사람인 ‘산자야(Sanjaya)’이었다고 한다.
내생과 윤회를 부정 하는 회의론자들의 구체적인 특징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자신이 잘 알고 있지 않은 사항에 대하여 의심 한다. 즉 자신이 모르는 사항에 대하여 잘 못 알고 있을 수 있다는 말도 된다. 이런 의심은 전반적으로 자신의 지적수순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지적수준을 넘어 삶의 본성에 대해 추론 하면 처음에는 의심이 생기지만 나중에는 전도된 인식에 집착 하는 회의주의자가 되어 버린다. 이런 회의주의와 전도된 인식을 갖게 되면 불법승 삼보와 연기법에 대해서도 역시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의심의 대표적인 예가 다음의 여덟가지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12연기 (빠띠짜 사무빳다, paticca-samuppada)법문 교재를 참고 해 보았다.
여덟가지 의심의 내용은
첫째,부처님에 대한 의심이다. 이 것은 “부처님은 실제로 모든 번뇌에서 벗어난 분이었을까? 아니면 제자들에게 맹목적으로 믿도록 한 보통사람이 아니었을까?”와 같은 의심이다.
둘째,가르침에 대한 의심이다. “도와 열반은 진정으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소멸을 보장 하는 것일까?” 하는 의심이다.
셋째,승가에 대한 의심이다. “진정으로 번뇌에서 벗어난 성자(아리야, Ariya)는 있기나 한 것일까? 전도된 인식과 의심을 극복한 예류자는 절대로 악처에 태어 나지 않는 다고 하는 데 과연 그럴까? 감각적 욕망과 성냄이 희미해진 일래자가 있는 것일까? 감각적 욕망과 성냄에서 완전히 벗어난 불환자가 있는 것일까? 모든 번뇌에서 벗어난 아라한이 진짜 있는 것일까?”와 같은 의심이다.
넷째,수행에 대한 의심이다. “계를 지키고 관찰 하는 수행은 더 높은 영적인 진보에 유익하고 도움이 된다는 데 과연 그럴까?”하고 의심 하는 것이다.
다섯째,과거에 대한 의심이다. “나는 과거에 존재 하였을까? 나는 과거에 왜 어떻게 존재했을끼? 나는 전생에 어떠한 사람이었을까? 나는 덩어리에서 생겨 났을까? 아니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 났을까? 와 같은 의심이다.
여섯째,미래에 대한 의심이다. “나는 죽고 나서 존재 할 것인가? 내생에 나는 어떠한 사람이 될 것인가?”와 같은 의심이다.
일곱째,과거와 미래 모두에 대한 의심이다. 복주석서에 따르면 이 의심은 삶의 수레바퀴의 과거와 미래 가운데서 현재를 가리킨다고 한다. 이 해석은 다음과 같은 니까야의 말씀과 일치 한다고 한다. “이 현생에서 자아에 대한 의심이 생긴다.” 그러한 의심에서 다음과 같이 의문이 생길 수 있다.
“나는 진정 나 자신인가? 자아는 존재 하는가? 존재 하지 않는가? 만약 존재 한다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자아인가? 그 것은 큰가? 작은가? 왜, 어떻게 자아가 존재 하는가? 그 것은 창조 되었는가? 자연발생적으로 생겼는가? 자아는 어디서 왔으며 마지막에 몸이 무너지고 난 다음에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은 과거에 대한 다섯가지 의심, 미래에 대한 다섯가지 의심, 현재에 대한 다섯가지 의심을 나타낸다. 수행자는 자아나 나가 있다는 전도된 인식에서 벗어 날 때 이러한 모든 의심들을 극복 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덟째,가장 중요한 연기법에 대한 의심이다.“상카라(行)는 정말 참된 법에 대한 무명에서 비롯 된 것일까? 재생은 정말 업을 조건으로 해서 일어 나는 것일까? 정말 내생의 악업은 해롭고, 선업은 유익할 것인가? 모든 현상에 정말 원인이 있는 것일까?”와 같은 의심이다.
이상은 마하시 사야도의 의심에 대한 견해를 요약해 본 것이다. 중요한 것은 회의주의들의 의심에 대해서이다. 즉 그들의 의심은 자아가 있다고 생각 하는 데 있다. 그런 사유는 머리 속에서만 생각 하는 ‘희론’일 뿐이다.
어떤 사람이 회의론자가 되는가
불법승 3보와 연기법에 대한 의심은 기본적으로 지적수준과 관련 되어 있다. 자신의 지적수준을 넘어 추론 하면 처음에는 의심이 생기지만 나중에는 전도된 인식에 집착 하여 회의주의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에 대하여 의심하고, 가르침에 대하여 의심하고, 성자에 대하여도 의심 하게 된다. 결국 불교의 가장 기본인 연기법도 의심 하게 되고 결국 내생과 윤회도 부정 하게 되는 것이다.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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