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명상음악

생활불교와 생활선(生活禪)을 위하여, 수행의 나라와 자비송 미얀마 버전

담마다사 이병욱 2009. 10. 10. 11:29

 

생활불교와 생활선(生活禪)을 위하여, 수행의 나라 미얀마와 자비송 미얀마 버전

 

 

 

 

 

 

 

짚신성불이라는 화두

 

잠결에 듣는 아침예불 방송은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와 같다. 아침예불이 끝나면 경전공부를 종종 듣는다. 요즘에 방송하는 경전공부는 초발심자경문이다. 스님이 되기 전에 사미승이 배우는 불서로 알고 있었으나 전국의 불자들을 대상으로 강의 하고 있다. 금일 들은 내용 중에 인상적인 구절은 짚신부처님에 관해서 이었다. 짚신부처님이란 무엇일까. 짚신부처님이 있었던 것일까 하고 의문할 지 모르겠지만 이 문구도 화두의 하나라고 한다.

 

출가 한지 얼마 되지 않은 사미승이 있었다. 하루는 어렵게 만 보이는 스승으로부터 법문을 들었는데 그 중에 한마디가 즉신성불(卽身成佛)” 이었다고 한다. 이 즉신성불이라는 말을 짚신성불로 잘못 알아 들은 사미승은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짚신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을까?” 하고 사미승은 의문에 의문을 품고 그 의문을 해결 하기 위하여 밤이나 낮이나,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일념으로 몰두 하였다는 것이다. 하나의 예에 불과 하지만 바로 이런 것이 화두라고 방송에서 스님은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보다 선어록이 더

 

우리나라는 대승불교국가이고 선불교가 한국불교를 대표 하고 있다. 고려시대만 하여도 선종과 교종이 함께 발전 하였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선종 위주로 흘러 왔다고 이야기 한다. 물론 여기에는 조선의 숭유억불정책에 따라 불교가 철저 하게 탄압 받아 산중불교로 될 수 밖에 없었던 역사적인 요인이 있을 수 있다.

 

이런 선불교는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견성성불(見性成佛)’ ‘즉신성불(卽身成佛)’등을 특징으로 한다. 이와 같은 특징은 여러 모로 교종과 대비 된다. 경전을 읽고 암송하는 것 보다 수행을 더 중요시 하고, 인간의 내면의 본래부처를 발견하여 성불한다는 매우 현실적이고 현세적인 세계관을 가지게 된 것이다.

 

또한 선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 보다 선어록과 같은 조사스님의 가르침 위주로 되어 있어서 또한 조교(祖敎)’라고 불리운다고 한다. 그런 선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방법이 간화선이라는 것이다.

 

평생 상구보리 한다는데

 

라디오에서 말하기를 잡힐 듯 잡히지 않을 듯, 알 듯 모를 듯, 애타는 심정으로 화두를 들다 보면 언젠가 열쇠로 자물쇠를 열어 문을 활짝 열어 재칠 그런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한다. 바로 그런 날을 위해서 일까 전국의 선방에서는 안거철만 되면 수천명의 스님들이 방부를 튼다고 한다. 이런 현상을 보고 어느 중진스님은 한국불교가 단군이래 최대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과연 그럴까. 도시에서 체감 하는 불교는 없다. 그 어디에도 불교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불교가 지역사회를 위하여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이 교회와 매우 대조 되는 부분이다.

 

화두일념으로 견성성불 할 그날을 위하여 정진하다 보면 평생이 다 간다고 한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거창한 보살사상을 가진 대승불교에서 하화중생을 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상구보리만 하다가 선방에서 일생을 마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도시에서 애타게 부처님법을 갈망하지만 아직 견성성불 하지 못한 수행자들에게 있어서 법보시는 엄두가 나지 않은 현실일 것이다.

 

방송에서 스님은 화두를 제대로 들면 7일이면 깨우칠 수 있다고 말한다. 7일이면 깨우칠 화두를 평생들고 있다가 법보시 한번 못해 보고 선방에서 일생을 마치는 수행풍토는 분명히 방법에 있어서 의문을 제기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화두타파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라면 재가불자들은 아예 간화선은 꿈조차 꿀 수 없는 어려운 것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이 이미 개척해 놓은 길로

 

불교가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불도에 이르는 명확한 길은 없는 것일까. 그러나 그런 우려는 초기불교를 접하면서 말끔히 사라졌다. 부처님은 애매하게 말씀 하지 않았고 모든 것을 명확하게 말씀 하셨다. 그리고 깨달은 길로 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놓았다. 따라서 부처님이 닦아 놓은 그 길로 가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어렵게 간 길을 평생 걸려서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부처님이 간 길을 잘 정리 해 놓은 것이 니까야아함경과 같은 초기경전이다. 그리고 초기경전에 대한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해설해 놓은 것이 아비담마청정도론과 같은 논장이다. 이와 같은 경장과 논장이라는 지도만 있으면 부처님이 이미 닦아 놓은 길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하여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는 수없이 많이 나온다.

 

수행 방법 또한 마찬가지이다. 부처님이 발견 하였다는 또는 부처님을 깨달음에 이르게 하였다는 수행법이 전승 되어 왔기 때문이다. 1987년 이후에 우리나라에 알려진 수행법이 위빠사나이다. 화두일념으로 육단심(肉團心)과 함께 용맹정진 하는 일부 특수한 신분의 전유물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는 위빠사나는 대표적인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와 같이 누구나 갈 수 있는 길을 내버려 두고 굳이 평생 상구보리만 하다 일생을 마쳐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언제 하화중생 할 것인가.

 

사대주의인가 자주불교인가

 

어떤 이는 남방상좌부불교를 거론 하는 것은 불교사대주의가 아니냐고 말한다. 사대주의의 사전적인 의미는 주체성이 없이 세력이 강한 나라나 사람을 받들어 섬기는 태도라고 나와 있다. 교학을 배우기 위하여 스라랑카에 가고, 수행을 배우기 위하여 미얀마에 가는 것이 사대주의일까.

 

사대주의 전형이라면 중국사대주의를 떠 올리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질서가 유지된 팍스시니카(Pax-Sinica)’시대에는 중국의 문화와 종교를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때 도입된 사상이 유교와 불교이다. 최근의 팍스아메리카나시대는 어떤가. 미국의 문화와 종교 역시 힘을 배경을 해서 들어 오게 되었다. 그래서 기독교가 득세하고 기독교 세상이 되었다.

 

제국주의와 함께 들어온 문화와 종교가 전형적인 사대문화이다. 그러나 스리랑카나 미얀마가 제국주의 국가는 아니다. 따라서 이들 나라에서 초기불교를 도입 한다고 해서 결코 사대주의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들 나라에서 부처님의 원음과 부처님의 수행법을 도입 함으로 해서 중국불교의 아류로 취급 받고 있는 불교 대신에 자주불교를 실현 할 수 있는 좋은 계기 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수행법과 관련하여 미얀마가 주목 받고 있는 이유는 부처님의 수행법이 고스란히 보전 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 수행방법은 테크닉만 개발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교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주로 아미담마와 청정도론과 같은 논서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아비담마길라잡이를 보면 아비담마가 위빠사나이고, 위빠사나가 아비담마라고 하는 이유는 교학과 수행이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말과 같다. 불립문자를 표방하면서 즉신성불을 짚신성불로 잘못 알아 들어 화두를 드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얀마로 떠나는 이유는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의 남방불교국가 3국중에 미얀마를 수행의 나라라고 부른다. 해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미얀마로 떠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 마디로  한국불교의 수행 방법에 만족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간화선과 같은 수행방법에 만족하였다면 굳이 저 먼 더운 지방으로 도를 구하려 갈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간화선과 이혼하고, 위빠사나와 재혼 하였다.

 

이말은 무슨 뜻일까. 간화선을 이혼한 전처에 비유하고, 위빠사나와 새로 살림을 차렸다는 비유이다. 비슷한 예로서 대승불교와 상좌불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유하기도 한다.

 

상좌불교가 본처라면, 대승불교는 후처이다.”

 

옛날 바람 피는 남자들이 본처가 있음에도 불구 하고 후처를 얻는 경우는 두가지 케이스라 한다. 첫번째 케이스는 본처가 여러모로 만족스럽지 못하였을 때이다. 즉 개화기에 억지로 어린 시기에 시골에서 장가간 사람이 커서 일본유학을 가게 되어 신여성을 만나 살림을 차린 경우가 이게 해당 될 것이다. 두번째 케이스는 잘 교육받은 양가집 출신의 본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개인적인 욕심으로 후처를 둔 경우이다. 이때 후처 보다 본처가 더 똑똑하고 교양이 있다면 후처는 비난 받게 될 것임에 틀림 없다. 상좌불교가 대승불교 보다 교리적으로나 역사적인 정통성으로 보나 훨씬 나은 것을 본처와 후처의 비유를 들어 설명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어떤 짖을 하고 있는지

 

한국불교의 현실은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 불교가 없다는 사실이다. 산 좋고, 물 맑고, 공기 좋은 산중에만 불교가 있고 도시에서 부처님 법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누구나 쉽게 부처님 법을 만나려면 법을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아쉽게도 법을 전하는 승가사회에는 산중에서 오로지 화두 일념으로 평생 상구보리 하다 보니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 하화중생할 여력이 없는 것이다.

 

다행히도 이런 때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인하여 지구촌이 글로벌화 됨에 따라 부처님의 생생한 원음과 수행법이 고스란히 간직된 초기불교를 접하게 되었다. 불자들이 비록 20년 밖에 되지 않은 짧은 기간이지만 그 반응은 놀라울 정도로 관심은 지대하다는 것이다.

 

그런 남방 상좌불교의 가르침은 철저하게 생활과 밀접 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상을 분리해서 지속적으로 관찰 한다는 위빠사나는 대표적인 객관명상이다.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내가 어떤 짖을 하고 있는지 냉철하게 제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을 보는 현상은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유럽이나 미국에서 지식층 위주로 보급 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가 될 것이다.

 

생활불교와 생활선을 위하여

 

교학이 수행이고, 수행이 교학인 것이 초기불교의 가르침이다. ‘온처계근제연으로 표현되는 교학과 ‘37조도품으로 불리워지는 수행법은 아비담마나 청정도론과 같은 논장에 잘 체계화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84000법문을 통하여 모든 것을 명확하게 이야기 하셨고 그 후에 부처님의 제자들이 이를 논장으로 좀 더 구체화 하였다. 따라서 불자들은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이 제시한 길을 가면 된다. 멀리 돌아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깨달은 성자를 귀의처로 삼고 피난처로 삼아 일상에서 신행생활 하는 것이 생활불교이고 생활선일 것이다.

 

 

 

 

 

자비송 미얀마 버전(The Chant of Metta, ,  Myanmar)

 

 

 

 

 

  

 

2009-10-1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