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불자들이 1%만 사본다면, 각묵스님의 상윳따니까야 완간 소식을 듣고

담마다사 이병욱 2009. 11. 21. 09:50

 

불자들이 1%만 사본다면, 각묵스님의 상윳따니까야 완간 소식을 듣고

 

 

 

일상에서 벗어나 조금만 눈을 돌려도 수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스펙트럼을 목격 할 수 있다. 당장 지하철입구에서 구걸하는 사람도 볼 수 있고, 처참하게 일그러진 모습으로 동정을 바라는 사람도 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을 볼 때 지옥이 따로 없다고 생각 한다.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 지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처참한 곳, 불행한 곳, 파멸처가 반드시 몸이 무너진 다음에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누구나 그런 상태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이다.

 

재가자 경(Gihi-sutta)을 보면

 

처참한 곳, 불행한 곳, 파멸처는 구체적으로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초기경에서 이 문구를 발견 하였다. ‘가려 뽑은 앙굿따라니까야에서이다. 여러권으로 된 앙굿따라니까야에서 재가자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경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이 책을 동영상으로 강의한 각묵스님에 따르면 경의 선별기준은 따로 없다고 한다. 초심자들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도록 여기저기에서 교훈이 될만한 내용을 발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 경들 중에 마음을 묶어 두는 내용이 바로 처참한 곳’ ‘불행한 곳’ ‘파멸처라는 말이었다. 이 용어가 나오는 경의 이름은 재가자 경(Gihi-sutta)’이다. 이 경의 핵심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지옥을 다 하였고 축생의 모태를 다하였고 아귀계를 다 하였고 처참한 곳, 불행한 곳, 파멸처를 다 하였다. 나는 흐름에 든 자(예류자)이니, 악취에 떨어지지 않고 해탈이 확실하며 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자이다.’

 

 

경에서 이런 내용이 반복된다. 즉 부처님과 부처님법과 부처님법을 실천 하는 상가에 의지 하고 오계를 지키면 지옥, 축생, 아귀와 같은 삼악도를 면할 뿐만 아니라 결코 처참한 곳, 불행한 곳, 파멸처에 태어 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또 예류자가 되어 확실하게 해탈 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라 볼 수 있다. 재가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처참한 처지에 빠지고 싶지 않고 또 불행하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파멸도 원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항아리 경’ ‘소금덩이 경’ ‘졸고 있음 경

 

문명이 발전 할수록,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불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목말라 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기란 쉽지 않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펴는 곳은 산중에나 있을 뿐 도시에서 찾아 보기 힘들다. 설령 산중에 있는 절을 찾아 간다고 할지라도 그다지 만족스러워 하지 못한다. 부처님 법을 이야기한다고 하지만 주로 개인적인 신변이야기로 그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세상은 많이 바뀌었다. 정보통신의 발달로 인하여 또 하나의 공간이 생겼기 때문이다. 네트워크만 연결되어 있다면 누구나 원하는 정보를 찾을 수 있고 또한 서로 공유 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정보통신과 인터넷 시대에 가장 혜택을 많이 받는 종교가 불교일 것이다.

 

법의 종교인 불교에서 84천가지나 되는 부처님법을 원하기만 하면 누구나 알 수 있다. 과거 승가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부처님법을 재가자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렇게 되기 까지는 선구자가 없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역경자들이다.

 

한자문화권 시대의 불교는 한자로 되어 있어서 재가자들의 접근이 가능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역경자들의 노력에 의하여 원어를 한글로 번역하여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가려뽑은 앙굿따라니까야도 이러한 역경자의 의지가 들어간 작품이라 볼 수 있다.

 

한글역경서의 특징은 보기가 매우 편하다는 것이다. 한글을 알면 누구나 이해 할 수 있는 내용이다. 경의 이름 또한 매우 소박하다. 경의 이름들을 보면 항아리 경’ ‘소금덩이 경’ ‘졸고 있음 경과 같이 일상적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는 말이다.

 

이들 경전을 보면 한자투의 대승경전과 비교하였을 때 더욱 더 친근감이 있다는 것이다. 활자체 또한 큼지막하여 나이든 분들에게도 부담이 없다. 더구나 이런 경들은 따로 순서가 필요 없다. 책을 펼치는 대로 읽으면 되기 때문이다. 부처님법의 특징이 들어가는 문은 다를지라도 나오는 문은 다 똑 같은 이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자주불교를 위하여

 

최근 초기불전연구원에서 상윳따니까야를 번역하였다고 발표 하였다. 모두 6권에 이르는 방대한 경전을 번역한 사람은 각묵스님이다. 초기불전연구원의 카페(http://cafe.daum.net/chobul)에 있는 내용에 따르면 대림스님과 함께 릴레이 번역을 하고 있는데 번역 현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부처님이 길게 설하신 디가니까야는 전 3권으로 2006년에 각묵스님이 번역하였다.

 

둘째, 숫자별로 모은 경인 앙굿따라니까야는 전 5권으로 2006-2007년에 대림스님이 번역하였다.

 

셋째, 부처님이 주제별로 설하신 상윳따니까야는 전 6권으로 2009년에 각묵스님이 번역하였다.

 

넷째, 중간길의 가르침을 모은 경인 맛지마니까야는 전 3권으로서 대림스님이 번역을 마치고 출간 준비 상태이다.

 

 

 

 

 

15년 장기계획으로 팔리어로 기록된 부처님 말씀을 우리말로 옮기고 있는

각묵 스님과 대림 스님(오른쪽부터) 그리고 후원자인 황경환씨(출처 http://cafe.daum.net/chobul)

 

 

 

이렇게 4부니까야가 완전하게 한글로 번역하게 되었을 때 한결같이 나오는 이야기는 자주불교이다. 자주불교의 의미는 이중 삼중으로 한역된 대승경전에 의지 하지 않고 부처님의 친설이 담긴 독자적인 한글경전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흔히 한국불교를 중국불교의 아류라고 말한다. 그 정점이 선종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불교를 대표하는 종단이 중국화된 불교의 대표격인 종선의 임제종계열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조사스님이나 선사의 어록이 부처님말씀보다 더 자주 언급된다. 또 그 부처님말씀 또한 고따마 붓다의 말이라기 보다 대승경전에서 말하는 부처님이다. 불교를 일으킨 인간 고따마 붓다가 아닌 대승논사들이 자신의 종교적인 체험을 부처님의 이름을 빌어 말한 부처님인 것이다.

 

그러나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인하여 부처님의 원음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 발견한 것이다. 그런 부처님을 말씀을 모아 놓은 경전이 니까야이다. 또 경전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부처님제자들이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것이 논장이고 그 대표격이 아비담마라 볼 수 있다.

 

불자들이 1%만 사본다면

 

한 사람의 전문가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또 그 노력한 만큼 시간이 투자 되어야 한다. 이렇게 1 2 3….세월이 흐르고 흐르다 보면 어느새 그 분야에 있어서 전문가가 되어 있다. 한글 역경사업을 주도 하고 있는 두분 스님도 그런 케이스 일 것이다. 이제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전문가 스님들이 아직도 할 일이 많다고 한다. 무려 2020년까지 계획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글로 니까야가 번역되어 나온 것은 불과 최근 몇 년에 지나지 않는다. 향후 한국불교 천년을 생각 한다면 태동기에 불과 할 것이다. 이번 생의 목표를 역경사업에 두고 있는 스님들을 도와 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그 것은 번역된 책을 사보는 것이다.

 

불자들이 한권씩만 산다고 해도 천만권이 될 것이다. 아니 천만 불자 중에 1%만 사도 10만권이다. ‘항아리 경’ ‘소금덩이 경’ ‘졸고 있음 경과 같이 친근한 우리말 경전을 머리 맡에 놓고 언제든지 아무 곳이나 펴 볼 수 있는 그런 경전을 하나씩만 가지고 있다고 해도 삶은 한결 풍요로워 질 것이다. 더구나  처참한 곳, 불행한 곳, 파멸처도 면할 수 있다고 하는데.

 

 

 

 

2009-11-2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