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한국불교에서 고따마 붓다의 위치는, 정목스님의 마음으로 듣는 음악에서

담마다사 이병욱 2009. 11. 17. 12:32

 

한국불교에서 고따마 붓다의 위치는, 정목스님의 마음으로 듣는 음악을 듣고

 

 

 

 

 

 

 

평소 즐겨 듣는 음악프로가 있다. 불교방송에서 진행 하는 마음으로 듣는 음악이다. 이 프로는 불자들에게 매우 인기가 좋아 종종 공개방송 형태로 청중을 몰고 다니는 불교방송의 간판프로라 볼 수 있다.

 

낭송된 참나의 내용은

 

최근 프로그램 개편이 있고 나서 토요일과 일요일의 주말에만 방송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진행자는 여전히 정목스님이다. 그런데 요일이 바뀌고 나서 커다란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그 것은 다름아닌 법문 내용이다. 프로그램을 끝낼 때 말한 마지막 멘트가 이를 말해 준다.

 

거룩한 불성에 경배 합니다.”

 

평소 방송에서는 알아차림에 대하여 강조를 많이 하였는데 그 말은 쑥 들어 가고, 대신에 진여, 불성, 견성, 참나와 같은 선종의 근본종지에 관한 용어를 많이 사용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중에 참나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본인의 블로그에 나온 내용을 마치 반박이라도 하는 듯이 들렸다. 방송 전날 에 참나와 무아에 관한 글 (http://blog.daum.net/bolee591/16154441)을 올렸기 때문이다. 물론 커다란 착각일 수 있다. 그런 참나에 대한 내용을 인터넷 불교방송 사이트에서 다시 듣기로 듣고 일부를 옮겨 보았다.

 

 

자비로 지켜 보는 의식이 있으니 

항상 거기에 있어 왔고,

언제나 현존 하는 것이 참나이다.

그 것은 몸도 아니고, 생각도 아니고,

감정도 아니고, 대상도 아니고,

세상도 아니고, 보이는 것도 아니다.

참나는 영원히 현존하여 보는 자이고,

일어 나는 모든 것을 주시 하는 자이고,

모든 것을 지켜 보는 목격자이다.

 

 

영원히 변치 않고 항상 자비로서 우리를 지켜 보는 자가 참나라고 말하고 있다. 참나라는 용어 대신에 성품이나 불성, 본래면목을 집어 넣어도 같은 의미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방송 마지막 멘트에 거룩한 불성에 경배 합니다라는 말이 성립되는 것이다.

 

참나와 절대자는 어떤 관계일까

 

경배의 대상으로서의 불성은 인격화 된 것을 말한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불성, 진여, 불성, 법성등이 인격화 되면 비로자나부처님이 된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에서 진리가 인격화 되면 야훼가 되고, 이슬람교에서는 알라가 된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모든 종교는 다 똑같다고 이야기 한다. 특히 진보적인 신학자는 아예 노골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엇보다 종교를 자기중심적인 나를 비우고 내 속에 있는 참 나를 찾는 길로 받드는 것이다. 내 속에 있는 참나는 결국 절대자이기에, 그 절대자와 내가 하나라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오강남교수, 불교평론 2009년 가을,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872)

 

 

참나와 절대자를 동일시 하는 것이다. 참나에 대한 설명문에 참나 대신에 야훼를 넣어도 그 의미가 동일 할 것이고, 또 그 자리에 알라를 집어 넣어도 같은 뜻이 될 것이다. 이런 개념은 미국의 진보적 신학자의 폴 틸리히의 견해와 또 일치 한다.

 

폴 틸리히는 하나님의 개념을 ‘존재 자체’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기독교의 초월적 인격자로서의 하나님의 개념과는 다른 견해를 내어 놓은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하느님은 진리 자체(verum ipsum)·선 자체(bonum ipsum)·존재 자체(esse ipsum)로서 인간이 지구상에 출현하여 하느님 물음을 묻기 전에도 하나님이셨다.” 라고 말한다. 앞서의 정목스님이 낭송한 참나의 개념과 너무 유사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기독교의 신학자들은 자신의 신과 불교의 참나와 같은 개념인 불성, 진여, 법성등을 접목 시키려 하는 것이다.

 

지켜보는자로서의 부처님은 금강경에서도 나타난다. 여래실지실견(如來悉知悉見)이라는 말이 있다. 부처님은 다 알고 있고 다 보고 있다라는 내용이다. 이런 말은 법회에서도 자주 들을 수 있다. 부처님이 우리의 행동과 생각을 다 지켜 보고 있다는 법문을 지주 듣기 때문이다.

 

이런 법문을 들으면 마치 유일신교의 절대자가 지켜 보고 있다라는 생각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고교시절의 미션스쿨에서 수도 없이 들었던 내용과 너무나 유사 하기 때문이다. 그 법문에서 부처님 대신에 하나님으로 용어를 대체 하여도 법문의 차이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유사하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진보적인 신학자가 참나와 절대자를 동일시 했는지 모른다.

 

동아시아에서 믿는 불교는

 

동아시아에서 믿는 대승불교는 부처님 당시의 불교와 매우 차이가 난다. 부처님이 설한 법보다는 조사스님들의 어록을 더 중시 하는 불교가 중국화된 선불교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의 어록이라 볼 수 있는 니까야아함경같은 초기경전 대신에 육조단경과 같은 조사스님들의 말씀이 더 우선 한다.

 

단지 마음을 닦아서 자기의 본성을 보아 부처를 이룰 것을 주장 하는 선종의 종지는 여래장사상과 또한 맥을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래부터 절대 청정하여 영원히 변함없는 깨달음의 본성인 자성청정심이 있다고 말하는 여래장 사상과 매우 흡사 하다는 것이다.

 

자성청정심, 불성, 진여, 본마음, 진아, 참나와 같은 영원히 변치 않는 마음이 있어서 이 마음이 우리를 지켜 보고 있다고 생각 하여 인격화 한다면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고따마 붓다는 어디에

 

동아시아 불교에서 인간 고따마 붓다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 자리에 조사스님의 말이나 타방 부처님 또는 원력보살이 자리 잡고 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동아시아에서 고따마 붓다는 ‘3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동아시아 불교에서 바라보는 초기불교에 대한 태도는 다음의 글에서 잘 나타나 있다.

 

 

소승에서는(여기서 소승은 남방 상좌부 불교를 지칭하지 않음) 법을 바라봄에 법은 무상이며 무아이며 생멸이며 번뇌며 괴로움이라고 보지만 대승에서는 모든 법은 궁극적으로 자성이 공하여 무상, 무아, , 생멸, 번뇌로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생멸이며 열반이며 청정이며 즐거움이라고 봅니다. 소승은 해탈과 열반의 경지가 오온 한 개인에서 실현되지만 대승은 해탈 열반이 그대로 법계와 함께 실현되어 만법이 곧 부처의 경계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열법사, 미디어 붓다 http://www.mediabuddha.net/detail.php?number=4569&thread=24r25)

 

 

교계 인터넷신문에 실린 어느 법사의 글이다. 그는 단지 한 개인의 오온에서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함으로 얻어지는 해탈을 소승으로 보았고, 자성이 공함을 봄으로써 얻게 되는 영원한 즐거움을 대승으로 본 것이다.

 

대승불교의 진보적인 재가 법사로서 평가 받고 있는 그 법사가 초기불교의 부처님의 말씀과 정반대인 상락아정을 주장 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인간 고따마 붓다가 깨달은 법을 소승으로 간주 하고, 대승논사들이나 조사스님들이 주장 하는 불성, 법성, 진여, 자성청정심과 같은 마음을 최상승으로 두고 있는 것 또한 동아시아 불교에서 주장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렇게 불교의 교주가 형편 없이 뒤로 밀려 있는 현상을 볼 수 있는 곳이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한국불교에서 조사스님들의 어록을 많이 이야기 하지만 고따마 붓다 이야기는 그다지 많지 않다. 부처님을 이야기 할 때도 자세히 들어 보면 타방세계의 부처님이거나 또 다른 원력 부처님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고따마 붓다는 무엇을 설하였을까

 

한국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님은 인간 고따마붓다 한 분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수 많은 부처님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부처님은 불성, 진여, 법성, 본래면목, 자성청정심, 진아, 참나와 같은 용어로 설명이 되고 또한 한마음이며 합일 해야 될 경배의 대상이 됨을 방송을 통하여 알수 있었다.

 

그러나 초기경전에 따르면 불성과 같은 여래장 계열의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성이나 진여와 같은 용어는 오로지 여래장 계열의 대승불교나 선불교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초기불교에서 고따마 붓다는 무아연기를 설하였지 불성이나 진여, 진아, 참나와 같은 영원히 변치 않는 개념에 대하여 결코 설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2009-11-1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