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참나 vs 무아, 대승불교와 초기불교의 키워드를 보면

담마다사 이병욱 2009. 11. 14. 12:41

 

참나 vs 무아, 대승불교와 초기불교의 키워드를 보면

 

 

 

 

 

 

 

 

도시에 살다 시골에 가게 되면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이 보여 진다. 간혹 가다 사람이 지나 가거나 자동차가 나타났을 때 변화가 있어 보이지만 이들이 사라지면 다시 또 정지화면처럼 움직임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학창시절 방학 때 종종 시골의 친척집에 놀러 가곤 하였지만 단 하루밤 이상 자 보지 못하고 올라 오곤 하였다. 한마디로 심심하고 재미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산중에서 수행을 하고 있는 출가수행자의 경우는 어떠할까.

 

산속에서 홀로 살아 가는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사찰은 대부분 산중에 있다. 그 것도 심산유곡에 있는 사찰은 좀처럼 그 자태를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마치 깊은 산속에 숨어 있는 듯한 암자에서 수행하는 수행자는 심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깊은 산중에서 수행을 한 스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심심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세속에서 느끼지 못하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즐거움은 삼매의 즐거움이라 한다. 세속에서 누리는 온갖 감각적 즐거움이 좋다고 하지만 삼매의 즐거움 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들이 깊은 산속에서 홀로 살아 가는 이유가 바로 그런 데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하화중생 할 날은 언제

 

몇 년 전 TV에서 어느 노비구니 스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평생 선방에서 화두를 들고 있었지만 결론은 잘 모르겠다는 말이다. 될 듯 될 듯 하면서 놓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한 이야기이다.

 

출가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 마디로 깨달음을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불교의 가장 큰 목표인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일 것이다. 그래서 공부를 하고 선정삼매에 들어 가는가 하면,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화두를 놓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공부를 하기 좋은 곳이 산좋고 물맑고 공기좋은산중이라는 것이다. 그 곳은 세속과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세속의 오염원으로 부터도 차단 되어 있다. 그런데 그런 공부를 하다 평생을 다 보낸 다는 것이다. 대승불교의 가장 큰 이념이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인데, 평생 상구보리만 하다 보면 언제 하화중생 할 날이 있을지 의문 스럽기도 하다.

 

선종의 깨달음이란

 

불교방송의 불교강좌 시간에 선사들의 이야기와 육조단경을 강의 하고 있다. 병조 교수의 강의를 들어 보면 육조혜능이래 선사들이 강조 하는 사항은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것이다. 견성성불이란 자기의 본성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라는 뜻이다. 이것이 선종의 근본 종지이다. 육조단경에 나오는 본성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너희들의 본성은 마치 허공과 같은 것이니, 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것을 일컬어 정견(正見)이라 하고,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것을 일컬어 진지(眞知)라 한다. 푸르고 누렇고, 길고 짧은 것도 없으며, 오직 본원(本源)이 맑고 깨끗하다는 것과 깨달음의 본체가 원만하고 밝다는 것을 보기만 하면, 이것을 일컬어 '본성을 보아 부처를 이루었다'라고 한다."

 

 

, 즉 자기의 본성이 원래 형체도 없고 근본도 없으며, 머무는 곳도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부처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견성성불'이라 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모든 사람이 부처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독경이나 좌선·예불·계율과 같은 수행의 형식을 중요시하지 않고, 단지 마음을 닦아서 자기의 본성을 보아 부처를 이룰 것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또한 대승기신론에서도 볼 수 있다. 마음의 거울이 있는데 거 거울이 오염되어 있어서 깨끗이 닦으면 자신의 본래의 마음을 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자신의 본 마음을 보기 위한 구체적인 수행방법으로서 간화선이 있고, 간결하고 역설적인 문구인 화두를 드는 것이라 한다.

 

불교가 막연해 보이는 이유는

 

선종의 종지에 따르면 진여, 불성과 같은 변하지 않는 존재 그대로의 모습을 보는 것이 깨달음이고 부처를 이룬다는 말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불성, 공성을 보게 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문적으로 수행을 하는 출가수행자가 아닌 재가신자들이 견성성불 하기는 쉬워 보이지 않는다.

 

우선 불성이나 ‘공성라는 말 자체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매우 주관적이고 구체적이지 않은 것이다. 더구나 선사들이 말하는 번뇌즉보리생사즉열반과 같은 불이사상(不二思想)은 더욱 더 깨달음이란 특수한 신분의 사람들이나 하는 것처럼 느껴진 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추상적이고 개념적이고 어느 면에 있어서 선문답하는 것처럼 막연하게 느껴 졌던 것이 이제까지 접해 왔던 불교의 모습이었다. 무언가 보일 듯 하면서도 보이지 않고,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은 모습이 한국불교의 현주소이었다면 과장된 표현일까. 화두참구의 어려움에 대한 어느 노비구니 스님의 말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불교가 막연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나의 마음속에 진실한 내가 있다라는 유아사상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불성, 진여와 같은 참나를 찾아 떠 나는 여행이 오늘의 한국불교의 본 모습으로 보여 진다는 것이다.

 

초기불교를 접하고

 

초기불교를 접하고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무아(無我)이다. 선종에서 진정한 참나를 찾자고 이야기 하는 반면에 초기불교에서는 나라고 할 만한 그 어떤 것도 없다고 이야기 한다.

 

만일 초기불교 하는 사람이 불성이나 공성, 진아, 주인공, 참나를 주장 한다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초기불교는 철저하게 몸과 마음을 해체하여 보기 때문에 아()와 같은 개념이 발 붙일 틈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현상에 대하여 찰나생’ ‘찰나멸’ ‘조건상속한다는 대 전제하에 모든 이야기가 전개 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 다면 불성이나 진여, 진아, 참나는 언어로만 존재하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개념의 특징은 시간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개념은 법과 같이 찰나생 찰나멸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 하기 때문에 영원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불성, 진여와 같은 개념은 영원히 존재 하는 참나를 찾는 여행이라 볼 수 있다.

 

불성과 진여와 같은 참나를 만나는 길은 삼매에 들어 가는 것이다. 삼매에 든다는 것은 하나의 개념을 대상으로 마음을 내는 것으로 그 낸 마음이 삼매중에 지속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심해탈(心解脫)’이라고 한다. 그러나 삼매에서 나오게 되면 그 해탈은 깨지게 되어 있다. 영원하지 않고 무상 한 것이다.

 

해체하고 분해해서 보면

 

진정한 해탈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심해탈이 아닌 혜해탈(慧解脫)을 이루어야 한다고 한다. 혜해탈이란 지혜가 뒷받침된 해탈을 말한다.

 

혜해탈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든 것을 해체하고 분해해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해체하고 분해하는 것이다. 그것이 반야심경에도 나오는 오온이다. 색수상행식 이렇게 다섯무더기로 분해 해서 보면 열반을 포함하여 82가지 법이 나온다. 이법이 구경법이다. 궁극적 실재라는 것이다.

 

열반을 제외한 81법의 특징은 찰나생 찰나멸이다. 따라서 무상한 것이다. 그리고 오래 머물지 않아 괴로운 것이고, 또한 나라고 주장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법의 무상 고 무아를 통찰 하는 것이 혜해탈이고 윤회를 벗어 나는 지름길이라 한다. 그 수행방법은 단지 지켜만 보는 것이다.

 

단지 지켜만 봄으로써

 

단지 지켜만 봄으로써 혜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이야기는 매우 파격적이다. 대신심, 대분심, 대의심을 내어 확철대오 하고야 말겠다는 비장한 마음으로 마치 원수를 만나면 단칼에 두동강 내듯이 화두를 타파 해야 되겠다는 마음과 대비 되는 방법이다. 그저 바라 보고 지켜 보면서 그런가 보다’ ‘그렇네하면서  더 이상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살아 가면서 그대로 현실세계에 적용 할 수 있다. 상대방이 설사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내 뜻대로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줄 아는 것이다. 현실을 인정 하고 시작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모든 것을 그러려니하고 생각 할 수 있다. 상대방의 축적된 성향이나 기질을 인정해 주자는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초기불교의 수행법인 위빠사나는 생활과 매우 밀접한 수행방법이다. 깨달음을 이루는 수단으로서 뿐만 아니라 생활에서도 유용하게 적용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기불교는 생활불교 내지 생활선의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2009-11-1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