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전도의 황금어장을 공략해야 하는 이유, 부처님의 전도선언과 불자의 사명

담마다사 이병욱 2009. 11. 6. 13:31

 

전도의 황금어장을 공략해야 하는 이유, 부처님의 전도선언과 불자의 사명은

 

 

 

여호와의 증인을 보면

 

사무실에 앉아 있다 보면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을 열고 들어 오지만, 어떤 이들은 들어 오지 않고 들어 오라고 해야 만 들어 오는 사람들이 있다. 전도 하러 나온 사람들이다. 주로 여호와의 증인신도들이다.

 

이들은 항상 2 1조로 다닌다. 차림새를 보면 최고로 잘 차려 입은 복장이다. 남성의 경우 반드시 정장 차림이고, 여성의 경우 역시 보통 사람들이 입는 옷 이상의 차림새이다. 얼굴은 밝은 표정이고 웃는 얼굴에 행복이 넘쳐 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젊은 사람들 보다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이 대부분인 이들은 우선 준비한 팜플렛부터 나누어 준다. 팜플렛을 보면 그림이 나오는데 매우 행복해 보이는 듯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이들이 전도 하는 목적은 자신의 종교를 믿으면 행복해 진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전도의 목적은 무엇일까.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고 이익이 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겉 모습으로 나마 여호와의 증인의 전도 방식은 일정 부분 먹혀 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행복해 보이는 그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 나도 그 종교를 믿으면 행복해 지겠거니 생각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팜플렛에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의 그림 또한 전도 효과를 높여 줄 것임에 틀림 없다.

 

전도는 전도 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달려 있다. 전도 하는 사람들은 전도 대상이 되는 사람 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어야 하고 더 많이 알고 더 선망이 대상이 되는 위치에 있어야 교화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최초의 전도사는

 

전도가 기독교의 용어로 굳어져 있다시피한 현실에서 불교에서도 전도라는 말을 사용 한다. 그러나 요즘의 불교는 전도 라는 말 대신에 포교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그러다 보니 전도가 마치 기독교의 전용 용어로 굳어진 듯하나 알고 보면 먼 옛날부터 사용되었던 불교용어 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흔적을 초기경전에서 발견 할 수 있다. 부처님의 전도 선언이 그것이다. 부처님의 전도선언에 관하여 불광사 법회에서 설한 마성스님의 법문(http://www.bulkwangsa.org/movie/?sdir=recom_movie&tfile=view&SID=20)을 참조 하여 보았다.

 

불교는 법의 종교이다. 법을 펼치려면 전법이 필수적이다. 전법을 펼치는 것이 전도라고 볼 수 있다. 불교에서 전도를 최초로 한 사람은 부처님이다. 최초로 5비구에게 법을 전하고 이어서 법을 전하자 제자가 60명이 되었다. 최초 안거에 들어가기 전의 일이라고 한다.

 

부처님이 깨닫고 나서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60명의 제자가 생겨 나자 부처님은 전도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부처님의 전도선언은 불교사에 있어서 연기선언과 함께 매우 중요한 선언중의 하나라고 한다.

 

전도선언을 보면

 

전도선언에 대한 내용은 니까야와 율장에 같은 내용이 원어로 전승 되어 왔고, 또한 한역 잡아함경에도 볼 수 있다. 니까야와 아함경에 실려 있는 전도선언은 다음과 같다.

 

 

빠알리어 전도선언

 

 

비구들이여,

나는 모든 속박에서 벗어났다.

그대들도 또한 모든 속박에서 벗어났다.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중생의 행복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세상에 대한 자비심을 가지고,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자비심을 가지고

신들과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떠나라.

 

둘이 함께 같은 길을 가지 마라.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끝도 훌륭하고

바른 뜻과 문장을 갖춘 가르침을 설하여라.

완전하고도 청정한 수행의 삶을 보여주어라.

 

세상에는 더러움에 덜 물든 사람도 있다.

다만 그들은 가르침을 듣지 못하였기 때문에 멀어졌지만

만일 그들이 가르침을 듣는다면 그것을 곧 알아들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나도 또한 가르침을 설하기 위하여

우루벨라의 세나니마을로 가리라.

<쌍윳따 니까야:4마라 쌍윳따1:5, 율장 마하왁가 1 11:1~2>

 

 

한역 전도선언

 

나는 이미 천상과 인간의 모든 인연과 속박에서 벗어났다.

너희들 또한 그러한 속박의 밧줄로부터 벗어났다.

이제 너희들은 세상으로 나가라.

그리하여 세간의 안락과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설법하라.

세간으로 나갈 때는 두 사람이 한길로 가지 말고 따로따로 다녀라.

이제 나도 우루벨라의 세나니가마(兵將村)로 가리라

<잡아함 39 1096,승삭경(繩索經)>

 

 

빠일리어 번역과 한역번역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내용은 동일하지만 받아 들이는 느낌의 차이라 볼 수 있다. 빠알리어가 소리글자이고 한자가 뜻글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한역의 경우 이중 삼중 번역 된 것이고, 빠알리어는 직역 된 것이기 때문에 그 느낌은 더욱 더 생생 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경전은 가능한 여러 번 번역을 거치지 않은 원어를 보아야 맛이 난다는 것이다.

 

마스타니 후미오의 요약을 보면

 

전도선언에 대한 해설로서 마스타니 후미오가 가장 유명하다고 한다. 일본 정토종의 승려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렸을 적부터 불교를 접하였다고 한다. 대학에서는 종교학을 전공 하였는데 기독교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기독교를 공부 하는 과정에서 불교의 우수성을 깨닫고 불교를 알리기 시작 하였는데 책을 통해서 이었다고 한다.

 

그의 글은 매우 쉽고도 명쾌 한 것이 특징이어서 책을 내 놓기만 하면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된 이유는 그의 글 속에 그의 체험이 녹아 들어 있어서 누구나 이해 하기 쉽게 글을 썻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글에서 부처님의 전도선언을 크게 세가지로 요약하였다고 한다.

 

 

첫째,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전도선언 한 것이다.

둘째,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법을 설하는 것이다.

셋째, 부처님 자신도 전도에 참여 한 것이다.

 

 

마성스님의  다섯가지 요약을 보면

 

그러나 마성스님은 위의 세가지에 두가지를 더하여 다섯가지로 요약하여 설명하였다.

 

첫째,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것에 대한 선언이다.

 

이에 대한 빠알리어 문구는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나는 모든 속박에서 벗어났다.

그대들도 또한 모든 속박에서 벗어났다.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마성스님은 이에 대하여 전도사의 자세에 대하여 말한 것이라고 한다. 즉 전법자로서의 자질이 되는냐에 관한 사항이라는 것이다. 전도하기 위해서는 자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을 교화 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자신부터 청정해야 되고 교리에 대하여 많이 알아야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몸소 실천 함으로써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따라 온다는 것이다. 이런 점은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목표로 하는 대승불교사상과 괴리가 있는 이야기라 볼 수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비록 깨닫지 못한사람이나 많이 알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보살행을 함으로써 중생제도를 할 수 있지만, 초기불교에서는 철저하게 전법자의 자세와 자격이 갖추어져야만 교화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60명의 제자들은 잘 훈련 받은 요원 같았다고 보여진다.

 

교리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 못하고 또한 언행일치도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전법에 나설 경우 오히려 불교의 가치를 훼손 할 수 있다. 그런 사항은 다음과 같은 비유로도 설명 될 수 있다.

 

 

물에 빠진 자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수 없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고 물에 들어가면 두 사람 모두다 물에 빠져 죽는다는 말과 같다는 것이다. 따라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면 밧줄을 던져서 구해야 한다는 것이 초기불교의 전법자의 자세라는 것이다. 즉 포교는 열의와 의욕만으로 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남을 교화 하기 위해서는 교화 대상과 동등레벨이어서는 안되고 그 이상이 되어야 하며 또한 언행이 일치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둘째,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선언이다.

 

사람들에게 왜 종교가 필요할까. 그리고 왜 포교를 하는 것일까. 포교의 목적에 대한 선언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빠알리 문구는 다음과 같다.

 

 

세상에 대한 자비심을 가지고,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자비심을 가지고

신들과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떠나라.

 

 

전도의 목적은 한 마디로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과 행복을 주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대승불교의 출발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 선언에 들어 있는 내용은 이타사상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목적으로 불교를 만들었을까. 이에 대하여 마스타니 후미오는 다른 견해를 내놓고 있다고 한다.

 

부처님은 처음부터 중생을 교화 하기 위하여 불교를 만든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당면한 생노병사를 어떻게 하면 해결 할 수 있을까 해서 출가 한 것이었지 처음부터 중생교화를 위해 출가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처님이 6년간 수행하고 정각을 이루고 나니 이 좋은 법을 이해 하는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생각 하는 것과 반대인 역류도(逆流道)이었기 때문이다. 역류도에 관한 초기경에 나오는 사항은 다음과 같다.

 

 

"이 법은 알기도 어렵고 깨닫기도 어렵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흘러가는 '세상의 흐름에 거스르는 길(逆流道)'이다.
이 법은 번뇌가 사라지고 미묘한 지혜를 가진 사람만이 알 수 있다.
내가 이 법을 설한다 해도 어리석은 사람들이 받들어 행하지 않으면 헛수고만 하게 된다.
차라리 침묵을 지킬지언정 수고로이 설법하지 않으리라."

<증일아함 10권 권청품>

 

 

부처님이 법을 설할 것인가 말것인가 망설였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더 생각해 보니 법을 설하면 알아 들을 수도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았고, 또 이 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도 가엽고 불쌍해 보여서 법을 설하기로 마음 먹었다는 것이다. 그 대상이 5비구이었고 첫 안거가 시작 되기 전까지  60명의 제자를 두게 된 것이다.

 

 

셋째, 서론 본론 결론을 갖춘 법의 선언이다.

 

사람을 설득하려면 논리가 정연해야 한다. 횡설수설해서는 상대를 교화 시킬 수 없다. 따라서 서론과 본론과 결론을 갖춘 논리로 무장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전도방법론이라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빠알리어 문구는 다음과 같다.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끝도 훌륭하고

바른 뜻과 문장을 갖춘 가르침을 설하여라.

 

 

남을 교화 하려면 교리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교리에 대한 이해만 있고 믿음이 없다면 삿된 견해만 증장 시킬 수 있다. 반면에 교리에 대한 이해는 없고 오로지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맹신으로 흘러 어리석음만 더욱 더 증장 시킬 것 이다. 따라서 전도사라면 교리에 대한 이해는 물론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가 신도들에게 믿음만 강조 하지 교리에 대한 교육을 그다지 시키지 않는다. 그 결과 맹신으로 흐르고 기복화 되어서 어리석음만 더욱 더 키워 내는 것을 볼 수 있다. 반대로 교리에 대한 이해가 뛰어난 학자들의 경우 믿음이 부족한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그 결과 자신의 견해에 너무 치중하여 사견으로 흐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인터넷에서도 볼 수 있다. 소위 불교에 대하여 좀 안다는 논객들의 글을 보면 이론만 있지 믿음이 부재한 경우를 볼 수 있다. 따라서 너무 한 쪽으로 치우치면 안되고 교리와 신행을 겸비 하여야 된다는 이야기이다.

 

넷째, 청정한 범행의 선언이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마스타니 후미오가 번역을 잘 못 하였다고 마성스님은 지적한다. 이에 관한 빠알리어 문구는 다음과 같다.

 

 

완전하고도 청정한 수행의 삶을 보여주어라.

 

 

이 문구와 관련 하여 마스타니 후미오는 완전하고도 청정한 수행의 삶을 설하라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번역서들이 “~보여 주어라” “~드러내라라고 하였지만, 마성스님은 “~몸소 실천해 보여라라고 해야 옳다는 것이다. 이 경우 법문은 잘 하지만 생활태도가 영 엉망인 사람이 해당 될 것이다.

 

비록 법문을 잘 하지 못할 지언정  몸소 실천해 보인다면 따라 온 다는 것이다. 사이비 종교의 교주가 들통나면 급격하게 교세가 추락 하는 것도 청정한 수행의 삶을 몸소 실천해 보여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력(知力)보다 복력(福力)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교화 해야 할까. 오염투성이인 세상에서 교화 대상은 다음의 빠알리어 문구에 해당 되는 사람들일 것이다.

 

 

세상에는 더러움에 덜 물든 사람도 있다.

다만 그들은 가르침을 듣지 못하였기 때문에 멀어졌지만

만일 그들이 가르침을 듣는다면 그것을 곧 알아들을 것이다.

 

 

세상에 덜 오염된 사람들은 부처님의 법을 만나면 곧 바로 교화 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아직 인연이 되지 않아 부처님법을 못 만났을 뿐이다. 그런데 부처님법을 만나도 교화되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이런 경우에 해당 되는 약의 비유가 있다.

 

 

첫째, 약을 먹어도 병이 낫지 않는 사람이 있다.

둘째, 약을 먹거나 먹지 않거나 병이 낫는 사람이 있다.

셋째, 약을 먹으면 병이 낫고, 약을 먹지 않으면 병이 낫지 않는 사람이다.

 

 

위의 세가지 경우에 어느 사람이 교화의 대상일까. 우선 첫번째의 경우 교화대상에서 제외 해야 될 사람이다. 법을 설해도 먹혀 들어 가지 않는 사람이다. 세상에 오염될 대로 오염되어서 이런 사람들은 100명에 한 두명 정도 교화 될까 말까한 부류를 말한다. 교도소 법회가 잘 되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라고 한다.

 

두번째의 경우는 교화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부처님법을 만난 적이 없어도 잘 알아 듣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찾아와서 가르침을 듣기 때문에 따로 교화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선근을 가지고 태어난 경우라 볼 수 있다.

 

세번째의 경우가 교화 해야 할 사람이다. 중간에 걸쳐 있는 사람으로서 갈까 말까, 할까 말까 망설이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이 어린이, 청소년들이다. 또 군대에 있는 군인들이다. 이들이야말로 전도의 황금어장이라 볼 수 있다. 왜 유일신종교가 이들을 대상으로 집중공략하는지에 대한 이유일 것이다. 이들은 세상에 물들지 않았기 때문에 부처님의 법을 펴면 교화 될 수 있다. 부처님법을 만나는 인연만 마련해 준다면 교화 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군포교현장 , 출처  http://www.mediabuddha.net/print_paper.php?number=2912

 

 

 

 

다섯째, 부처님 자신의 전도선언이다.

 

이에 대한 빠알리어 문구는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나도 또한 가르침을 설하기 위하여

우루벨라의 세나니마을로 가리라.

 

 

이 문구에 대하여 마스타니 후미오는 부처님이 깨달은 우루벨라에 대하여 향수를 느껴서라고 하였지만 깊게 생각하지 못한 것이라 한다.

 

부처님이 제자들만 전도하게 하고 자신은 편안하게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45년 동안 길에서 길로, 마을에서 마을로 다니면서 끊임 없는 법을 설하였고 또한 행동으로서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식사 또한 남이 타다 준 것을 먹지 않고 탁발에 의지 하였고 편안하게 머물지도 않았으며 가엽고 불쌍한 이들에게 한 명이라도 더 법을 전파 하기 위하여 몸소 행동으로 보여준 가장 모범적인 전도사 이었다는 것이다.

 

법을 전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점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평화롭게 전도 하였다는 사실이다. 전도 과정에서 박해를 한적도 없고 마찰이 있었던 적도 없었다. 또 법을 펼치는 동안 전쟁과 같이 물리적이고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한 적도 없었다. 이런 정신은 부처님 당시부터 지금까지 계승해 내려 오고 있는 훌륭하고 아름다운 전통이라 볼 수 있다.

 

왜 그렇게 하였을까. 그 것은 다름아닌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부처님제자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끊임 없이 전도 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부처님법이 내려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불자들의 사명은

 

부처님의 전도선언이 없었다면 어땟을까. 아마도 다른 종교처럼 맹렬하게 전도 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고, 싫다고 하는 사람들을 쫗아 다녔을지도 모른다. 또 전쟁과 같은 폭력적이고 물리적인 방법을 동원 하여 목표를 달성 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바라는 부처님의 전도선언으로 말미 암아 가장 평화롭게 또 가장 합리적으로 법이 전해져 내려온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불자들에 있어서 불자의 사명은 무엇일까. 그 것은 부처님의 법을 바로 배워 체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부처님의 법이 끊이지 않도록 전도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2009-11-06

진흙속의 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