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불교학를 연구할까, 기독교학자 오강남
언젠가 인터넷에서 어느 종교평론가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의 글에서 이렇게 말 하였다.
“기독교에서 불교를 연구 하는 학자는 많지만 반대로 불교에서 기독교를 연구 하는 학자는 거의 없기 때문에 게임은 끝난 것이나 다름 없다.”
기독교 학자들은 자신의 종교만 연구 하지 않고 왜 남의 종교를 기웃거리면서 연구 하는 것 일까. 어떤 이는 종교 다원화시대에 이웃 종교를 앎으로서 자신의 종교를 더욱 더 풍성하게 하는 역할 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일까.
기독교 학자가 불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연구 하는 것은 ‘기독교를 많이 알리기 위한 선교의 방편’ 이라는 것이 더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그런 글을 최근 불교평론에 등재 되어 있는 오강남 교수와
오강남 교수의 경우
캐나다 리자이나대 신학자 오강남 교수는 불교평론의 ‘《도마복음》: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잇는 가교(架橋),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872)’ 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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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종교를 자기중심적인 나를 비우고 내 속에 있는 참 나를 찾는 길로 받드는 것이다. 내 속에 있는 참 나는 결국 절대자이기에, 그 절대자와 내가 하나라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영지주의를 지향한 도마복음문서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심층종교의 특징은 결국 다 똑같다는 이야기이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참나는 곧 절대자와 같다고 주장 한다. 깨닫고 나면 참나와 하나가 되는데 그 ‘참나가 곧 절대자’라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절대자란 하나님을 말한다. 참나가 졸지에 하나님과 동의어가 되는 순간이다.
참나와 동일한 하나님이란 무엇일까. 신학자
모든 종교적 언어가 은유적이고 상징적임을 잘 아는 틸리히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초월적 인격자이시다”라는 표현들이 은유적이고 상징적임을 강조한다. 그에 비하여 “하나님은 존재 자체이시다”라는 표현은 가장 직접적이고 비매개적 표현이라고 본다.
폴 틸리히는 하나님의 개념을 ‘존재 자체’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기독교의 초월적 인격자로서의 하나님의 개념과는 다른 견해를 내어 놓은 것이다. 이어서 말하기를 “하느님은 진리 자체(verum ipsum)·선 자체(bonum ipsum)·존재 자체(esse ipsum)로서 인간이 지구상에 출현하여 하느님 물음을 묻기 전에도 하나님이셨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틸리히는 ‘인간이 종교와 신을 창조하는 것이라는 그럴듯한 설명을 어리석은 견해’라고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 불교학자 마사오 아베의 글에 대하여
마사오 아베의 선불교적 궁극적 실재관인 ‘공(空)’·진여(眞如) 가 말하려는 진리를 폴 틸리히의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이 받아들이지 못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적 실재라는 공이나 진여가 폴 틸리히가 말하는 하나님과 동일 개념이라는 이야기이다. 결국 오강남 교수나
이런 점은 서강대 신학자
불교를 “인간의 마음을 다스려 궁극적 실재와 하나가 되려는 것”이라는 흰두교적인 발상을 마치 불교의 목적인 것처럼 설명하는 것이다. 특히 오온무아를 설명하면서는 “나라는 것이 오온일 뿐이라고 자각하는 자가 있음을 상기시키며 이것은 오온의 배후에 있는, 오온과는 다른 초월적인 자아,참자아, 아트만이다”라고 설명은 초기불교의 가르침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인정 할 수 없는 발언이다.
그들은 왜 불교를 연구할까
불교를 연구 하는 기독교의 학자들의 특징은 주로 대승불교의 교리를 인용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감탄 하는 것은 대승불교의 ‘공사상’과 ‘보살사상’이다. 이런 대승불교의 사상을 자신들의 종교와 결합을 시도 하고 있고 특히 공사상과 진여, 참나와 같은 힌두교적인 아트만 개념이 존재 그 자체로서의 하나님과 같음을 주장 하는 것이 공통적인 현상이다.
기독교학자들이 불교를 학문대상으로 하여 연구 하는 목적은 명백하다. 불교는 허무주의 종교로서 힌두교의 아류와 같은 것으로 취급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 공 무아의 원리를 발견한 자연 그 자체는 신이 창조한 세계임을 강조하면서 “동양이든 서양이든 자연은 이미 거룩한 분에 의해 주어진 축복이며 은총이기에 부처님이 발견한 법도 부처님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자연현상이므로 신의 은총일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초기불교를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일부러 언급 하지 않아서 나온 의도적인 주장 이라는 것이다.
불교의 기독교화를 막으려면
초기불교에 따르면 궁극적 실재는 공이나 진아, 진여, 불성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실재는 고유의 자성을 갖는 법(法. 담마)인 것이다. 고유의 자성이란 무엇일까. 모든 법은 찰나생 찰나멸 하는 연기적 흐름이라는 것이 고유의 자성인 것이다. 그 법은 무위법인 열반을 포함하여 유위법인 5온 12처 18계를 말한다. 모두 82법으로서 열반을 제외한 나머지 81법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고유의 특징을 가지는 궁극적실재(빠라맛따담마, paramatta-dhamma)인 것이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적 실재는 다음의 표와 같다.
궁극적실재(빠라맛따담마, paramatta-dhamma)
궁극적 실재
오온
(panca-kkhandha
빤짜칸다)12처
(ayatana,아야따나)18계
(dhatu, 다뚜)
물질 (28)
1. 색온(色蘊)
1. 안처
거친
1. 안계
거친
2. 이처
물질
2. 이계
물질
3. 비처
-12
3. 비계
-12
4. 설처
4. 설계
5. 신처
5. 신계
6. 색처
6. 색계
7. 성처
7. 성계
8. 향처
8. 향계
9. 미처
9. 미계
10. 촉처 (지, 화, 풍의 3물질)
10. 촉계 (지, 화, 풍의 3물질)
11. 마노의 대상 (法處)
미세한
11. 마노의 대상 (法界)
미세한
마음부수 (52)
2. 수온(受蘊)
물질 (16)
물질 (16)
3. 상온(想蘊)
마음부수
마음부수
4. 행온(行蘊)
-52
-52
열반
없음
열반
열반
마음 (89)
5. 식온(識蘊)
12. 마노의 감각장소
12. 안식계
(意處)
13. 이식계
14. 비식계
15. 설식계
16. 신식계
17. 의계
18. 의식계
출처 ; 아비담마 길라잡이
궁극적 실재를 보면 그 어디에도 공이나 진여, 불성, 참나와 같은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왜냐 하면 공이나 진여, 불성, 참나 용어는 찰나생 찰나멸 하는 법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 하여 영원히 존재 하는 '개념(빤야띠, pannatti)'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궁극적 실체가 연기(緣起) 그 자체이기 때문에 ‘공’하고 ‘진여’라고 표현 하고 있을 뿐이지 존재를 갖는 다고 하는 것은 ‘망상’이고 ‘희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천태만상의 개별 주체들이 단지 찰나적으로 바로 지금 여기에 존재함으로서 불교의 세계관이 형성 된다고 볼 수 있다.
기독학자들이 초기불교의 법의 가르침에 기초 하지 않고 대승불교의 화엄교학이나 여래장사상,선불교의 공, 진여, 참나, 불성과 같이 영원불멸 하고 변치 않는 궁극적인 실체가 있다는 유아(有我)사상으로 파악 하다 보니 ‘존재 그 자체’로서 존재 하는 하나님과 다를 바 없다고 기독 학자들은 주장 하는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주장 하는 것은 불교의 기독교화 하자는 것과 다름 없을 것이다. 진여, 참나, 불성과 같은 대승불교의 여래장사상이 힌두교의 범아일여의 아트만 사상과 동일시 되었을 때 기독교의 융화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기독 학자들의 논문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따라서 한국불교가 법(法)중심의 초기 불교의 가르침에 주목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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