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댓글놀이를 즐기면서 업과 내생과 윤회를 부정 하는 단멸론자들에게

담마다사 이병욱 2009. 10. 18. 12:56

 

댓글놀이를 즐기면서 업과 내생과 윤회를 부정 하는 단멸론자들에게

 

 

 

 

 

 

 

 

현대를 살아 가는 사람들은 두 개의 공간에서 존재 하고 있다. 하나는 현실공간이고 또 하나는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인터넷 사용률이 세계1위로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일 네트워크에 접속하여 정보를 주고 받고 공유하며 살아 간다. 그 공간에는 친구도 있고 커뮤니티도 있다. 수천 수만 수십만 수백만개의 커뮤니티에서 매일 의견이 쏟아져 나오고 그런 의견 중에는 가치 있는 정보도 있지만 쓰레기와 같은 폐기해야 될 내용도 무척 많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삿된견해(邪見)를 전파 하는 경우라 볼 수 있다.

 

댓글놀이를 즐기는 사람들

 

최근 불교관련 사이트에서 불교에 대하여 좀 안다고 자부 하는 자칭 논객들이 내 뱉어 내는 견해 중에 내생과 업을 부정 하는 내용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들은 주로 특정 카페에서 하나의 주제를 올려 놓고 댓글놀이를 즐기면서 불교의 가장 근간이라고 볼 수 있는 윤회를 부정한다.

 

이들이 말하는 단골스토리는 대승불교에서 실망하여 초기불교로 왔더니 여기에서도 비불설적이 요소가 있더라고 말한다. 그리고 부처님은 결코 윤회에 대하여 말한 적이 없고 오로지 현재에 대하여만 말하였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윤회는 마음의 흐름의 파악해야지 내생이나 업의 작용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하고 특히 상좌불교의 삼세양중인과를 강하게 비판 한다.

 

이들이 주장 하는 것은 오로지 현재의 자신의 몸과 마음상태만을 관찰 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지 아직 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 이후에 이야기 하는 모든 전생이나 업이나 내생과 같은 윤회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보이지 않고 체험 하지 않은 것은 믿을 것이 못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결국 죽게 되었을 때 믿을 것은 단 한번만 믿으면 천국에 태어 난다는 기독교로 개종 하는 것이라 하고 결론을 맺는다.

 

내생과 윤회를 부정 함으로서

 

이들이 주장 하는 것은 결국 개종을 이야기 하기 위하여 불교의 근간이라고 볼 수 있는 업과 내생을 부정 하는 삿된 견해를 주장 한 것이다. 이들의 특징을 보면 대승은 물론 부처님의 원음이라고 여겨지는 초기경전마저 부정 한다. 그리고 부처님을 부처님이라 부르지 않고 석가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다. 이들이 한결 같이 주장 하는 것은 부처님을 위대한 성인으로 생각할 뿐이지 종교의 교주로서 인정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즉 부처님이 소크라테스와 같은 성인이 될지언정 예수와 같은 종교의 교주로서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이들이 주장 하는 내용을 보면 업과 내생과 윤회를 부정 함으로서 불교를 종교의 영역에서 끌어 내어 철학적인 수준으로 격하 시키겠다는 의도가 아마 정확할 것이다. 이런 시도는 기독교의 학자들이 주장 하는 맥락과 일치 한다. 불교를 전공으로 하는 기독교신학자들은 불교의 업과 윤회에 대한 종교적인 이야기 보다 무아와 윤회에 대한 모순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서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단지 철학일 뿐이다라는 것을 은연중에 전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인의 탈을 쓴 외도들

 

불교에 대하여 좀 안다고 주장하는 논객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그들에게 종교성이라고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과학의 잣대를 들이대어서 틀린 부분을 부각하여 주장 하는 가 하면 일부 부분을 침소봉대 하는 경우도 허다 하다. 초기불교 경전 뿐만 아니라 아비담마와 같은 논서에 대하여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부분을 발췌하여 모순을 주장하기도 한다.

 

불교를 아는 척 하면서 불교를 헐뜯고 비방하는 그들을 진정한 불자로 볼 수 있을까. 항상 회의론적 의심에 가득 차 있는 그들이 갈 길은 최종적으로 기독교이다. 그들은 그들이 저지른 업보 때문에 윤회의 두려움에 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단 한번만 회개 하면 구원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기독교로 기웃 거리는 것이다.

 

업과 내생 그리고 윤회를 부정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불교인이라 볼 수 없고 불교인의 탈을 쓴 외도의 주장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외도들이 목적은 단 한가지이다. 불교를 종교의 영역에서 끌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는 단지 철학에 지나지 않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들이 집착하는 것은

 

불교를 종교의 영역에서 끌어 내고 불교는 단지 철학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주장하는 무리들은 단멸론자들이다. 이들 단멸론자들이 주장 하는 한결 같은 내용은 내생과 업을 부정 하는 견해를 가졌다는 것이다. , 죽고 나면 모든 것이 소멸된다는 견해이다. 이와 같은 단견을 주장하는 것은 삿된 견해(邪見)중의 하나이다.

 

삿된 견해를 주장하는 무리들의 특징은 무엇일까. 다음과 같은 집착으로 요약 될 수 있다.

 

첫째, 자아에 대한 집착이다.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을 빠알리어로 앗따와다우빠다나(atta-vada-upadana)라 한다. 이것은 자아가 실재하고 있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고 또 자아는 항상 존재하여 모든 말, 행동, 생각의 주인공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말한다. 그런데 이런 집착으로부터 자유스러운 사람들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보통사람들은 보고, 듣고, 느끼고, 움직이는 것만 믿고 그 주체를 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아가 실재 하고 있다는 전도된 믿음 때문에 자기사랑자신의 행복에 대하여 신경 쓰는 주요한 요인이라는 것이다.

 

자아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자기사랑이 얼마나 보편적이고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경이 있다. 쌍윳따니까야에 나오는 말리까경(Mallika sutta, S.i.75)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 경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마음으로 모든 방향으로 찾아 보았건만

어느 곳에서도 자신보다 사랑스런 자 얻을 수 없네.

이처럼 다른 이들에게도 각자 자신이 사랑스러운 것

그러므로 자기의 행복을 원하는 자. 남을 헤치지 마세.”

(S.i.75; Ud.47; S3:8)

 

 

이 경에서 자아는 앗따(atta)이다. 앗따는 아뜨만(atman)과 다른 개념이다. 앗따라고 하는 말은 자기자신을 말하는 것으로서 인습적인 의미로서 자아를 말하고 다른 중생들과 구별하는 말이다.

 

회의론자들이 죽어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은 무아윤회이다. 이 무아의 반대 개념인 내가 있다라는 유아는 유신견(有身見)으로 귀착된다. 이 유신견이 강하면 그에 따라 자신의 사랑도 강해 지는 것이다. 그 정도가 어느 정도이냐 하면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에 비할 바가 아닐 정도로 크다는 것이다.

 

흔히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자신을 희생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사랑도 위급한 경우를 닥쳤을 때 깨진다고 한다. 다음의 이야기가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마하시 사야도의 12연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어느 때 사막을 가로 질러 가는 대상과 함께 하던 여인이 잠들어 있을 때 대상들이 떠나는 바람에 아이와 함께 뒤에 남게 되었다. 태양이 하늘 높이 솟아 올라 모래가 점점 뜨거워지자 엄마는 광주리를 놓고 자기 발 밑에 옷가지를 두었다. 계속해서 모래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워지자 결국 엄마는 아이를 자기 몸 아래에 두어야 했다.

 

 

이 이야기는 어머니마저도 자기를 보호 하기 위해서는 자식을 희생시킨다는 이야기로 우리의 상식을 뛰어 넘는 말이다. 유신견에 토대를 둔 자기사랑 때문에 시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행복이나 안전을 추구한다.  또 자신의 이익을 채우기 위하여 악행도 서슴지 않는 것이다. 반대로 이 유신견 때문에 내생의 행복을 위하여 보시도 하고 지계도 하고 선정수행도 하는 것이다.

 

현생이나 내생의 행복을 위한 모든 노력은 바로 이 유신견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말이다. 또 이런 유신견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들의 특징은 감각적 욕망의 추구와 밀접하게 관련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있다는 견해인 유신견은 불교에서 극복해야 될 견해이다. 유신견으로부터 자유로워야만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으로 벗어 날 수 있고 도()와 과()를 얻을 수 있는 성자의 길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아를 부정하고 내가 있다는 견해를 주장한다면 외도의 주장이라고 보면 틀림 없을 것이다.

 

둘째, 내생과 업을 부정하는 견해에 대한 집착이다.

 

죽고 나면 모든 것이 끝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업의 과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죽고 나면 모든 것이 소멸할 뿐이라고 주장 하는 것을 단견(斷見) 또는 단멸론(斷滅論)이라고 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매우 비도덕적이라는 것이다. 죽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나는데 굳이 선행을 할 필요도 없고 또 악행을 삼가해야 할 필요를 못 느끼는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저 세상의 행복을 위하여 아무런 일을 하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능한 삶을 즐기려할 것이다. 또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보시 하는 것에 대하여도 쓸데 없는 짓이라 생각한다. 더구나 이런 삿된 견해를 가지고 불교를 흠집내려 하거나 성자들을 헐뜯으려고 까지 한다는 것이다.

 

요즘 인터넷에서 자칭 불교논객이라고 칭하고 있는 일부 네트즌들에게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현상이다. 정법을 훼손 하려는 것은 물론 근거 없는 각종 비방을 일삼고 특히 정법을 전달하고 있는 스님들을 조롱하며 비하 하는 행위가 바로 단멸론자들의 전형적인 행태라 볼 수 있다. 이런 비불교적이고 외도적인 소행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이들의 행태에 대하여 부처님이 설한 내용을 법구경 주석서에서 찾을 수 있다.

 

사냥꾼 꼬까(koka)이야기이다. 사냥꾼 꼬까가 탁발나가던 비구를 보고 나쁜 징조로 보고 헤치려 하다 오히려 자신이 사냥개에 물려 죽고 만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청정하고 허물없는 사람에게

어리석은 자가 악행을 하면

그 결과는 다시 그에게 돌아가나니.

마치 바람을 향해 뿌린 먼지처럼.”

(법구경 125)

 

 

정법을 수호하는 청정한 비구들에게 까지 갖은 험담과 비아냥 비방 조롱을 일삼는 네티즌들에게 적합한 게송이라 볼 수 있다. 게송과 같이 어리석은자가 청정하고 허물 없는 사람들에게 악행을 한 결과는 누워서 침뱉기와 같이 결국 자신이 뿌린 악행의 과보를 받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셋째, 영원에 대한 집착이다.

 

영원히 변치 않는 영혼이나 실재가 있다는 믿음을 말한다. 이런 견해를 상견(常見)이라 한다. 이 상견은 개인의 실체가 있다는 전도된 인식을 말한다. 지구상의 어느 종교도 이런 상견을 벗어나지 못한다. 특히 유일신을 믿는 종교가 가장 심하다. 이와 같은 잘못된 견해는 죽어서도 영원히 살수 있다고 믿는 유일신교 뿐만 아니라 단지 몸만 바꾸어 환생한다고 믿는 힌두교도 예외는 아니다. 힌두교에서 말하는 아뜨만의 개념이 대표적이다.

 

아트만은 어떤 개념일까. 마하시사야도의 12연기의 주석서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아뜨만(atman)은 힌두교와 인도철학에서 말하는 자아(自我), 개아(個我), 진아(眞我) 로서 만물속에 내재 하는 영묘한 힘을 뜻한다. 인도의 철학자들은 이 말을 둘러싸고 많은 학설을 전개 하였다.

 

우파니샤드나 베단타학파에서는 이것을 보편적인 실재로 보고 세계원리인 브라만()과 같은 성질의 것이라고 하였으며, 현실의 나인 아뜨만은 브라만과 하나가 됨(범아일여, 梵俄一如)으로써 최고의 진리에 도달 할 수 있다고 한다. 상키아 학파에서는 아뜨만을 순수 정신원리인 푸루샤(purusa)로 보고, 물질적 원리인 프라크리띠(prakriti)와 대치시킴으로써 세계의 생성을 설명한다. 이들은 이러한 불변하는 이뜨만이 재육화한다고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윤회의 주체가 없는 연기적 흐름을 가리키는 것이다. , 힌두교의 윤회는 이 아뜨만의 전변(환생, 還生)이지만 불교의 윤회는 갈애를 근본원인으로 다시태어남(재생, 再生)이다.

 

 

요지는 환생과 재생의 차이이다. 영원불멸의 자아인 아뜨만이 있다면 이 아뜨만의 전변으로 인한 몸만 바꾸는 환생이지만, 불교의 경우 연기적 흐름에 따른 다시태어남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회의론자들은 무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힌두교에서 말하는 아뜨만의 윤회와 불교의 무아윤회를 같은 개념으로 보는 것이다.

 

인생이 길고 지겨운 사람들에게

 

존재냐 소유냐. 존재론적인 삶을 살아 갈 것인가 소유론적이 삶을 살아 갈 것인가. 고래로부터 모든 인류가 고민 하던 사항이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소유론적인 삶 보다 존재론적인 삶을 살아 갈 것을 말하였다고 볼 수 있다. 존재론적인 삶을 추구 하다 보면 존재의 근원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유일신 종교라면 간단히 신의 뜻이라고 그치고 말겠지만 창조주를 인정 하지 않는 불교에서는 고도의 이성적인 사유로 근본 원리를 밝혀 보고자 하였다. 바로 그것이 부처님이 깨달은 사항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길로 가는 것이 불자들이 가는 길이다. 이미 닦아 놓은 길로 가기만 하면 되는 데 부처님법을 의심하고 회의 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회의론자들이다. 회의론자들의 특징은 법에 대한 의심인데 불교의 근간이라고 볼 수 있는 내생과 업에 관련된 사항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불교가 종교의 영역일 수 밖에 없는 윤회와 관련 되어 있다. 이 윤회마저 부정 하는 사람들을 불자들이라고 볼 수 있을까. 아마도 불교인의 탈을 쓴 외도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의 지적 수준은 부처님을 받아 들이기에는 너무 부족 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의심하다 나중에는 모두 부정하는 회의론자가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 성자가 되려면 유신견회의론적인 의심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을 극복 하는 것이라 한다. 그런데 불교의 가장 기본인 무아를 부정하고 더구나 부처님이 말한 법마저 의심한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과 해탈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부처님 법에 대하여 의심하는 사람들을 결코 불자라고 부를 수 없다. 정법을 훼손 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단멸론자들이다. 그들에게 그 어떤 도덕적인 가치도 찾아 볼 수 없다. 오로지 이 한세상 즐기다 가면 그 뿐이다. 따라서 보시와 지계등 그 어떤 선행도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서 인생은 지루 할 뿐이다. 죽으면 그만이라고 말하지만 죽음에 이르러 두려움에 떨 것임에 틀림 없다. 그런 그들이 기대는 곳은 한방에 천국에 보내 주겠다는 유일신교가 매력적일 것이다. 인생이 길고 지겨운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적합한 게송이 있다.

 

 

잠 못 드는 사람에겐 기나긴 밤이여 

지친 나그네에겐 머나먼 이 길이여

불멸의 길을 찾지 못한

저 어리석은 이에겐

너무나 길고 지겨운 이 삶이여

(법구경 60)

 

 

 

 

 

2009-10-1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