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가 본 크리스천의 전도행태, 호진스님의 글을 보고
일요일 오전시간은 대체로 차분하고 평온한 분위기 이다. 휴일이라 늦게 일어나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보통이다. 도시에서 일요일은 한가롭고 여유롭기 때문에 가벼운 옷차림으로 외출을 한다거나 등산복 차림으로 산행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일요일 아침에
일요일 오전에 어느 교회 앞을 지나게 되었다. 지나가던 젊은 여인이 대뜸 한마디 하는 것이었다.
“예수님 믿으세요. 그래야 구원받습니다.”
기습적으로 들은 말이다. 잘 차려 입은 젊은 여자는 보기에도 지적이고 교양 있게 생겼는데 지나가던 사람에게 한 마디 툭 던진 다는 것이 선교를 목적으로 한 말이었다. 이럴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기 일쑤이다. 이런 경우를 대비 하여 한마디를 준비 해 두었는데 한 번도 써 먹어 보지 못하였다. 그 한마디는 “예, 성불하세요” 이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교회에 다니는지 다니지 않는지 어떻게 구별하는 선구안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 여자 뿐 만 아니라 어떤 노인으로부터도 기습적으로 “예수 믿으세요” 하고 말을 들었는데 한결 같이 교회에 다니지 않고 있는 것을 알기나 한 듯이 말을 던지는 것이었다. 만일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었다면 ‘아니면 말고’식이었을까. 다음 번에 그런 경우를 당하면 꼭 물어 보아야 될 사항 “내가 교회에 다니지 않는 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이다.
그런데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아도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바로 그것은 일요일 오전에 보는 옷차림새 때문 이었을 것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일요일지라도 매우 잘 차려 입는다. 마치 결혼식장에라도 가는 하객처럼 교회에 가는 날이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근사하게 차려 입는다. 반면에 교회에 다니지 않은 사람들은 대충 차려 입는다. 특히 일요일에 그렇다. 하루 쉬는 날이기 때문에 편안한 복장이 대부분이다. 또 산에 가는 사람들은 등산복 차림이기 때문에 교회에 가지 않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그 젊은 여인이 기습적으로 말을 건넸던 것도 다 옷차림을 보고 판단 했을 것이다.
스님들만 보면 이성을 잃다시피 하는 그들
기독교신자가 아니라면 모두다 전도의 대상이 되는 현실에서 불교를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예외는 아닐 것이다. 상대방이 종교가 있든지 없든지 관계 없이 교회만 나가지 않으면 다 전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종교를 아직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도 하여야 할 터인데 불교를 종교로 가지고 있는 사람도 예외 없이 그들에게 있어서 전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일반인들은 그렇다 치고 삭발하고 승복을 입은 스님들을 대상으로 전도 하는 행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스님들은 일반인들과 달리 겉모양만 보아도 쉽게 구별 된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따라 다니면서 전도 하는 행위는 과잉집착을 넘어 맹신적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출처 http://blog.naver.com/kimnami57
스님들만 보면 이성을 잃다시피 하는 일부전도사들의 행태와 불교신자이건 아니건 교회를 다니지 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도하는 그들의 무례함은 어디에서 기인 하는 것일까. 상대방의 종교를 존중해 주는 아량은 커녕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을 막무가내식의 전도행태를 보면 불교를 종교로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 불쾌 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왜 그렇게 무례할까
그들은 왜 그렇게 무례하고 안하무인의 행동을 하는 것일까. 그렇게 행동해도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 하는 것일까. 그런 그들의 무례함에 대하여 두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선민의식이다.
자신들을 선택 받은 아주 특별한 사람들로 생각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을 매우 불쌍하게 보는 것이다. 교회에 나가지 않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없고 결국 지옥에 떨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나 안타깝게 생각 하는 것이다. 이런 사고 방식은 크리스천 친구로부터 도 확인 할 수 있었고 , 고교시절 미션스쿨 다닐 때 목사들이 늘 하는 이야기이었다. 그래서 교회에 나가지 않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자신들의 숭고한 사명처럼 생각 하는 것이다.
둘째, 우월의식이다.
기독교를 믿고 교회를 다녀야 시대를 앞서가는 문화인으로 생각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은 무지하고 몽매한 인간으로 생각 하는 것이다. 설령 그들이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들은 모두 미신행위나 하고 우상숭배나 하는 저열한 종교를 믿는 것으로 간주 하는 것이다. 이런 우월의식의 배경은 미국의 영향이 절대적이라 볼 수 있다. 미국적인 것이면 모두 문명적이라고 여기는 미국문화에 절대적으로 매몰된 사람들이다. 따라서 미국의 종교인 기독교가 가장 문명적이고 문화적이며 시대를 앞서가는 종교라고 믿기 때문에 타 종교는 모두 시대에 뒤떨어지고 폐기 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전도하는 사람들의 무례함은 한마디로 교회에 나가지 않은 사람들이 불쌍해서 못 보겠다는 것이다. 죽으면 지옥에 갈 것이 뻔한데 어떻게 해서라도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는 것이 사랑의 실천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전철안에서, 노방에서 무례함을 무릎 쓰고 전도 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가 바로 ‘불쌍함’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무례한 행동에 대하여 불자들이 생각 하는 그들의 모습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대단히 어리석다’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또 한편에서는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것이 작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대방의 종교에 대한 대표적인 견해라고 볼 수 있다.
호진스님의 글에서
불자들은 왜 그들이 어리석다고 생각할까. 이에 대하여 호진스님의 글 ‘불교인이 보는 기독교인’에 상세히 나와 있다. 1992년 서강대 종교-신학연구소의 요청을 받고 일필휘지로 단숨에 작성한 논문으로서 그 때 당시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 스님의 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의 창조문제이다.
신의 창조문제에 대하여 불교인들에게 말하라면 “신이 인간을 만든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라고 말할 것이라고 한다.
불교인들에게 있어서 신의 존재는 문제제기 조차 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에서 말하는 창세기는 일종의 ‘유치원 동화’정도로 생각하고 한마디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 하는 것이다.
이런 배경에는 세계관이 판이 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즉, 불교에서의 세계관은 우주가 ‘성주괴공’하는 것으로 파악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으로 볼 때 ‘불교인과 기독교인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한가지는 신의 저지른 잘못으로 인하여 신 자신은 물론 인간들이 한량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그런 신이라면 전지한 존재라고 볼 수 없을 뿐더러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는 ‘전능하지 않는 존재’라는 것이다.
불교인이 구약을 읽는 다면 가장 이해할 수 없는 현상중의 하나가 ‘신이 하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무지하고, 무능하고, 무자비하고, 독선적인 신을 오히려 전지전능하고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는 존재로 둔갑하여 믿는 현상을 불교인들은 조금도 이해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구세주로서의 예수문제이다.
창조주로서의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인들에게 있어서 그 창조자가 보냈다는 구세주 역시 받아 들일 수 없는 존재라고 볼 수 있다.
3일 후에 부활하였다든가 하는 문제는 아무런 의미도 주지 않을 뿐 더러 그런 황당무계한 일에 진지하게 매달리는 기독교인들을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다고 생각 한다.
또한 예수가 죽음앞에서 초연 하는 것이 아니라 겁을 내고 고통스러워 하며 절망하는 모습은 아무런 감동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떳떳하지 못한 죽음에 대하여 유치해 보이기 까지 하며, 어쩔 수 없이 감수 해야 했던 타의에 의한 것 같이 보인다는 것이다.
연기자 또는 심부름꾼으로서의 예수의 행적에 대하여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불교인들에게 있어서 신을 통한 가르침이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인들에게 예수는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존재로 보이지 않을 뿐더러, 구세주라는 말은 더구나 가슴에 와 닿지 않는 것이다.
성경속에서 그런 황당한 사건과 불투명한 예수의 행적에 대하여 어떻게 그와 같이 ‘확고부동한 구세주’상을 세웠는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것이다.
셋째, 기독교의 사랑에 대한 문제이다.
사랑의 가르침은 기독교의 전유물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기독교를 유독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 이유에 대하여 그 어디에도 특별하게 뛰어난 사랑이 있는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구약에 나오는 신은 독선적이고 무자비하고 편애 하는 모습을 보일 뿐 어디에도 사랑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이와 같이 신은 인간에 대한 분노, 적대감과 오로지 이스라엘 한 민족에 대한 편애만 보일 뿐 인류전체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불교인들에서 있어서 무엇 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바로 이와 같은 신의 행위와 그 모습을 어떻게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으로 보고 느끼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의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예수가 사랑하고 관심을 기울이었던 사람들은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와 가난하고 핍박 받는 사람들뿐이었다. 예수의 반대편에 섰던 제사장들, 바리새, 권력층에 대한 사랑이 없었고 오히려 자신을 박해 했던 사람들에 대하여 저주 허고 미워 했다는 사실이다.
구약에서의 신의 사랑과 신약에서의 예수의 사랑은, 보편적이고 범인류적인 사랑이 아니라, 선택된 일부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리고 자기 편이 아닐 때는 증오하고 배척하고 복수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런 ‘배타적인 사랑’ 때문에 기독교가 가는 곳마다 피를 흘리게 하는 근본 원인이 된 것이다.
이런 기독교의 편애적이고 , 배타적인 사랑에 대하여 ‘사랑의 종교’라고 말하고 다니는 것에 대하여 불교인들은 ‘어이 없어’ 하는 것이다.
넷째, 예수의 기적과 부활문제이다.
성경에 예수의 기적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설사 기적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런 기적 이야기는 불교인들에게 아무런 감명을 주지 않는다.
전지전능한 신이 있다면 그 까짓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아무런 일도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기적을 보임으로서 신의 대행자인 예수를 왜소하고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기적이나 부활과 같은 종교적인 현상은 세계의 여러 종교에서도 이야기 되고 있다. 만일 타 종교에서 부활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는데 그 부활은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부활만이 진짜라고 말하고, 믿으라고 한다면 믿어야 하는 근거가 없게 된다.
이런 부활사건에 대하여 불교인들에게 있어서는 단지 하나의 ‘희극’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창조주를 믿지 않는 불교인들에게 있어서 신의 대리인을 지상에 파견하여 그가 죽은 뒤에 그를 되살려 주었다는 스토리는 한마디로 매우 허황되게 보인다는 것이다.
기적 아닌 기적을 만들어 낸 것을 보면
이와 같이 네가지 주제에 대하여 호진스님의 글을 요약해 보았다. 논문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불교인들에게 있어서 기독교의 교리는 온통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그런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만들어진 것에 대하여 호진스님은 다음과 같이 코멘트 하고 있다.
불교인이 놀라는 일은 예수가 일으킨 기적이나 부활과 같은 일들이 아니라, 이와 같은 보잘것 없고 허황한 사건들이 어떻게 이렇게 거창한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들어 낼 수 있었고, 인류문화와 세계역사에 그렇게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기독교의 기적을 말하라고 한다면, 예수가 행했다는 그런 것이 기적이 아니라, 위에 말한 바로 이점이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허접한 교리와 허황된 사건으로 가득 차 있는 기독교가 '어떻게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는가’가 기적이라는 것이다.
키워드는 ‘불쌍함’과 ‘어리석음’
기독교인들은 비기독교인들을 ‘불쌍한’ 존재로 본다. 그 안에는 불교도 들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불교인들은 비 불교인들을 볼 때 ‘어리석은’ 존재로 본다. 물론 그 안에는 기독교인도 포함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양종교에 있어서 키워드는 ‘불쌍함’과 ‘어리석음’이다.
한편에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어서 불쌍 하다고 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인과법을 몰라서 어리석다고 이야기 한다. 비종교인을 앞에 두고 벌어지고 있는 불쌍함과 어리석음의 공방전은 모두 종교의 교리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불쌍하다고 말하지 않고 왜 어리석다고 말하는 것일까. 바로 그것은 어리석음이 모든 불선법(不善法)의 씨앗이 되기 때문이다. 탐진치 3독은 불교에서 가장 타파해야 할 대상이다. 그런데 이 삼독중에 어리석음은 좀처럼 잘 드러나지 않는다.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성내었을 때이다. 그 다음에 탐욕을 부릴 때 이다. 탐욕과 성냄은 그 뿌리가 서로 달라서 양립할 수 없지만 어리석음은 양쪽에 다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어리석음은 언제든지 탐욕으로 발전 될 수 있고, 언제든지 성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뿌리박은 해로운 마음은 반드시 해로운 과보를 일으켜서 불선과보를 받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 나듯이 이런 인과법(因果法)을 피해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탐진치로 인하여 저지른 과보는 나중에 재생할 때 사악도에 태어 나는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사악도라함은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의 악처를 말한다. 따라서 어리석음이 얼마나 큰 과보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끼리 끼리의 사랑’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
길거리에서 전철안에서 전도하는 행위는 상대방의 입장을 전혀 고려 하지 않은 일발적이고 무례한 행동이라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양심 없고, 수치심 없는 행동은 전적으로 어리석음에서 기인한다. 이런 어리석음은 어디에서 기인 하는 것일까. 바로 그 것은 그들이 사견(邪見)을 가졌기 때문이다. 사견이란 삿된 견해, 잘못된 견해를 말한다. 무엇이 잘못 되었다는 말인가. 사견이란 무엇일까. 불교에서 말하는 사견이란 ‘잘못된 확신이나 믿음’을 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사견은 다음과 같이 말 할 수 있다.
첫째, 창조주가 있어서 이 세상을 창조 하였다는 자재화작인설이다. 이런 견해는 우리의 의지와 노력에 따르는 것이 아니고 신의 뜻대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둘째,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숙작인론이다. 노력을 하여도 현세의 운명을 변화 시킬 수 없다고 말하는 숙명론을 말한다.
셋째, 이 세상의 길흉화복은 원인과 결과에 의하여 일어 나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우연한 기회에 일어난다고 하는 무인무연론이다.
불교에서는 위와 같은 세가지 삿된 견해를 배격 한다. 그리고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진 연기법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이세상을 창조한 창조주가 있을 수 없다. 설령 그런 신이 있다고 할지라도 만물과 함께 변하는 신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창조주가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있다’라고 생각하는 유신론(有身論)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바로 이런 견해가 대표적인 잘 못된 견해 라는 것이다. 모든 것은 ‘내가 있다’라는 생각에서 출발 하므로 어떤 식으로든지 탐욕이 생길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기적으로 될 수 밖에 없고 ‘배타적인 사랑’ ‘끼리 끼리의 사랑’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진흙속의연꽃
'진흙속의연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만명의 전법사와 10만명의 블로거를 양성해야, 수도권포교와 전문가 연대 (0) | 2009.10.29 |
---|---|
댓글놀이를 즐기면서 업과 내생과 윤회를 부정 하는 단멸론자들에게 (0) | 2009.10.18 |
서민들이 즐겨 찾는 곳, 오이도에서 고단한 일상의 회포를 (0) | 2009.10.13 |
가을의 정서, 그 젊은 날에 보람 있는 삶을 살지 않은 저 늙은 왜가리처럼 (0) | 2009.10.07 |
주지불교의 현실을 매섭게 비판한 댓글, 한국불교의 자기정체성 제고 (0) | 2009.1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