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주지불교의 현실을 매섭게 비판한 댓글, 한국불교의 자기정체성 제고

담마다사 이병욱 2009. 10. 5. 14:56

 

주지불교의 현실을 매섭게 비판한 댓글, 한국불교의 자기정체성 제고를 보고

 

 

 

 

 

 

 

 

 

언젠가 차안에서 라디오를 들은 이야기이다. 모 대학의 학장이 핫팬티를 입었거나 슬리퍼차림의 학생들을 출입금지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유는 교회나 성당에 갈 때도 그런 차림으로 가느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종교시설이 교회나 성당만 있는 것일까. 불교의 사찰도 종교 시설이니까 그 학장은 응당 교회와 성당과 더불어 사찰도 언급 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 학장은 사찰은 언급 하지 않았다. 바로 이것이 불교가 처한 현실이다.

 

한국불교가 처한 현실은

 

도시에서 어느 곳을 둘러 보아도 사찰 구경 하기 힘들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마치 점집과 같은 취급을 받을 정도로 초라하기 그지 없다. 따라서 도시에서 사찰은 없는 것과 같고 불교 또한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러다 보니 지역주민을 위하여 불교가 봉사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반면에 교회나 성당 같은 경우 어린이집, 유치원, 초중고생을 위한 공부방 뿐만 아니라 노인정까지 운영함으로써 지역주민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 하면서 봉사 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불교와 매우 대조적인 모습이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불교의 미래에 대하여 걱정하고 염려 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대안을 내 놓기도 한다. 그러나 불교의 내부를 자세히 알지 못한다면 정확한 대안을 내 놓기 어려울 것이다. 10 5일 법보신문에서 한국불교의 문제점에 대하여 날카로운 비판과 대안을 제시한 글을 보았다. 불교계 특히 승가사회를 잘 알고 있는 듯한 분이 쓴 글인데 필명은 한 알의 불씨~~’이다.

 

필명으로 미루어 짐작한 것과 같이 그 글은 댓글(http://www.beopbo.com/article/view.php?Hid=63305&Hcate1=4&Hcate2=28&Hcmode=view)’이다. 최근 권오민교수와 마성스님의 논쟁이 커다란 관심사인데 같은 맥락으로 조성택교수가 작성한 최초 경전은 문자의 영향이라는 글의 대한 장문의 댓글이다. 그 글의 내용이 의미가 있다고 판단 하여 스크랩 하였는데 25개의 문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서론부터 결론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불교가 앓고 있는 현실을 매섭게 비판한 글이다.

 

댓글의 제목이 없어서 한국불교의 정체성 제고라고 제목을 붙여 보았다. 그리고 문단별로 키워드를 파악하여 소제목을 붙여 보았다.

 

 

 

한국불교의 자기정체성 제고

 

 

<<한국불교의 자기정체성 제고>>를 위한 첫 단추이자 그 변화의 중심적 과제는 과연 무엇일까?? 먼저 그 답을 내리고 시작하자.. 오늘날 그것은 <승과 속을 제대로 분별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승과 속>이란 무엇인가?? (승가)의 핵심은 곧 <출가비구의 역사적/현재적 전통>을 의미한다.. 또한 속(재가)의 핵심은 당근 <재가신도가 주축이 된 민주화된 오늘날의 재가불교운동>이 된다.. 그러면 도대체 왜 이 자명한 명제를 새삼 거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가?? ?? 그 이유는 불을 보듯 명약하다.. 곧 소위 <<반승반속>>(사실상의 승가의 재가화/세속화!)이란 작금의 현실이 모든 것을 뒤죽박죽, 혼란의 도가니 속으로 쳐박고 있기 때문이다..

 

 

반승반속의 현실에서

 

 

<반승반속의 현실>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단적으로 소위 각 종단의 총무원장/종회의원 <금권선거> 등에서 여실히 보여지는 바, 오늘날 한국불교의 저 면면한 <치부>(부끄러움/참괴심)를 부단히 양산하고 있는 <<주지불교/재산관리인의 불교>>를 말한다.. 지난시절 소위 해방공간의 정화운동에서 내걸린 <비구/대처 운운>의 깃발은 종내 <명색의 변경>에 불과했다.. <금강경>은 누누이 말하지 않던가?? 명색 따위로는 결코 법의 실상을 볼 수 없노라고.. 비구승가가 전혀 비구승가 답지 않고, 실제 승속이 서로 뒤엉켜버려 <출가비구라는 수행자의 성인지향의 그 성스러운 삶>은 오늘날 오직 <세속화된 범부의 경제적 치부의 삶>으로만 나날이 전락해가고 있다..

 

 

그런즉 대처승(재가승가?)이라는 <모순어법>조차 <공공연한> 시절이 되었다.. 남방은 다만 <환계/재출가>의 자유(7번 운운/실제 자유)로 대체할 따름이다.. 곧 이 대처승(이는 결코 카마쿠라 시대부터 내려온 일본불교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미 중국/한국/티벳 등에서도 그 유구한 <역사적> 사실은 존재한다..)이란 결국 광의의 동아시아불교전통의 전근대적 <국가주의 불교전통>이 배태한 <재가불교의 변형형식>이 아니던가?? 처자식(그것이 소위 <은처 또는 사실상의 동거>라면 합법적 결혼제도보다도 더욱 더 큰 위선적인 <훼승가>의 문제..)을 거느리고 산다면, <아무리 삭발을 하고 승복을 걸쳐 입는다>고 해도, 그것은 곧 본질적으로 다만 <재가인의 삶>과 동일하다..

 

 

글쓴이는 한국불교가 반승반속이라고 이야기 하며서 한국불교의 승가가 사실상 재가화 되었다고 이야기 한다. 이유로 첫번째가 사찰재산을 관리하는 관리인으로 전락한 것을 들고 있고, 두번째로 처자식을 숨겨 두고 사는 것을 들고 있다. 이런 측면으로 보았을 재가 불교나 다름 없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재가 불자들은 모른다. 아마도 글쓴이는 승가에 대하여 누구 보다 많이 아는 사람일 것으로 추측된다. 

 

 

너나 나나 똑같은 재가자일 뿐인데

 

 

그러고서 그 어느 승가가 감히 <<재가인의 귀의>>를 받을 수 있겠는가?? 너나 나나 다 똑같은 재가자일 뿐인데!! 그러니 홍 모처럼(불교신문!) 인간(범부!)은 다 평등하니, 소위 중의 특권(고작 어간출입?)을 폐지하자고 개거품을 무는 게 아닌가?? 그러나 불성은 평등해도, 그 업은 <차별상>을 띤다!! 모르는가??

 

 

물론 재가인으로서 보살의 삶(중생구제), 성문의 삶(교학/학문), 연각의 삶(선정수행 등) 등을 살 수 없다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 불교사는 이미 이 모든 것이 출/재가의 형식을 뛰어넘은 <대승의 원융 회귀적 정신>(특히 법화/화엄 등) 속에 이미 하나(불이)로 포섭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소위 <<출가주의 전통>>은 오늘날 과감히 폐기처분되어도 좋을 무엇인가?? 결코 아니다.. ?? <진정한> 출가주의야말로 <탐진치로 대표되는 인간의 감각적 욕망에 종속된 노예의 삶>을 벗어난, <번뇌의 상속이라는 윤회의 삶>을 단멸한, 바로 <성인(성불)을 지향하는 수행자의 삶의 오롯한 표상(그래서 출가는 곧 <출세간>인 것이다)이자 정법(성인의 삶)의 구현>이기 때문이다..

 

 

다만 오랜 불교사에 있어서 <출세간을 성취한> 소위 거사/부인들(우바새/우바이) 모두 단지 모습만이 재가자이되, 이미 출가자와 같은 성스러운 삶을 구현하고 있기에 그들은 <귀의>를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런즉 실질적인 <출세간의 성스러움>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출가>라는 제도형식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미 <재가화>된 소위 <대처종단>을 굳이 제외한다면, 소위 <명목상의 비구종단들>(대표; 조계종 등)은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만 한다.. 그러고서 소위 종무(법의 실천)니 수행(법의 체득)이니 교육(법의 전수)이니 포교(법의 전달)니 호계(법의 수호)니 등을 비로소 운위할 수 있다.. 아니던가??

 

 

재가화된 일부승가사회의 본격적인 비판이다. 너나 나나 같은 재가자인데 귀의 필요가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사실 귀의의 대상은 성자라고 본다. 유신견을 타파한 성자만이 귀의처이고 피난처이고 복밭이기 때문이다.

 

 

재산관리인으로서의 주지들과 사유화된 사찰경제

 

 

아무튼 <비구승가가 비구답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승가 본연의 양상과 정법을 파괴하고 있는 바의, <재산관리인으로서의 주지들(혹은 재단이사장 등)의 불교= 즉 사유화된 사찰경제>라는 오늘날의 친일(사찰령) 이래의 <해묵은 과제의 미청산>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소위 비구종단들에서조차 소위 비구들이 오직 <경제적으로 치부하기> 위한 <본사/수말사 주지 자리> 하나 꿰차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작금의 <한국불교(물론 어디 이게 불교만이랴?? 소위 <개독교>라는 비난을 받는 소위 <대처 목사 기독교>도 역시 마찬가지다)의 천민자본주의적 실상>(정작 불교 또한 소위 뻘짓만 일삼는 <뻘교>가 되지 말란 법이 어디 있겠는가??)은 이미 <목불인견>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친일불교의 잔재인 <미청산 과제의 해결방법>은 무엇인가?? 소위 <묵은 도둑을 새 도둑으로> 갈아치우는 과거 <정화운동/종단개혁> 운운의 <행동주의의 오류>라는 이권분규의 구태(차마 입에 올리기도 부끄러운 타락한 일부 권승들에 의한 금권정치..)를 반복해야 하는가?? 소위 총무원장을 선거로 갈아치우고, 세속화된 종법(특히 선거제도의 도입 등)으로 소위 잘나가는 수말사 주지들이 여야 파당정치(소위 종책모임?)를 벌이는 종회의원급 주지들만 뽑아 놓으면, 그 일(곧 여법승가의 구현/주지불교의 청산=<사유화>된 사찰경제의 청산)이 해결될 일이던가??

 

 

소위 각종 종교 <>들 하시는 분들!! 당신들 모두 <돈많은> 주지님들 아니신가?? 아무리 <>(정법!)보다 <>(돈벌어 도대체 무엇에 쓰시는가?)이 더 높은 세상이래도 넘 하지 않은가?? 돈도 안 벌리고 지위도 힘들기만 하다면 다들 지발로 세간으로 도로 나가실 분들이다..

 

 

재산관리인으로 전락한 주지들은 사찰을 사유화 하여 경제적으로 치부나 하는 개독교(기독교) 같은 천민자본주의 행태를 보여 주고 있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이 남아 있는한 아무리 선거를 통하여 총무원장을 새로 뽑아도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묵은 도둑이 새도둑으로 바뀌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남방불교의 환상에서 벗어 나야

 

 

아니면, <이도 저도 다 꼴보기 싫다, 그런즉 다 때려부수자> <구정물(세속화)도 버리고, 아기(정법)도 버리고> 죄다 버리고서, <순결주의적 독선>으로 소위 근본도 모르는 <근본불교 재가종단>이라는 달랑 <깃발 하나> 더 세우고, 남의 것이 더 커보인다고 남방사대주의적 발상의 <남방팔리승가>를 덜렁 <장기이식>하면 해결될 일이던가?? 그거 절대 안된다.. 이미 동아시아 전통의 <불교사>는 그런 거 안된다고 다 보여줬다.. <달마 등 그 수많은 서역승들>이 소위 <삼의일발>로 중국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가?? 그 많던 대승의 서역승도 다 남방스님들과 똑같은 모습(삼의일발)으로 중국에 들어가고, 티벳으로 들어갔다.. 결국 니들이 다만 몰라서 그렇지.. 니들도 결국 소위 <<주지불교 흉내내다간 종내 변질되고 만다>>라고 장담한다..

 

 

문제는 그 껍데기(흉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1700년 지난한 한국불교의 유산상속자의 이름은 정해졌다.. 다만 누구도 그 유산들을 제대로 <향유>하지 못할 따름이다.. 나쁜 유산을 버리고 <좋은 유산>을 가려내지도 못한다.. 암튼 누가 그 좋은 유산을 제대로 상속받아 정법(성인불교의 구현)을 구현할 것인가?? <족보도 없는> 재가 근본불교(고작 범부불교) 따위 차치하고, 한번 물어보자.. 소위 팔리불교주의자여.. 니들이 소위 남방에서처럼 이 한국사회에서 발우 하나로 <맨발로 탁발>하고, 한겨울에도 편단우견하고 달랑 <삼의가사>만으로 살아갈 자신이 있는가?? 그거 아니라면 말짱 쇼(연극!)!! 티벳불교는 어디 인도불교의 그 전통(삼의일발의 그 탁발전통)을 인도로부터 상속받지 못해서 그거 안하는 줄 아는가??

 

 

모든 한국사회의 재가대중들이 그리 어리석지 않다.. 일부 <반사적> 지지자들 믿고 소수종단 밥그릇(비주류 종단?)은 챙길지 몰라도 니들은 이미 그런거 제대로 흉내내지도 못하고 있지 않은가?? 이미 미얀마의 수행센터들도 상당수가 단지 <형식적인> 탁발 의례화된 모습을 보이질 않던가?? 이미 한국에서처럼, 공양간에서 조리해서 공양해 올리지 않던가?? 도대체 왜 그런가?? 미얀마의 숲속 꾸띠와 지리산/태백산 등의 토굴 등은 머가 그리 다른가?? 우 조티카의 꾸띠와 신변잡기식 에세이는 법정스님의 오두막과 신변잡기식 에세이와 도대체 머가 그리 다른가?? 니들에게 필요한 것은 <형식적인 쇼>가 아니라 결국 소위 <아라한의 실제 인격>을 보여주는 일이다..

 

 

남방상좌불교의 환상에서 깨어 나자는 이야기이다. 상좌불교를 동경하는 것은 사대주의적인 발상이고 결코 성공 없을 것이라고 단언 한다. 이유로 달마를 비롯하여 서역승들이 중국으로 들어 왔지만 모두 성공하지 못하고 중국불교화 되었다는 것이다. 족보도 없는 재가근본 불교를 범부불교라고 폄하 하고 있고 탁발이나 삼의가사로 살아 있겠느냐고 의문시 한다. 부분과 관련하여 글쓴이의 생각을 읽을 있다. 한국불교 그러니까 대승불교 옹호론자로 보여 지고 동시에 상좌불교는 소승적인 시각에서 보는 것이 역력하다는 것이다. 초기불교 바람이 불고 있는 것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결여 된듯한 느낌이다.

 

 

선근을 심어야

 

 

남방 붓다고사의 위빠사나(청정도론), 중국 대혜의 간화선(서장)이든, 결국 수행은 일차적으로 <각자의 선근>에 달려있다.. 아무리 정진해도 일단 그 선근이 약하면 금방 그 <한계>에 봉착한다.. 물론 위빠사나 수행은 중요하다.. 대승위빠사나(유식관) 수행전통이 단절된 현재, 팔리위빠사나수행법(특히 사띠행법)을 통해 그 <실마리>(그러나 거기까지다!)를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남방위빠사나인 미얀마의 행법들도 잘 아다시피 레디 세야도 이래, 현재적/공식적 실수행의 전통은 고작 일세기를 겨우 넘는다.. 그것은 소위 경허 이래 우리네 선문도 마찬가지다..

 

 

한 가지 더, 또한 이 두 분은 다 높은 수준의 교학적 이해(해오!)를 전제한 수행자들이다.. ?? <정견/정사유>(문혜/사혜)되지 않은 대상은 <정념/정정>(수혜)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8정도가 모두 <반야바라밀>(위빠사나 지혜수행!)일 따름이다!

 

 

근데 묻자!! 누구나 쫌만 수행하면 대충 다 아라한이 되던가?? <자칭> 아라한들(대부분 주지 행세하는 이들!! 니들이나 조계중 중님들이나 머가 다르냐??) 말고 말이다.. 안된다.. 그거 수행은 선천적/후천적 자기 선근(근기)의 한계를 넘어서려면 <한평생> 목숨 걸어도 될까말까다.. 오죽하면 선문에서는 <대사각활>이라고 하던가?? 물론 상근은 좀 더 빠르게 간다만..

 

 

그런즉 <선근(선심소의 증장)의 배양>이야말로 모든 수행의 기초(8정도의 <정어/정업/정명/정정진>//유식관의 자량/가행위 등)이다.. 곧 출/재가에 상관없이 일단 소위 <5계의 실수행>은 출/재가 공통이자, 5계는 출가자의 율(4바라이도 결국 5계에 근거를 둔다)의 바탕이다.. 누구든 금생(현재)에 자신이 노력하고 성취한 만큼, 내생(인과!!)을 기약하는 법이다.. 따라서 잘 안된다고 물론 퇴행(도로 이전 수준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수행은 누구나 해서는 안된다는 식으로 들린다. 선근을 타고 나야 한다는 것이다. 교학적으로 뒷받침이 되고 선근이 있어야 수행의 진척이 빠르다는 것이다. 누구나 좌선한다고 아라한이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5계를 지키고 금생에 열심히 노력하여 내생을 기약하자고 말한다.

 

 

주지불교를 해체 하려면

 

 

암튼 돌아가서 그럼 저 <주지불교>를 어떻게 <<해체>>해야 하는가?? 소위 범부불교의 희안한 <순결주의적 독선>도 안되고, 명색만을 바꾸는 <행동주의적 오류>도 안된다면, 도대체 어찌 해야하는가?? 일단은 명목상이라도 <비구승가의 자정노력>이 필요하다.. 단 아무래도 금권을 쥔 주지들 <스스로> 자정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럼에도 주지 중 누군가는 먼저 시도라도 한번 해보라!!

 

 

암튼 부단히 <계몽>하는 수밖에 없다만.. 그래도 비구승가경제의 <주지 사유화>를 막을 방법들을 찾아야 한다.. 어떻게?? 승가의 재산을 그 문화재는 국가관리로!! 그 보시금의 관리는 <시주한 재가자들의 손>!! 곧 이미 <카톨릭(천주교)의 롤모델>도 있으므로.. 물론 천주교도 문제(비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승가 구성원의 자질>의 문제이다.. 오히려 지금 우리승가는 소위 <개독의 모델>(개교회주의/개인사찰화! ; 모모선원 등 재가화/세속화!)로 나가는 게 더 큰 문제다..

 

 

천주교의 경우처럼 추기경조차 모든 일반 신부들과 같은 <일정금액의 월보시> <평등지급>받는 그 구조(도대체 선방수좌들의 해제비타령이 왠 말이며, 학인들의 대학등록금 걱정이 왠 말인가??)로 나가야하고, 또 판공비, 소임비, 학비 및 기타 공금 등은 <예산/회계/감사> 등을 거쳐 공개적으로 <차등지급>받는 형식을 갖춘다면,

 

 

심지어 모 사찰 일부 주지들처럼 퇴폐영업장(?)운영, 빌딩소유, 개인사찰화 등 일체 <재산증식을 위한> 영리적 경제활동을 엄금하되, <비영리적 개인재산>인 생활유지용 소비물자(자동차, 기호품, 책 등) 들은 일정기준(재가자의 <비난>을 피할 수준-율장의 보증!)으로 허용한다면, 나아가 의무화된 보험, 의료, 교육 등의 서비스를 <공공기관>(보험사/병원/각종 승가교육기관)에 의해 직접 관장하고 운영한다면, 이는 이미 <천주교의 예>를 보더라도 충분히 가능하다..

 

 

글쓴이의 가장 큰 관심사는 주지불교의 해체 같다. 그 방법으로 승가의 재산을 국가가 관리하고, 사찰의 관리를 재가자에게 맡기자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개독(기독)의모델 보다 천주교의 모델을 본받자고 주장한다.

 

 

칼자루는 재가자가 쥐고 있다

 

 

역시 제 스스로 머리를 안 깍는다면, <주지불교 해체>를 위한 <재가자의 적극적 비난과 승가에 대한 경제적 압박>이 필요하다.. <사찰재산의 공개>에서부터 <사찰운영의 각종 비사유화>에 이르기까지 그 <<핵심>>을 요구하라!! 그렇다고 엉뚱하게 일부 주지들과 결탁하여 정치적인 이권에 눈 먼 일부 사악한 재가자들의 교활한 선동에는 결코 속지 말라!! 절대로 <<선거>> 따위로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 오히려 승가의 세속화/재가화만 가속시킬 뿐이다.. 물론 이미 <사유화된 기득권을 향유하는 소수 금권력을 쥔 일부 주지들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칼자루>>는 재가자가 쥐고 있다..

 

 

모든 경제적 보시는 <재가자들의 주머니>에서 나오므로.. 운영규모가 큰 절의 주지일수록 <경제적 압박>은 더 견디기 힘들다.. 모조록 간단하다.. <불량품>은 구매하지 말라!! 그게 소위 <시장 원리> 아니던가?? 소위 종교장사 안되어 파산하면, 다시 재가자로 다들 돌아갈 일이다.. 비구승가가 엄격해지면 결국 절집에 남아 있을 주지들 별로 없다!!

 

 

 

주지불교를 해체 하려면 재가자의 적극적인 비난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경제적인 압박을 가하자고 주장 한다. 그리고 칼자루는 재가자가 쥐고 있기 때문에 장사가 안되며 내려 올 수 밖에 없을 것이라 말한다.

 

 

재가자에 필요한 것은

 

 

오늘 재가자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정법에 입각한 <양질의 법문과 실수행의 지도>이지 않던가?? 따라서 법문/수행 등의 지도는 <재가자의 요청>에 따라 비구들이 직접 재가단체/수행단체 등을 찾아가서 하면 되는 일이다.. 그리하여 만약 비구승가가 <지적/윤리적/수행적 권위>를 확보하게만 된다면, 그 어떤 재가불교단체도 소위 승가를 향한 <세속화된 전횡>을 부릴 순 없다.. ?? 일부 주지들이 언급하는 <재가자보다 소위 스님들이 삼보정재(공유물!)를 더 아낀다는 저 엉뚱한 수사학>은 바로 저 <바른 권위의 부재에 기인한 변명>일 따름이다.. 예컨대 그 어떤 <재가자들이 직접 운영하는 수행/포교단체들>(소위 대처승 운영의 개인사찰도 결국 재자자일 따름이다)도 그 <권위를 갖춘 비구승가> <복발>(불인정!) 앞에서는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예컨대 조계종 등 비구종단에 등록된 재가자 직영의 포교단체의 경우, <인사권 및 감사권>(공공화된 분담금 납부 등)을 비구승가가 행사한다면, <부정과 비리>는 충분히 일정범위 내에서 통제할 수 있다.. 물론 사람 사는 일이 어디 그리 단순하랴만.. 결국 그 포교단체 또한 재가자들의 자발적/경제적 보시(협동조합적 운영방식을 권유한다!)에 의존하므로!! 설혹 그 언론/방송/포교단체 등의 재가 대표자 혹은 재단이사장 등이 <윤리적 사치/횡령/물의> 등을 빚는다면, 과감하게 비구승가가 그 <인사권>(호계갈마 등)을 행사하고 그 <감사자료>(전문기관 의뢰!) 등을 통해 그 경제적 보시 등을 신도들에게 거부할 것을 호소한다면, 그 어떤 재가운영자들이 견딜 수 있으랴??

 

 

재가자에게 필요한 것이 정법에 입각한 양질의 법문과 수행의 지도라고 말한다. 법문과 수행지도는 재가자의 요청에 따라 재가단체나 수행단체를 찾아 가서 하면 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여 지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수행적인 권위를 확보 해야 된다는 것이다.

 

 

정법에 입각한 여법한 승가를 구현해야

 

 

그렇다.. 결국 한국불교의 문제는 그 <외적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비구승가가 <바른 권위(정법에 입각한 승가/여법승가)를 확보되지 못한 것>에 주요 원인이 있는 것이다.. 나머지는 다 그 <부차적> 산물이다.. 출가비구의 숫자는 결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숫자가 적을수록 더 권위의 확보는 용이한 것이다.. 암튼 말이 길어지는데, 이만 줄이자.. 단지 예서는 그 <실마리>만 던진 셈이다.. 답은 이미 문제 속에 있다.. 종내 출가 비구승가는 일단 <원칙적으로> 소위 공유화된 산중(숲속?) <<수도원>> 시스템으로 반드시 돌아가야만 한다!! 참으로 구차하다.. 모쪼록 삼가 합장!!

( 한 알의 불씨~~)

 

 

결론으로 정법에 입각한 여법한 승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승가는 수도하는 장소로서의 산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익명성을 전제로 하는 댓글이다 보니

 

이상으로 법보신문의 댓글주장을 분석하여 보았다. 아무래도 익명성을 전제로 하는 댓글이다 보니 거친표현도 많이 섞여 있고 과격한 주장도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국불교의 치부라 여겨 지는 사찰재산관리인으로 주지불교에 대한 지적은 매우 신선하다.

 

상구보리 하화중생과 같은 거창한 보살사상은 보이지 않고 사찰을 하나의 돈 벌이 수단으로 여기는 일부 승가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주지불교를 타파 하기 위하여 재가자들이 이에 대하여 비판을 해야 하고 경제적으로 압박을 가한다면 그들이 산을 내려 갈 수 밖에 없을 것이라 말한 대목도 눈여겨 볼 만 하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미 반승반속의 재가자와 다름 없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이득이 없다면 내려 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주지불교를 몰아내고 정법과 함께 하는 여법한 승가를 만들자고 주장 하는 부분 공감이 가는 대목이다.

 

아쉬운 점은

 

이글을 읽고 일부는 동의 하지만 미흡한 면도 있고 또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 한국불교의 현실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듯한 분의 글이라면 주지불교에 대한 문제만 삼을 것이 아니라 어떻게 중생구제를 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이 없다는 것이 아쉬웠고 다음으로 초기불교에 대한 몰이해 이다.

 

향후 한국불교의 대세는 초기불교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남방불교 방식 그대로 하자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탁발이나 삼의가사로 생활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대승불교의 비불교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부처님의 원음과 부처님의 수행법을 되돌아 가자는 운동이다.

 

이런 운동에는 승가나 재가 구별이 없다고 본다. 미국 같은 경우 승가 없이 재가로도 운영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쓴이는 상좌불교의 부정적인 면만 부각시킨 측면이 없지 않아 있어 보인다. 그리고 정법을 이야기 하는데 초기불교의 가르침이 정법일 것이다. 산중으로 들어 간다고 해서 정법이 될 수 없고 사람 사는 곳에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부처님의 올바른 가르침일 것이다.

 

 

 

 

2009-10-0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