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는 ‘윤회의 두려움을 보는 자’라는데, 식당에서 최악의 탁발승을 보며
자그마한 식당에서
자그마한 식당에서 점심식사 중이었다. 식당 안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부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주로 장부에 기입하고 고정적으로 식사를 한다. 그런 식당 안으로 승복을 입은 사람이 들어 왔다. 승복은 잿빛이 아니라 적갈색이다. 머리는 스님처럼 삭발하였는데 적갈색 모자를 쓰고 있었고 게다가 나이가 지긋하고 안경까지 쓰고 있어서 정중해 보였다.
그 사람은 목탁 치는 것 없이 주문을 외고 있었는데 알아 들을 수 없다. 보통 탁발 다니는 승려들은 반야심경이나 천수경등 불자들이 잘 아는 경전을 외우는데 그는 이제까지 한 번도 듣지 못하던 이상한 주문을 외는 것이다.
그런 그 사람이 시간이 지나면 금방 나갈 줄 알았다. 그런데 도무지 나갈 줄 모른다. 주문은 계속 외고 시간은 흘러가고 이런 사이에 주인집 아주머니가 1,000원을 보시 하는 것이었다. 다른 집 같으면 다짜고짜 나가라고 할 것인데 그 식당집 아주머니는 아무 말 없이 1,000원을 내준 것이다. 아마도 빨리 돌려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돈은 준비되어 있는 역시 적갈색의 반원형 바구니에 들어 갔다. 그 바구니를 보니 1000원짜리 돈이 꽤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돈을 받자 승려차림의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나가고 다음 식당을 향하여 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최악의 훼불행위를 보면
통계자료를 보면 우리나라의 직업 중에 신뢰도를 묻는 질문에 스님은 18위 라고 한다. 이 수치는 신부(11위)보다 못하지만, 목사(25위) 보다 높은 수치이다. 그러나 출세간의 도를 지향하는 승가사회가 사회통념상 신뢰하는 직업수준에 한참 미달되는 현상은 매우 충격적이다. 적어도 몇 손가락 안에는 들어 가야 한다고 생각 하였는데 사회에서의 평가는 매우 냉정함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된 이유로서 여러가지 있을 수 있겠지만 탁발행위도 신뢰를 저하 시키는 요인으로 들어 갈 수 있다.
조계종에서 탁발을 공식적으로 금지 하고 있는 현실에서 탁발 다니는 스님들은 유력 종단의 스님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결제기간 동안 돌아 다니는 스님들은 더 말할 나위 없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도시에서는 탁발 다니는 승려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일단 들어 오면 주문을 외면서 도무지 나가려 하지 않으니 귀찮아서라도 돈을 주고 만다.
탁발의 맛을 아는 것일까 도시에서 이런 부류의 승려차림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진짜 승려일까. 식당안에서도 방금 전에 다녀간 사람이 진짜 승려일까 하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어떤 이는 진짜인지 알기 위하여 돈을 주기 전에 반야심경 한번 외어 보라고 하기도 하고, 교회 다니는 사람은 교회에 다닌 다고 말한다고 한다. 교회 다닌다고 말하면 두 말 없이 물러 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부류는 “교회다니는 것이 무슨 상관이냐?” 고 말하기도 한다고 한다. 아마도 두말 없이 물러 나는 사람이라면 승려에 가까운 사람이고, 대꾸 하는 사람은 사이비임에 틀림 없을 것이다.
가게를 돌아다니는 승복차림의 사람들이 진짜승려인지 가짜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분명한 사실은 불교와 불자와 승가를 심하게 훼손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 하기를 이들이 피해나 주는 걸인으로 취급 하기 때문이다.
남방 상좌불교국가에서는 아직도 탁발이 시행 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 스님들을 위하여 공양을 하고 공덕을 쌓는 행위는 일상화 되어 있다고 한다. 재가신도들이 옷, 음식, 약, 잠자리등 4가지 필수품을 공양하고 공양받은 스님들은 보시자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는 모습은 부처님 당시부터 내려 오던 아름다운 전통이다. 그런 탁발의 전통이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변질 되었다. 단지 돈을 뜯어 내려는 행위로 밖에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다. 등산로 입구나 놀이공원 입구에서 탁발 하는 것은 그나마 양반적이라 볼 수 있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자리에서 목탁치고 절하는 모습을 보면 수행자처럼 보여 지기도 하지만, 집집마다 가게마다 돌아 다니며 돈을 구걸 하는 행각은 최악의 훼불행위라 볼 수 있다.
왜 비구를 존중해야 하는가
불교에서 비구계를 받은 스님들을 ‘비구’라고 한다. 비구계를 받았다는 것은 전생에 큰 공덕을 쌓은 과보라고 말하기도 한다. 따라서 누구나 비구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선업공덕이 있어야 하고 선근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만치 비구 되기가 어렵다는 말일 것이다.
부처님도 전생에 7~9번 정도 밖에 비구가 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수 많은 전생에서 불과 7~9번 정도 밖에 비구가 되지 못하였다면 비구들은 존중해 주어야 마땅하다. 일부 계행에 벗어난 행위를 하였다고 할지라도 비구계를 받았다는 사실은 일단 존중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부모의 행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다고 하여 부정 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고 한다. 모든 것을 버리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모든 것을 버렸다는 사실 자체 하나만은 존중하고도 남는다는 말이다.
출가수행자를 뜻하는 비구의 빠알리어는 ‘빅꾸(bhikkhu)’이다. 빅꾸는 biks를 뿌리로 하여 파생된 명사로서 두려움을 뜻하는 ‘바야(bhaya)’와 본다는 의미를 가진 ‘익쿠(ikkhu)’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말이라고 한다. 비구를 해석하면 ‘두려움을 본다’라는 뜻이다. 왜 ‘두려움을 보는 자’를 비구라 하였을까. 청정도론에 ‘비구는 윤회의 두려움을 보는 자’라고 나와 있다고 한다.
각묵스님의 글에서
윤회의 두려움을 보는자에 대한 대한 설명으로서 각묵스님이 불교신문에 기고한 글을 참고 하여 살펴 볼 수 있었다.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 그때만 해도 최상승 간화선 수행자라 잔뜩 고개를 치켜들고 다니던 필자는 이 구절을 보고 “윤회가 본래 없는 줄을 알아야 비구지,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게 비구라고? 참으로 소승적인 견해로구나”라면서 비웃었다.
그런데 그날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길옆 시궁창속에 조그만 돼지새끼 한 마리가 빠져 죽어있었다. 연민의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시궁창을 지나가면서 보니 돼지새끼는 죽은 것이 아니었다. 오물범벅이 된 채 먹이를 찾기 위해 주둥이를 온 몸 째 시궁창에 처박고 허우적대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그런 돼지새끼의 모습이 내 가슴을 때렸다. 그리고 ‘저 돼지 꼴이 바로 내 꼴이 아닌가. 내가 아무리 비구라 해도 윤회라는 진흙창 속에서 썩은 물을 빨면서 꿀꿀대는 저 돼지랑 다를 게 무엇인가. 아니 나는 세세생생 사바로 돌아와서 중생을 제도하리라는 미명하에 윤회를 즐기려 들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반성과 아울러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라는 말이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그 귀중한 체험을 한 뒤 초기불교가 다시 보이게 되었고, 그 힘으로 10여 년의 힘든 유학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
각묵스님은 ‘윤회의 두려움을 보는 자’를 ‘윤회를 즐기려는 자’와 대비하여 설명 하였다. 중생을 제도 하리라는 명목하에 비구가 되었지만 결국 윤회 하면서 먹을 것을 찾는 돼지와 다를 것이 없는 존재로 생각한 것이다.
윤회란 결국 선택사항인 것이다. 자신이 원해서 윤회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윤회를 끊어 버려야 겠다고 마음 먹지 못하고 삶에 끄달려 가기 때문에 윤회 하는 것이다. 그 삶 속에서 쓴맛과 단맛을 고루 맛 보지만 쓴 맛은 잊어 버리고 오로지 단맛을 바라기 때문에 살아 가는 것이다.
모든 것은 바래서 이루어 진다. 만일 바라지 않는다면 이루어 지지 않을 것이다. 다시 태어 나기를 바라면 다시 태어 날 것이고, 다시 태어 나지 않기를 바란다면 다시 태어 날 일이 없을 것이다. 식당을 돌며 탁발 행각을 하는 승려도 바래서 탁발에 나섰을 것이다. 한 바퀴 돌면 돈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고 세상을 쉽게 살아 가는 방법을 터득 한 것 이다.
비구는 ‘윤회의 두려움을 보는 자’라고 하였다. 만일 탁발행각을 하는 승려가 정식 비구이었다면 윤회의 두려움을 몰랐을 리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불교를 훼손 하는 후안무치의 탁발행각을 벌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돈을 갈취 하다 시피 하는 최악의 탁발승은 비구가 아닐 가능성 매우 크다. 왜냐 하면 그는 윤회의 두려움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을 테니까.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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