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수행처에서 1년간, 무명과 갈애를 극복 하려면

담마다사 이병욱 2009. 12. 12. 11:17

 

수행처에서 1년간, 무명과 갈애를 극복 하려면

 

 

 

 

 

 

 

 

불전문학 작품 속에

 

부처님은 옆구리에서 태어나자 마자 사방으로 일곱 걸음씩을 걸은 다음오른손과 왼손으로 각각 하늘과 땅을 가리키며 우렁찬 목소리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하는 유명한 선언을 하셨다 하는데 정말 그랬을까.

 

이런 이야기는 후대에 뷸전문학 작가들이 부처님의 위대성과 더불어 이 세상을 고통에서 구제하려고 오신 분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탄생 설화에 이와 같은 귀절을 삽입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2세기 초반의 아쉬바고사를 들 수 있고 ‘붓다차리타’라는 아름다운 불전문학 작품이다.

 

이 불전문학 작품 속에는 탄생설화 이외에도 도솔천에서 내려오신 이야기, 태내에 드는 이야기등 여덟가지 주제로 잘 알려져 있고 이런 문학작품 속의 이야기가 북방불교로 전래 되면서 사실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흔히 팔상도라고 알려져 있는 부처님의 일대기는 신화와 전설에 의한 신격화된 부처님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팔상도 중에 설산에서 수행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라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사찰의 대웅전 외부 벽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설산수도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부처님이 출가 한 후에 설산에 결코 간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인도에 유학중인 어느 스님의 법문에서 들었다. 부처님은 출가하여 사람이 살지 않는 깊은 설산에 홀로 들어가 깨닫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에 들어가 스승들에게 배우고 그런 배움을 바탕으로 스스로 정각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스승을 찾아서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나간다. 그 중에 공부하러 간 사람도 무척 많다. 그들은 왜 밖으로 나가는 것일까. 아무래도 국내에서 자신의 욕구를 만족 시켜 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나라에 가서 수년 또는 십수년 이상 머물면서 동시대의 최고의 학문을 최고의 스승으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부처님도 마찬가지 이었을 것이다. 출가한 다음에 산으로 들어 가지 않고 그 때 당시 최고의 학문과 최고의 스승을 찾아서 이나라 저나라로 유행하였다. 그런 스승들이 잘 알려져 있는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 이었을 것이다.

 

부처님은 이들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 경지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렇게 그 때 당시 알려진 최고의 단계를 밟았지만 종교천재인 부처님은 여기에서 만족 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 것은 선정수행으로서 최고의 경지 이었지만 어렸을 적부터 품었던 생노병사에 대한 의문을 풀길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찾아 갈 만한 스승도 없고 더 이상 궁금점을 풀어줄  수행법도 없는 상황에서 부처님은 자신이 직접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 때 당시 유행하던 고행도 해 보았지만 그 방법도 아니었다. 그러다 자신만의 독자적인 수행법으로 문제를 해결 하였는데 그 수행법이 ‘위빠사나’이고 그 발견한 법칙이 ‘연기법’이었다는 것이다.

 

새로운 불교를 접하고

 

불교를 믿는 사람들을 불자라고 한다. 불자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불자

1. 석가모니의 제자.

2. ‘보살(菩薩)’을 달리 이르는 말.

3. ()를 받아 출가한 사람.

4. 불교 신자.

5. 부처의 아들딸, 곧 모든 중생을 이르는 말.

 

 

불자가 불교신자의 줄임말 보다 부처님의 제자라는 말이 더 강조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불자를 불제자라고 말하기도 한다.

 

부처님 법을 따르는 사람들이 불자이다. 불자라면 당연히 부처님 말씀하신 법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한국불교에서 부처님이 설한 직접적인 가르침 보다 대승논사들이 지은 경전이나 조사스님들의 가르침이 더 우선해 왔다.

 

그런데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글로벌 시대에 들어와 부처님의 원음이 담긴 경전과 수행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80년대 말 해외여행이 자유화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 법을 배우기 위하여 미얀마나 스리랑카등 상좌불교국가로 유학가게 된 것이다.

 

그들은 왜 수행의 나라 미얀마와 교학의 나라 스리랑카로 떠나게 될 수 밖에 없었을까.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치 부처님이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로부터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를 배웠지만 채워지지 않는 갈증 때문에 이들로부터 떠난 이치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미얀마에서 우빠사나를 배워 오고 스리랑카에서 교학을 배워온 사람들이 수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 하였을 때 배움을 전파 하기 시작 하였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하나 둘 수행처가 생겨 나기 시작 한 것이다. 그런 수행처에 작년 말에 들어 가게 되었다. 인터넷 교계신문의 기사를 보고 찾아 간 것이다. 그 때 첫날 수행처에서의 이야기(http://blog.daum.net/bolee591/16154022)를 블로그 올렸었다.

 

수행처에서

 

수행처에서 12연기 법문이 지난 12 5일 부로 끝났다. 1 3개월 걸렸다고 한다. 도중에 들어갔으니 만 일년을 공부한 셈이다. 일주일 한 번 있는 교육시간은 생업에 종사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매주 토요일 저녁시간에 열렸다. 저녁 6부터 9 까지 3시간 동안이다. 보통 1시간 반 법문에 30분 경행, 1시간 좌선, 30분 인터뷰로 진행 된다. 그러다 보니 끝나는 시간은 9시 30 넘기기 일쑤이다.

 

처음으로 접해 보는 좌선은 무척 힘들었다. 한 시간 앉아 있기가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 없었다. 나중에 들으니 좌선이야말로 가장 공격적인 삶의 형태라고 한다. 앉아 있다 보면 다리는 저리고 온갖 잡념 망상이 다 들어 온다. 그럴 때 그 고통과 망상을 단지 그대로 지켜 보라고 말한다. 거기에 아무 의미도 두지 말고 지켜만 보라는 것이다.

 

고통이 발생 되고 있다는 것은 손님과도 같다고 한다. 반찬과도 같다고 한다. 원래 호흡을 보아야 하나 호흡 보다 더 심한 고통이 느껴지면 그 고통을 보라고 한다. 그래서 고통은 손님이고 반찬이라는 것이다. 호흡은 늘 볼 수 있기 때문에 매일 먹는 과 같은 것이라 한다.

 

수행을 하면 큰 변화가 있을 줄 알았다. 일종의 수행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이다. 예를 들어 빛이 보인다거나 신비한 체험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험은 하지 못하였다. 그 대신에 호흡을 볼 수 있었다. 몸의 감각이 사라지고 호흡만 남은 듯한 그런 상태를 말한다.

 

더 깊은 수행의 경지로 가려면 아마 집중수행이 필요 할 것이다. 집중수행은 수행처에 입소 하여 10일간 경행과 좌선만을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생업에 종사 하는 사람이 10일간 시간을 내기란 여간 해서 쉽지 않을 것이다.

 

블로그에 올리다 보니

 

수행처의 교재는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인 ‘12연기(빠띳쨔사뭅빠다, patticca-samuppada)’이다. 이 법문집을 읽어 나가면서 연기법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 지는데 1 3개월 걸린 것이다. 도중에 들어 갔기 때문에 무명과 행은 듣지 못하였고 부터 들을 수 있었다.  

 

이 식을 공부 할 때 그 식이 ‘재생연결식’이라는 것을 알았고 또 그런 용어는 처음 들어 보았다. 또 그 식을 설명할 때 ‘인식과정 17단계’를 소개 하였는데 모두 생소한 것 이었다. 이런 용어를 접하자 교재를 읽어 보아도 무슨 말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역주를 보아야 하고 또 아비담마에 대한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빠알리 삼장에 통달한 마하시 사야도의 이야기에 아비담마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비담마를 알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침 아비담마는 우리말로 번역 되어 있었다. 각묵스님과 대림스님이 지은 ‘아비담마 길라잡이’이가 바로 그것이다. 이 아비담마 길라잡이를 몇 번에 걸쳐서 읽고 12연기 법문의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아비담마를 다 읽으려면 인내심이 필요 하다. 모두 다 처음 접하는 용어와 설명이기 때문이다. 이해가 가지 않으면 초기불전연구원 사이트의 동영상법문을 보기도 하고 묻고 답하기에서 검색도 해 가면서 의문점을 풀어 나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공부에 가장 도움이 된 것은 글쓰기이다. 글로서 정리 하면서 하나씩 알아가게 된 것이다.

 

그렇게 교육을 받고 매일 글로 정리해서 블로그로 올리다 보니 12연기와 아비담마에 대하여 어느 정도 지식이 쌓이게 되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직접 듣는 것이다. 그리고 직접 수행 해 보는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 이라는 말이 있듯이 훌륭한 스승 밑에서 직접 지도 받는 것 보다 더 좋은 공부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런 스승의 가르침 중의 하나가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인 열반과 해탈에 관한 것이다.

 

몰라서, 바라서

 

열반과 해탈을 성취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답은 12연기에 이미 나와 있다. 12연기가 윤회의 생성과 소멸을 설명하기 위한 구조 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12연기를 역관으로 해석하면 윤회가 소멸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윤회 하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일까. 모든 초기경전과 아비담마, 12연기 법문집에서  말하기를 ‘무명’과 ‘갈애’가 원인이라고 한다.

 

그런데 무명은 과거의 원인이고, 갈애는 미래의 원인이 된다. 즉 과거의 무명 때문에 현재의 몸과 성향이 결정 되었고 이것은 자신도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미래의 원인이 될 갈애를 극복 하면 연기의 회전을 돌리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갈애의 극복이라 볼 수 있다.

 

갈애를 극복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마하시 사야도는 법문집에서 정신적 느낌으로 그쳐라고 말한다. 그러나 지도법사는 ‘바라지 않는’ 것이 갈애의 극복이라고 말한다. 모든 것은 자신이 바라서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라지 않는 다면 윤회의 수레바퀴를 멈출 수 있다는 이야기와 같다.  

 

그 바라지 않는 것이 바로 금강경에서 말하는 무주상보시와 같은 것이고, 아비담마에서 말하는 원인 없이 작용 하는 마음무인작용심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여기에 있게 된 원인은 몰라서그랬고, 또 앞으로 계속 여기에 있게 될 이유로 바라서일 것이라는 것이다. 이를 요약 하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몰라서 여기에 있게 되었고, 바라서 또 여기에 있게 될 것이다.

 

 

여기서 모른다는 것은 무명을 말하고, 바란다는 것은 갈애를 말한다.

 

무명과 갈애를 극복 하려면

 

무명을 타파 하려면 많이 알아야한다. 예로부터 모르고 저지른 죄가 더 크다고 하였다. 무명이 대죄라는 말이 있다. 모르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더 큰 죄를 짓는 다는 말이다. 그러나 알게 되면 더 이상 죄나 업을 짓지 않게 될 것이다. 결국 몰라서 여기까지 온 것이라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바라서 또 여기에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모두가 바라는 대로 되게 되어 있다. 그런데 바라지 말자고 한다. 그 말은 느낌에서 그치자는 말과 같다. 단지 바라만 보고 듣기만 하고 느끼기만 할 뿐이지 갈애와 집착으로 발전 시키기 말자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바로 지금 여기에서 있는 그대로 보아야하고 있는 그대로 알아 차려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단지그렇네하고 넘어 가는 것이다. 그러려니하자는 것이다.

 

 

 

 

 

 

2009-12-1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