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대소승 편가르기인가, 붓다와 담마는 어디에
우리나라는 대승불교권 국가이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이념인 보살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서 인사 할 때도 “성불 하십시요” 하고 인사를 하기도 한다. 그 말뜻은 누구나 공덕을 쌓으면 미래에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또 계를 받을 때도 ‘대승보살계’라 부르는 명칭으로 받고 있어서 보살사상이야말로 대승불교의 정체성을 가장 잘 나타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일까 대승불교에서 가장 비판해 마지 않고 있는 불교가 ‘소승’이라 볼 수 있다. 그런 단적인 예를 교계인터넷신문의 이제열 법사의 글에서 볼 수 있었다.
먼저 소승의 열반은 한 개인 안에서만 이루어지고 그 확인 된 내용도 무상과 무아와 괴로움이라는 속성이 주를 이룹니다. 청정의 성취, 해탈의 완성도 수행자 한 개인에만 머무릅니다. 이에 반해 대승의 열반은 수행자 한 개인이 아닌 우주 만물과 일체 중생을 통해 이루어지고 그 확인 된 내용 역시 무상과 무아와 괴로움의 차원을 넘은 공이 중심이 됩니다. ( http://www.mediabuddha.net/detail.php?number=4767&thread=24r25)
이 칼럼의 내용을 보면 대승불교에서 상좌불교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글이라 볼 수 있다.
우선 소승과 대승으로 편을 갈라서 보는 시각이 가장 눈에 띄고, 소승의 열반관이 한 개인의 괴로움의 해결일 뿐이라고 단정 하고 있다. 그리고 대승이야말로 공을 기반으로 한 진정한 열반이라고 보고 있고 항상 중생과 함께 하는 대승불교의 이념의 우수성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그는 이전의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적인 글을 올리기도 하였다.
우리는 왜 대승에서 상좌부계통의 불교를 소승이라 하였는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숙고 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대승불교를 신봉하고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상좌불교에 대하여 소승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상좌불교가 소승불교일까
그런데 상좌불교국가에서 자신들이 신봉 하는 불교를 소승이라고 생각 하고 있을까.
여러 이야기를 들어 보면 그들에게 있어서 소승이라는 말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대승불교가 후대에 생기고 나서 기존 상좌불교와 차별화 하기 위하여 소승이라고 칭한 것일 뿐이다. 그런 예를 마성스님의 글에서 볼 수 있었다.
원래 가짜가 진짜 혹은 원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진짜는 자기가 진짜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그냥 무시하면 된다. 이러한 사례는 대승경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대승경전에서는 부파교단의 가르침을 ‘비구의 복색을 한 악마’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상좌부의 삼장에는 이에 대한 반응이 전혀 없다. 전통을 계승한 쪽에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상좌부 전통에서는 정법을 유지 전승하기 위해 결집을 통해 비불교적 요소를 하나하나 배제시켜 나갔다. (http://www.beopbo.com/article/view.php?Hid=62586&Hcate1=4&Hcate2=28&Hcmode=view)
마성스님은 진짜와 가짜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정법을 유지 전승하고 비불교적인 요소를 배제 시켜 나가면서 부처님 당시부터 전통을 고스란히 계승 하고 있는 상좌불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대소승 논란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이야기이다.
반야중관 지상주의자의 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불교의 대승은 물론 티벳불교를 신봉하는 사람 역시 상좌불교를 폄하 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글을 불교평론의
그런데 불멸 후 오백여 년 지나 난삽한 아비달마 교학이 발달하였다. 단순, 명료했던 초기불교였는데, 인간의 언어와 생각으로 인해 번쇄해짐으로써 치심의 번뇌만 더 증장되었다. 이를 단칼에 쳐버리는 것이 바로 반야중관학의 공사상이다.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861)
대승논사들의 가르침에 더
동아시아 불교와 티벳불교는 모두 대승불교이다. 부처님의 직접적인 가르침보다 대승논사들의 가르침에 더 비중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전 또한 대승논사들이 종교적 체험을 고따마붓다의 이름을 빌어 가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마성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면 왜 그들은 자신의 저술을 붓다가 직접 설한 것으로 가탁했을까?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근거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 이유에 대해 두 가지로 유추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정말로 종교적 체험을 통해 직접 붓다로부터 친히 설법을 들었기 때문이다. 대승경전 찬술자가 ‘반주삼매’와 같은 종교적 체험 상태에서 직접 붓다로부터 들은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저술이라고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하나는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불설로 가탁했을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대승의 사상에 대한 의심을 차단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불설로 가탁했을 수도 있다. 이것은 불설의 진위 기준에 의한 대승경전 찬술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881)
마성스님은 두번째 항에 대하여 관점을 두고 말하고 있다. 즉, 대승논사들이 봇다의 경지까지 올라간 자신의 종교의 체험을 논서 형식으로 발표 하지 않고 굳이 붓다의 이름을 빌어 가탁한 것은 자신의 사상을 의도적으로 전파 하고 의심을 차단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비양심적인 행태로 인하여 후대에 많은 혼란을 초래 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 대표적인 예가 앞서 언급한 대승 칼럼니스트의 대승우월론이나 대학교수의 반야중관 제일주의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또 이들 대승논객들의 주장을 들어 보면 한가지 공통적인 현상이 있다.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 자신들이 대승임을 확연하게 드러나게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열반을 ‘니르바나’로, 법을 ‘다르마’ 또는 ‘달마’로 , 대법을 ‘아비다르마’ 또는 ‘아비달마’라는 하는 것이다.
반면에 초기불교 내지 상좌불교에서는 이에 대하여 ‘닙바나’ ‘담마’ ‘아비담마’라 한다. 따라서 대승논객들이 ‘닙바나’ ‘담마’ ‘아비담마’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왜냐 하면 그런 용어는 소승불교의 용어라 생각 하기 때문일 것이다.
붓다와 담마는 어디에
대승에서 소승이라고 폄하하고 있는 불교는 부처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이다. 반면에 대승논객들은 용수와 같은 대승논사들이나 조사스님들의 가르침을 진정한 가르침이라고 본다. 마치 당나라 시절 천태대사의 교상판석을 보는 것 같다. 즉, 부처님의 직접가르침이라 볼 수 있는 아함경을 가장 아래로 놓고, 대승논사들이나 조사스님들의 가르침을 최상위로 놓은 개념을 말한다.
아비담마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대기설법식으로 설한 니까야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이론화 한 아비담마에 대하여 번쇄하고 난삽한 이론으로 간주 하는가 하면 심지어 ‘치심’의 번뇌만 더 증장시킬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부처님이 말씀한 법에 대하여 어리석음만 증장시킬 뿐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제2의 석가라 칭송 받고 있는 용수의 반야중관학의 ‘법공사상’이야말로 진정한 가르침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대승불교에서 ‘불’과 ‘법’보다 상대적으로 ‘승’을 더 우선시 하는 경향이 있고, 고따마붓다와 담마는 대승불교권 국가에서 홀대를 받고 있음에 틀림 없다.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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