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포교는 이렇게 하는 것, 우학스님의 포교방법론을 보고

담마다사 이병욱 2009. 12. 20. 12:59

 

포교는 이렇게 하는 것, 우학스님의 포교방법론을 보고

 

 

 

 

 

 

 

 

불교용어 중에 무애행(無碍行)이 있다. 무애행이란 수행자가 그 행위를 함에 있어서 스스로의 마음에 걸림이 없는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무애행을 잘 못 적용하면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진다. 그런 경우를 막행막식(莫行莫食)한다고 한다.

 

공병(空病)’에 걸린 사람들은

 

막행막식의 사전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행동이 거침이 없고 먹는데도 걸림이 없는 것을 말한다. , 제멋대로 행동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런 풍토가 불교계에 만연 하였나 보다. 최근 인터넷교계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막행막식에 관한 기사가 나왔기 때문이다.

 

교단자정센터를 이끌었던 재가불자의 회고담(http://www.mediabuddha.net/print_paper.php?number=4771)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지난 10년간 교단의 자정을 위하여 불교계의 포청천 역할을 하여 왔다고 한다. 그 결과 내놓고 막행막식하는 풍토 어느 정도 사라진 것에 대하여 보람을 느낀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그 전에는 대놓고 막행막식 했었다는 것일까.

 

막행막식 하는 풍토는 어떻게 하여 생겨난 것일까. 이에 대하여 선지상주의때문이라는 의견이 많이 있다. 즉 선을 강조 하면 할수록 계율은 경시된다는 것이다. ‘깨치면 그 뿐’이라는 ‘깨달음 지상주의’가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계율은 점점 수행자들의 관심에서 벗어나게 되고, 더 이상 계율은 수행자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사항이 아니라 선택사항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들의 막행막식을 마치 경허, 만공, 춘성 스님 등 큰 스님들이 했던 무애행과 연관시켜 파계를 합리화시킨 다는 것이다.

 

이런 막행막식에 대하여 동국대 김성철 교수는 속제를 무시 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또 다음과 같이 주장 한다.

 

 

그 이유는 공()만 추구하다가 세속적 가치판단이 상실되었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세계와 속세의 세계를 구분하지 못하여 발생된 현상이라는 것이다. 어느 면에 있어서 너무나 선하기 때문에벌어진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렇게 반야 공사상이나 최상승의 파격을 공부 하다가 가치판단이 상실되어 막행막식 하는 사람들을 보통 공병(空病)’에 걸렸다고 비유 한다. 이런 공병을 유식불교에서는 악취공(惡取空)’이라고 비판 한다고 한다.

 

이러한 공병에 걸린 사람을 구제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김성철교수는 이에 대하여 철저하게속제를 실천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진제와 속제를 이분법적으로 보지 않고 진제와 속제가 균등하게 조화를 이루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깨닫게 되면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의 세계는 반야(Prajna)이다. 반야는 불교인이라면 추구 해야할 이상적인 세계를 말한다. 그런 이상적인 진리의 세계로 건너 가기 위해서 무엇인가 탈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런 수단을 바라밀(Paramita)’이라 한다. 따라서 바라밀은 실천을 말한다. , 현재의 생멸과 생사, 윤회, 중생에서 초월하고 해탈하여 도달 하고자 하는 목표가 불생불멸이고 열반이고 해탈이고 부처이다. 이를 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차안

 

속제

생멸

ß자비

파라미타

초탈à

불생불멸

 

진제

 

피안

생사

열반

윤회

해탈

중생

부처

 

 

그런데 표를 보는 것 과 같이 이쪽(왼쪽)에서 저쪽(오른쪽)으로 넘어 갔을 때 초탈(초월적 해탈)’이라 하고, 저쪽(오른쪽)에서 이쪽(왼쪽)으로 회향 되는 것이 자비이다. , 깨달았다는 의미는 반드시 자비로 회향 되게끔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깨달음이 왜 자비로 회향 되는 것일까.

 

초기불교에서 깨달음은 탐진치의 소멸이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소멸 되었다는 것은 역으로 지혜와 관용과 자애가 생겨 났다는 말과 동일하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탐욕

()

ß자비

초탈à

관용

불탐(不貪)

성냄

()

자애

부진(不嗔)

어리석음

()

지혜

불치(不痴)

 

 

탐욕이 소멸 되면 관용적으로 되고, 성냄이 소멸되면 자애로워 진다. 또 어리석지 않다는 것은 지혜롭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따라서 깨달은 사람은 관용적이고 자애롭고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아마도 자비로 회향 하는 것일 것이다. , 중생구제에 나선다는 것이다.

 

세상과 인연을 끊은 사람은

 

반대로 중생구제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면 아직도 깨달았다고 보지 못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어느 스님은 인터넷교계 신문에서 통렬하게 비판 하고 있다.

 

 

한국불교는, 수행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화이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놓여 있다. 선방은 선불장이라 한다. 부처 뽑는 고시원이다. 그런데 우리는 선방에 몇년 보냈냐를 계급장처럼 자랑한다. '내가 고시원에서 30년 보냈다' 그러면 그 놈은 미친 놈이다. 자기도 집구석도 사회도 망한다. 선방서 오랜철 난 것은 귀감이 될 수도 있다. 수행과 깨달음이 하나라는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 몇철 난 것만 뻐기고 있다면 양비론으로 접어들 수 있다.

(http://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8528)

 

 

한국불교는 수행보다 저 중요한 것이 교화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선방에서 오래 보낸 것을 자랑 하지 말라고 한다. 이를 고시원폐인의 비유를 들기도 한다.

 

스님의 말과 같이 한국불교에 있어서 절체절명한 일은 대중교화이다. 그런 대중교화는 반드시 깨달은 후에나 가능한 일일까. 만일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말은 마치 재가신자가 보시를 할 때 이다음에 재벌이 되어서많이 보시 하자는 것과 같은 말이라고 한다.

 

어떤 교육이든지 3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 한다. 대학에서도 교양과정 1년을 빼면 3년 전문교과 과정으로 되어 있고, 박사 과정 또한 최소 3년이다. 또 직장에서 제대로 일을 할 수 있는 때가 입사 3년차 부터라고 한다. 경력사원을 뽑아도 해당 분야에 있어서 3년정도 경력을 필요로 하는 이유도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불교의 공부도 3년이면 충분하다고 본다. 그렇게 공부 하고 나서 세상으로 내려와 교화를 하여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하고 평생 상구보리만 추구 한다면 그는세상과 인연을 끊은사람 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포교는 이렇게 하는 것

 

사람이 사는 곳에 불교가 없다. 불교는 오로지 산중에만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렇게 척박한 도시에서 대중교화에 나선 스님들이 있다. 그런 스님 중에 우학스님이 있다. 현재 한국불교대학대관음사의 회주스님으로 계신 분이다.

 

스님은 대구에서 최초로 포교당을 열어 성공하였고, 현재는 여러 도시에 포교도량을 건립 또는 건립 중에 있다고 한다. 한국불교에 있어서 포교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런 스님을 만난 적이 없다. 또 교육을 받은 적도 없다. 다만 책을 통해서 인터넷을 통하여 방송을 통하여 접하였을 뿐이다.

 

스님을 알게 된 것은 수 년 전 책을 통해서 이었다. 그 책이름은 너거 들은 맨날 고기 묵고이다. 이 책에서 최초로 포교 하는 장면이 나온다. 전봇대에 불교강좌가 있음을 알리는 유인물을 손수 부착 하는 장면이다. 그렇게 해서 역사가 시작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인터넷사이트에서 본 스님의 법문중에 가장 감명 깊었던 사항은 정보통신과 인터넷을 적절하게 잘 이용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정보통신과 인터넷의 가치를 잘 알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 하는 것이다. 그런 예로서 여러 도량을 화상으로 강의 한다든가, 인터넷 카페를 만들어 적극적인 활동을 권유 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인터넷의 중요성을 매우 정확히 인지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예를 스님의 글에서 읽을 수 있었다.

 

 

우선 인터넷의 위력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만일 인터넷을 도외시하고'포교'운운한다면 참으로 시대 흐름을 망각한 사람이라 아니할 수 없다. (http://cafe.daum.net/indelamang/eVA/1 )

 

 

인터넷이 포교의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방법으로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다른 종교에서는 인터넷 포교가 대단히 활발하다. 가동되고 있는 인터넷TV 100여개정도 되는데 안타깝게도 우리 불교쪽의 인터넷 TV는 서너개에 불과하다. 현재 우리 영남불교대학.관음사에서는 이미 5~6년 전에 모든 시스템을 완벽하게 구축하고 아주 원활하게 가동중에 있다.

 

 

이 글이 불교신문에 실리던 때가 2005년으로 나와 있다. 그렇다면 2000년부터 모든 시스템을 갖추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 결과로서 정보통신과 인터넷을 가장 잘 활용 하는 스님이라 볼 수 있다.

 

댓글달기운동을 펼치는

 

최근에 카페에서 들은 법문 중에 카페 등급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불교카페 중에 해당 카페가 일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 카페의 랭킹에 있어서 아직도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참고로 다음카페의 종교카페에 대한 랭킹을 보면 아래와 같다.

 

 

다음 종교카페 순위

순위

카페명

점수

회원수

종교

기독교

1

찬양나라

28779

406625

개신교

음악

2

CCM 부르는소리

25319

233569

개신교

음악

3

큰믿음교회

19194

39712

개신교

교회

4

오직 주만

18240

103207

개신교

음악

5

창골산 봉서방

15844

127532

개신교

일반

6

불교인드라망

15253

24100

불교

사찰

7

나무아미타불

13612

48937

불교

일반

8

★☆사모님 사모님 ☆★

13332

12551

개신교

목사부인

9

CCM 악보나라

12343

199107

개신교

음악

10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

10808

84621

개신교

일반

 

 

1위부터 10위까지의 순위를 보면 개신교가 8개를 차지 하고, 불교카페는 불과 2개 밖에 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비율은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이다. 도시에서 교회대 사찰의 비율이 그렇고, 헌금대 보시 비율도 그렇다.

 

스님이 말씀 하신 바와 같이 인드라망이 불교카페 중에 1등임이 틀림 없다. 그런데 이런 카페순위는 점수에 좌우 된다. , 회원들의 카페방문, 게시물 등록과 조회 등 카페 내 활동을 기준으로 활동 점수를 계산하며, 활동 점수별로 랭킹을 매기는 Daum카페만의 랭킹 제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스님은 신도들에게 카페활동을 열심히 할 것을 주문 한다. 그에 대한 실천 항목으로서 댓글달기운동을 펼치고 있다. 쓸 말이 없으면 그냥 관세음보살한마디만 써도 된다고 한다. 그런 영향이어서 인지 글마다 댓글이 수백개씩 달려 있고 댓글 내용은 대부분 관세음보살이다.

 

가장 큰 책임은

 

현대는 정보통신과 인터넷시대이다. 그리고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하나 더 생겼다. 이를 두고 흔히 온라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현실세계는 오프라인될 것이다. 이렇게 현대인들은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넘나들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오프라인 보다 온라인에서 더 시간을 많이 보내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한국불교가 오프라인은 물론 온라인에서 조차도 타종교에 밀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오프라인에서 밀리는 비율과 엇비슷 하다는 것이다. 이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한 마디로 종단과 스님들의 책임이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책임은 불자들에게 있다. 앞서 언급한 교단자정센터를 이끌었던 대표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재가자들이 먼저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교단자정이든, 불교중흥이든 지금처럼 재가자들이 부질없는 욕망에 끄달려 부나방처럼 몰려다니며 깨어있지 못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단자정센터 대표의 결론은 결국 재가자의 깨어남이었다. 종단이나 스님 또는 단체의 힘만으로 불교의 중흥이 일어 날 수 없다는 것이다. 재가자가 많이 알게 되고 깨우치게 되었을 때종교시장에 있어서 경쟁력을 확보 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2009-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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