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일아스님의 강원교육에 대한 특별기고를 보고, 빠알리 경전보다 아비담마를

담마다사 이병욱 2009. 12. 24. 16:44

 

일아스님의 강원교육에 대한 특별기고를 보고, 빠알리 경전보다 아비담마를

 

 

 

 

 

 

 

 

대승불교만을 고집하는 한국불교는 세계 불교에서 고립되고 있다

 

이 말은 최근 아소까를 펴낸 일아스님의 말이다. 인터넷 교계 신문에 발표된 이 글의 의미를 들여다 보면 고립 된다는 의미는 큰 위기가 닥쳐 올 수 있다라는 뜻으로 해석 된다. 이런 류의 경고는  이미 각묵스님이 상윳따니까야를 펴 내면서 라디오 대담 프로에서도 한 말이다. 이들 스님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앞으로 한국불교가 큰 위기에 처할 것임을 경고 하고 있다.

 

아직도 서당식교육을

 

그런 위기를 실감케 해 주는 글을 또 교계 인터넷신문에서 또 읽었다. 일아스님의 강원시스템에 대한 글 이다. 스님은 그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 하였다.

 

 

저의 주장은 수백 년 내려온 서당식 현 강원 교육은 스님들을 무능력자로 배출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가 아는 것의 한도 내에서 남에게 가르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는 유물관에나 있어야 할 그런 구태의연한 서당식 교육이 강원에서 아직도 그대로 계속된다는 사실입니다. (http://www.mediabuddha.net/detail.php?number=4873&thread=23r02)

 

 

강원식 교육을 서당식교육에 비유 하였다. 정보통신과 인터넷 시대에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시대착오적인교육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교육과정 이길래 그런 비판을 가하는 것일까.

 

일아스님이 내 놓은 자료를 보면 한 눈에 볼 수 있다.

 

 

학년

전통 명칭

과목 이름 (기본 과목)

약간의 다른

과목 있음

1학년

치문과

치문

2학년

사집과

서장, 도서, 선요, 절요, 우법소승

3학년

사교과

능엄경, 기신론, 금강경, 원각경

4학년

대교과

화엄경

 

 

이 표가 강원에서 4년 동안 배우는 교과과정 이라고 한다. 이 교육과정은 모두 어려운 한자어로 된 책이고 그 것도 대부분 여래장 계열의 경전임을 알 수 있다. 또 강원에서 배우는 교재의 대부분이 아득히 오래 전 중국스님들의 저작이라고 한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과 목

한자명

 

저자

치문

緇門

중국의 역대 선지식들의 유문을 편집한 책

중국 스님

서장

書狀

대혜종고 스님이 선의 질문에 답한 편지글

중국 스님

도서

都序

중국 규봉 종밀스님의 중국 선 사상의 형성

중국 스님

선요

禪要

중국 고봉 원묘 스님의 선법의 요의를 적은 책

중국 스님

절요

節要

보조국사 지눌의 선의 정혜쌍수를 말한 책

한국 스님

능엄경

능嚴經

마음이 본래 청정하다는 것에 의거한 공관을 성립

중국위경?

기신론

起信論

대승경의 공통된 교리를 말함

마명?

금강경

金剛經

, 무아를 설함. 집착을 경계함

대승경전

원각경

圓覺經

마음의 본 성품을 관함

중국위경?

화엄경

華嚴經

대승불교의 수행체계의 정립, 보살행과 깨달음

대승경전

 

 

여기에는 위경으로 보이는 능엄경과 원각경도 보인다는 것이다. 그 어디에도 인간 고따마 붓다의 가르침은 찾아 볼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스님은 강원의 교과과정에 빠알리어경전을 집어 넣자고 주장 하고 있다.

 

빠알리어 경전이라고 하면 4부 니까야를 말한다. 4부 니까야는 다음과 같은 경전을 말한다.

 

 

빠알리어 경전

     

디가니까야

부처님이 길게 설하신 경

앙굿따라니까야

숫자별로 모은 경

상윳따니까야

부처님이 주제별로 설하신 경

맛지마니까야

중간길의 가르침을 모은 경

 

 

그러나 빠알리어 경전을 가르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비담마를 가르치는 것이다. 아바담마야말로 불교의 기둥이기 때문이다.

 

왜 기둥이라고 부를까. 바로 그것은 빠알리 경전을 근거로 하여 만들어 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아비담마를 통하여 가지쳐서 나갔기 때문이다. 통상 마하야나도 그런 가지 중의 하나라고 본다.

 

아비담마를 알게 되면

 

아비담마에 관하여 불교방송이나 불교 관련 사이트에서 스님이나 교수들이 말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면, 아비담마는 번쇄하고 난삽한 학문으로 규정 하고 있다. 더구나 부파불교시대의 산물이라 여기고 이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심지어 어떤 교수는 ‘치심(痴心)’의 번뇌만 더 증장시킬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아비담마가 번쇄하고 난삽하다는 이야기는 인터넷 백과사전에서도 볼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아비담마 공부를 하고 나서 하는 소리인지 아니면 인터넷백과사전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읊은 것인지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아비담마를 알고 나면 불교의 전반적인 사항에 대하여 폭넓게 알 게 된다는 것이다. 더 심하게 말한다면 아비담마 한 과목만 제대로 배워도 위의 강원 교과과정 보다 훨씬 나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문제는 있다.

 

아비담마를 알게 되면 더 이상 대승불교의 존재가치가 없어 질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아비담마는 테라와다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아비담마란 무엇일까. 간단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 할 수 있다.

 

 

첫째, 불교심리학의 완결판이다.

둘째, 위빠사나의 완벽한 이론서이다.

셋째, 남방 상좌불교의 모든 것이다.

넷째, 청정도론의 핵심요약이다.

 

 

이런 내용을 놓고 본다면 한국불교에서 아비담마를 강원 교재로 채택 하는 일은 없을 듯 하다. 마찬가지로 한국불교의 강원에서 빠알리 경전을 채택 하는 일 도 기대 난망 일 것이다. 빠알리 경전을 채택 한다는 것은 한국불교의 구조를 바꾸자는 것과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집을 허물고 그 바탕위에 집을 새로 짖자는 말과 같다는 것이다.

 

재가불자로서 불교교양대학도 다니면서 공부를 하였지만 아비담마 한 권 읽느니만 못하였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아비담마가 있음으로 해서 새로운 지평이 열렸고 불자로서 긍지자부심을 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것도 순전히 개인적으로 알게 되었다.

 

모르는 사항이 있으면 인터넷의 동영상 강의를 들었고, 더 알고 싶으면 관련 카페에 들어가 묻고 답하기를 검색하여 알게 되었다. 아비담마에 나와 있는 수 많은 도표는 마치 길을 잃은 사람에게 나침반 내지는 지도처럼 보였다. 비로소 불교의 맛을 알게 된 것이다.

 

재가자와 연대 하여야

 

현대 이전의 근대까지만 하여도 성직자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아는 엘리트 집단이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 되고 사람들의 인지가 깨어 남에 따라 더 이상 성직자들이 모든 학문을 독점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과학은 과학자에게 돌아 가고, 인문학은 인문학자에게 돌아 갔다. 이렇게 사회 전분야에 있어서 전문가 그룹이 생겨 남에 따라 종교인의 영역은 갈수록 축소 되었다. 지금은 오로지 종교 한 분야에 대해서만 전문가가 된 것이다. 따라서 예전과 같이 사회를 리드 한다거나 막강한 권력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인이 세울 수 있는 권위는 무엇일까. 바로 그것은 청정함이다. 오로지 청정함 하나로서 종교인의 권위가 확보 되는 것이다. 만일 종교인의 청정함이 상실 되었다면 재가자 보다 못한 경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가 더욱 더 발전 하려면 재가자와 연대 하여야 한다. 그 것도 소위 성공 하였다고 자부 하는 오피니언 리더들을 말한다. 이런 1%를 종단과 스님들이 얼마나 잘 활용 하느냐에 따라 한국불교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본다.

 

학인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느냐도 중요한 일이지만 무엇 보다 더 중요한 것은 99.9%에 달하는 재가자의 깨어남이다. 재가자가 많이 알게 되었을 때 또 많이 깨우치게 되었을 때 그 만큼 한국불교도 발전 되어 있을 것이다.

 

 

 

2009-12-2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