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눈매와 입매는 그 대로, ‘생(生)은 눈물의 힘으로 깊어진다네’를 보고

담마다사 이병욱 2009. 12. 26. 09:57

 

눈매와 입매는 그 모습 그 대로, ‘()은 눈물의 힘으로 깊어진다네를 보고

 

 

 

 

 

 

 

 

인터넷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무엇일까.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기능이 아마 검색기능이 아닐까 생각 한다. 각 포털은 물론 개인 홈페이지까지 검색창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검색창을 가지고 있는 포털 중에서도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어느 포털에서는 잘 검색이 되지만 또 다른 포털에서는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또 해외자료를 검색 하는 경우도 마찬 가지이다. 통상 국내자료는 N, 해외 자료는 G사가 더 잘 알려져 있다.

 

눈매와 입매는 그 모습 그 대로

 

오랜만에 동창회 사이트에 들어가 보았다. 졸업한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전시해 놓은 얼굴들 모두가 무상한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차례로 방문 하다가 중학교 까지 이르렀다.

 

고등학교 까지는 카페가 있었으나 중학교는 보이지 않았다. 너무 시간이 흘러서 일까 도무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혹시나 해서 중학교이름과 담임선생님 이름을 검색창에 넣어 보았다. 그런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추억속의 여선생님의 이름이 생각 나서 검색창에 넣었다. 그러자 어느 블로그에서 학교이름과 선생님 이름이 들어간 글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조선일보에 난 기사 를 자신의 블로그에 올려 놓은 것이다. 글을 보니 틀림 없는 그 선생님 이었다. 사진도 올려져 있었는데 나이가 들은 모습이지만 눈매와 입매는 그 모습 그 대로 이었다.

 

추억속의 선생님의 글은 ()은 눈물의 힘으로 깊어진다네라는 에세이 이었다.

 

 

 

()은 눈물의 힘으로 깊어진다네

 

 

 

이 잘난 선생은 꼬박꼬박 받은 월급으로
밥걱정 없었고,소질도 없는 글을 긁적였는데,
전업작가인 너는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영혼의 글을 썼구나

 

 

나는 지금 40대 남자 제자가 준 그의 자전적 장편소설을 밑줄 그어가며 읽고 있다. 그러니까 보름 전이었다.

결혼식장에서 우연히 대학 후배이면서 같이 근무한 적이 있었던 옛 직장 동료 국어과 여교사를 만났다. 그녀는 반색을 하면서 나에게 물었다.

"
그 유명한 《연탄길》의 작가 철환이를 아세요?"

"
몰라, 우리나라 소설가가 어디 한두 사람이야?"

"
선생님 제자라는데도 모르세요?"

"
?"

사연인즉 며칠 전에 그녀가 몸담고 있는 동대부중에서 그 학교 출신인 그 소설가를 모시고 문학 강연회가 있었단다. 그때 한 학부모가 질문하기를, "어떻게 해서 문학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까?"

그 작가의 대답이 이러했단다. 중학교 2학년 때 '김경남'이라는 국어 선생님이 하루는 자기를 불러서 일기를 잘 썼다고 칭찬하시면서 학교 신문에 실어도 되겠느냐고 물어보셨고, 그 글이 신문에 실렸으며, 또 교내 백일장 때 쓴 글이 '가작'으로 뽑혀 상도 탄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글 솜씨를 인정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훗날 작가가 되기로 결심을 하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사연을 듣고 나서 미안했다. 그 제자는 지금도 나를 들먹이는데 나는 그의 이름도, 얼굴도, 그런 내용을 기억하지 못해서이다. 글을 잘 쓰는 학생은 따로 불러다가 칭찬을 해 주거나 잘 쓴 글은 낭독해 주었던 적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교사의 한마디 말이 제자의 인생길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가슴이 뿌듯해져 왔다.

한 번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작가 이철환의 삶과 문학을 조금이라도 알고 가야 예의인 것 같아 인터넷으로 검색을 했다.

'
이철환', 그의 이름은 굵은 고딕체로 방방 뜨고 있었다. 인물에도, 카페글에도, 블로그, 이미지, 웹문서, 이미지, 동영상, 뉴스, 지식, 게시판에도….

 

《연탄길》. '이 세상에 자전거길도 있고, 자동차길도 있고, 아스팔트길, 빙판길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왜 연탄길이람?' 하면서도 읽지도, 보지도 못한 책의 제목에서 고된 삶과 서민의 애환이 묻어져 나옴을 느꼈다. 1·2·3·4편이 나오도록 도대체 어떤 내용으로 360만명의 심금을 울렸을까?

그의 가난은 글을 낳았고, 그의 아픔은 감동적인 글을 낳았던 것 같았다. 그의 글은 얼음 같은 인심, 쇠붙이 같은 세상, 레이저 광선 같은 세태와 내가 창이 되면 네가 방패가 되고 네가 창이 되면 내가 방패가 되어야 하는 이 생존경쟁의 시대에서, 얼음과 쇠붙이와 레이저 광선을 녹이고, 창과 방패를 버리게 하는 역할을 한 것 같았다.

나는 그가 자랑스러워졌다. 어려서는 교사 한 사람의 영혼을 감동시키더니, 어른이 되어서 수백만 인간의 영혼을 감동시켰으니 그가 얻은 명성은 필연이며 유명 작가라는 세간의 인증은 어찌 당연한 찬사가 아니었겠는가?

가을이 스러져 가는 11월 초순, 드디어 만났다. 34년 만에, 28살의 처녀 선생과 15살의 앳된 남학생이 61살의 노교사와 48살의 장년의 나이로 대면한 것이다. 내 근무처를 찾아온 철환이를 태우고 분당의 한 음식점에서 따뜻한 밥을 함께 먹었다. 고된 삶에도 불구하고 그의 해맑은 눈동자와 선량하고 겸손한 표정에서 그가 인생을 얼마나 청결하게 살아왔고, 그의 영혼이 얼마나 순결한가를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율동공원을 거닐며 과거와 현실과 문학과 삶을 이야기했었다. 헤어질 때 철환이는 최근에 펴낸 《눈물은 힘이 세다》라는 소설을 한 권 주었고, 나는 작년 이순 나이에 펴낸 첫 수필집 《종이속 영혼》을 건네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오늘, 나는 내가 그의 제자라도 된 것처럼 그의 책을 밑줄을 그어가며 읽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문장은 이러하였다. "겨울은 눈 내리는 밤으로 깊어지고 ()은 눈물의 힘으로 깊어진다."


그날 나를 만나 내 눈을 바라보며 그가 한 말이 떠오른다.

"
그때 저를 불렀을 때 일기를 보시며 하신 말씀을 기억하세요? '너의 글에는 진실이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
진실이라. 그래, 이 잘난 선생은 꼬박꼬박 받은 월급으로 밥걱정 없이 살면서, 소질도 없으면서 50대에 등단한 주제에 수필을 쓰네, 평론을 하네 하면서 되지도 않은 글을 긁적이고 있을 때, 전업 작가인 너는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면서, 아니 눈물 젖은 빵을 얻기 위해서 영혼의 글을 썼었지.'

제자는 유명작가, 스승은 무명작가, 그래도 스승이랍시고 목에 힘을 주고 내가 제자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옛날처럼 글을 잘 썼다, 못 썼다 할 수도 없고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
정치에 이용당하지 말고, 이념에 휩쓸리지 말고, 진정한 문학 냄새가 나는 좋은 글을 써라. 가슴으로 글을 쓰고, 그 영혼의 향기가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삶의 자세를 가다듬게 하는 지침서 같은 글을 계속 써라"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1/19/2009111901759.html, 2009/11/19)

 

 

 

글에서와 같이 48살의 인기작가와 61세의 노교사의 만남이다. 그 인연은 중학교에서 시작 되었는데 그 때 당시는 28살의 처녀 선생과 15살의 앳된 남학생의 만남 이었던 것이다.

 

글 속의 선생님은

 

글 속의 선생님 이름은 김경남 선생님이다. 그 때 당시도 국어 선생님 이었다. 남자이름을 가진 여선생님 이었는데 꽤 미인 이셨다. 또 항상 꽃꽃한 자세와 카리스마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카리스마를 보여 준 예가 하나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국어를 배웠는데 어느 날 학생들이 너무 떠들고 주의 집중을 하지 않자 모두들  벌을 한시간 내내 받았던 기억도 있다.

 

그러나 선생님은 기본적으로 문학적인 감성이 매우 풍부 하였다고 생각 한다. 위 선생님의 글에 언급 된 대로 그 때 당시 교지 가 있었는데 그 제목은 동녁이었다. 동녁에는 선생님의 글이 많이 실렸고 또 학생들의 글에 대한 평가도 해 주었다.

 

동녁에 실린 선생님의 글 중에 인상이 남는 글은 선생님의 부모님에 대한 염려의 글이다.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어머님 생각이 나서 어머님에게 전화라도 한통 해 주어야 겠다라는 내용이다. 또 선생님은 로맨틱 하기도 하였다.

 

그 때 당시 종로5가에 학교가 있었는데 가까운 비원이나 창경궁에서 봄과 가을에 미술대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가을 미술대회에서 바바리 코트 깃을 세우고 낙엽진 고궁을 홀로 거니는 모습도 기억이 난다.

 

이렇게 중학교 시절은 선생님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이 먼저 떠 오르곤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 정보통신과 인터넷의 발달의 영향으로 넷상에서 다시 선생님의 글과 사진을 볼 수 있었다.

 

무언의 대화를 나누어 보려

 

세월이 많이 흘렀건만 순수 하였던 그 시절의 기억은 살아 가는 데 있어서 여러 모로 잠시 행복하고 충만 되게 만든다. 비록 나이 들어 노년에 이른 모습의 사진을 보고 있지만 마음 속에는 항상 그 시절 선생님의 모습이다.

 

선생님에 대한 자료를 더 검색 하여 보았으나 몇 개 되지 않았다. 늦게 등단하여 책을 하나 내었다고 하는데 그 책을 사 볼 생각이다. 그리고 선생님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어 보려 한다.

 

 

 

 

2009-12-2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