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엠비는 왜 정치적 순교주의자가 되었을까, 중도와 정도 그리고 최선과 차선

담마다사 이병욱 2009. 12. 29. 11:01

 

엠비는 왜 정치적 순교주의자가 되었을까, 중도와 정도 그리고 최선과 차선

 

 

 

 

 

 

 

 

마치 순교주의자 처럼

 

신문도 보지 않고 TV도 보지 않는다. 다만 라디오는 종종 듣는 편이다. 그러나 인터넷 신문은 자주 본다. 그런 이유는 골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모 인터넷신문에서 엠비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현 정국이 왜 얽혀서 꼼짝달싹 못하고 있는가에 대한 비판 기사 이었다.

 

 

물론 종교에 있어서 가장 높게 평가를 받는 것이 순교일 것이다. 그러나 정치에 있어서 순교자주의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순교자주의'란 정치인이 여론에 반하여 어떤 일을 추진하면서 여론 등과 상관없이 자신이 옳은 일을 위해 순교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서 때로는 나라를 위험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경계해야 할 성향이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1228073704&Section=01)

 

 

서강대 호철 교수의 글이다. 순교주의를 종교에 적용 할 수 있지만 이를 정치에 적용 하는 것은 무척 위험 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엠비의 말과 행동을 보면 마치 종교적 순교주의자 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 단적인 예가 지난 12월초에 있었던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확연 하게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 대화에서 엠비는 소명이라는 말을 쓴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때 당시 TV를 지켜 보던 사람들은 답답함과 착잡함을 많이 느꼈을 것이다. 물론 그 반대의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그 착잡함에 대하여 유시민 전장관의 동영상 강의로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는 엠비의 확신에 찬 어조와 단호한 태도를 보고 이제야 그를 제대로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참모진의 조언이었다면 다행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자신이 판단 하였을 때 결단코 참모진의 조언이 아니었다라는 것을 확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더 절망스러웠다는 것이다.

 

중도실용주의를 주장하다가

 

사람들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또 어떤 이는 정치적 동물이라고 한다. 세상에서 사람들과 부딪치며 살고 있는 한 어떤 식으로 든지 접촉을 하지 않을 수 없고, 그 에 따라 문제가 발생 할 뿐만 아니라 또한 문제도 해결해 가면서 살 수 밖에 없음을 나타내는 말이라 볼 수 있다. 그런 과정에서 정치가 필요 한 것이다.

 

가정에서나 회사에서나 어느 조직에서나 정치를 잘 해야 한다고 한다. 정치를 잘 못 하면 긴장과 갈등을 유발하고 모두가 다 불행해 지기 때문이다. 하물며 정치를 전문으로 하는 집단들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정치인이 정치를 하지 않고 종교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

 

엠비는 기독교 장로 출신 대통령이다. 일찍이 두명의 장로 대통령이 있었지만 이번 장로 대통령 만큼 자신의 신앙을 밝히고 적극적으로 정치에 반영 한 경우는 없었다고 생각 한다.

 

그런데 엠비는 처음에는 중도실용주의를 주장 하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지역과 종교를 구분 하지 않고 그의 중도실용 노선을 지지 해 준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중도실용주의라는 말은 용도 폐기 되고 그 대신에 종교적 순교주의자가 된 느낌이다.

 

정치판의 중도와 불교의 중도의 차이는

 

엠비가 말하였던 중도주의와 똑 같은 말이 불교에도 있다. 그런데 뜻은 전혀 다르다. 과연 정치판에서 말하는 중도와 종교에서 말하는 중도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마성스님의 불광법회 (http://www.bulkwangsa.org/movie/)를 참고 하여 보았다.

 

첫째, 용어해석적 차이이다.

 

정치권의 중도는 극좌도 아니고, 극우도 아닌 중간의 길을 말한다. 문자 그대로 가운데를 말한다.

 

그러나 불교식 중도는 중간길이 아니라 바른길(정도)을 말한다. 바른길이란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 바른 길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팔정도(八正道)일것이다. 팔정도의 정자는 빠알리어 삼마(samma)’이다. 삼마는 바르다라는 뜻이다.

 

불교식 중도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쾌락과 자기학대(고행)에 몰두 하지 말라는 것이다. 고행을 예로 든다면 고행을 하긴 하되 거기에 목적을 두지 말라는 것이다. 해탈열반에 도움이 되는 고행이라면 해도 좋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마하깟싸빠 존자의 두타행을 칭찬 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둘째, 방법론적 차이이다.

 

정치와 종교가 추구 하는 목적은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방법론에 있어서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정치권은 법과 제도를 만들어 행복하고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하지만, 종교권은 개개인의 심성을 일깨워서 착하게 잘 살 수 있는 이상적인 세계를 만들려고 한다.

 

모두다 잘살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정치권은 기본적으로 제도에 의지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항상 반대세력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보수가 있으면 진보가 있듯이 상대세력이 영원히 존재 하는 곳이 정치판이다.

 

그래서 정치는 항상 대립할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적당히 타협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지도자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항상 차선일 수 밖에 없다. 정치판에서 전부아니면 전무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또 정치판의 특징 중의 하나는 다수의 의견을 따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말은 다수의 이익을 위하여 정치를 하는 것이고, 다수의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인은 항상 를 의식 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이다. 바로 그 것이 바른 정치이고 합리적인 정치라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다르다. 종교가 추구 하는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그 신념은 종교의 교주가 말하는 진리가 될 수 있고, 경전상에 나오는 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은 항상 최선의 추구이다. 차선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는 최선을 고집 할 수 밖에 없고 차선을 위하여 적당히 타협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를 표로 정리 하면 다음과 같다.

 

 

 

용어 해석적 차이

방법론적 차이

정치권 중도

극우도 극좌도 아닌

중간정도의 길(中道)

차선

불교적 중도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은

바른길(正道)

최선

 

 

이와 같이 정치권의 중도와 불교의 중도는 분명히 다른 말임을 알 수 있다.

 

런데 엠비가 중도실용주의를 들고 나왔을 때 사람들은 모두 정치적인 중도인줄 알았다. , 상대세력을 인정하고, 항상 표를 의식해서 다수의 의견을 따르고,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선택하는 전형적인 정치판의 중도일 줄 알았다는 것이다.

 

종교적 순교주의만 남아

 

그러나 엠비는 2년이 지난 이 시점에 중도실용주의는 사라지고 종교적 순교주의만 남았다는 것이다. 4대강 사업이나 세종시 같은 현안에 대하여 여론과 순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순교자가 되겠다"는 순교자주의에 빠져 여론에 반해 모든 대화를 거부하고 돌격전을 펼치고 있는 것이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다.

 

이에 대하여 손호철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 하고 있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순교도 불사하는 종교지도자의 자리가 아니며 정치는 종교와 다르다. 무조건 대중과 여론에 따라 움직이는 대중추수주의도 문제가 있지만 여론과 대중을 무시하는 것은 이보다 백 배, 만 배는 문제가 많고 위험하다. 특히 역사적 소명과 국가백년대계를 내세워 여론에 귀를 닫는 순교자주의처럼 정치에서 위험한 것은 없다. 4대강 죽이기 사업도 사업이지만, 이미 정평이 나 있는 MB의 불도저식 추진력에 순교자주의까지 더해진다면 그 위험은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1228073704&Section=01)

 

 

엠비의 순교주의자적인 자세에 대한 문제를 지적 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엠비는 순교주의자가 될 수 밖에 없을 까. 그 것은 말 할 것도 없이 그의 종교 때문이다.

 

이 세상에 선한 것은 오로지 자신의 종교 뿐이라는 독선적인 교리와 구원은 오로지 자신의 신을 통한 구원 밖에 없다는 배타적 구원관을 말한다.

 

독선적교리와 배타적구원관으로 무장한 대통령이 다른 의견은 모두 정치적인것이고 정략적인 것이라고 주장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따라서 진리는 오로지 하나라는 교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다른 것은 모조리 거짓이 되고 만다.

 

종교적 중도는 최선을 지향한다. 그러나 정치판의 중도는 차선이다. 그런데 신앙인 엠비는 종교적 중도인 최선을 정치판에 적용 하고자 하는 것이다. 모든 문제는 거기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2009-12-2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