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잠자듯이 몸을 버릴 수 있다면, 청전스님의 법문과 좌탈입망

담마다사 이병욱 2010. 1. 9. 11:47

 

잠자듯이 몸을 버릴 수 있다면, 청전스님의 법문과 좌탈입망

 

 

 

 

 

 

사람들은 이해관계에 대하여 대단히 민감하다. 자신에게 이익이 될 것 같으면 덤벼 들고, 손해가 될 것 같으면 쳐다 보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런 경향은 재미로도 나타난다. TV를 볼 때 재미 있으면 계속 보지만, 재미가 없으면 채널을 돌려 버린다. 그래서일까 TV프로를  보면 채널을 고정 시켜 놓기 위하여 매우 자극적인장면이나 언사를 늘어 놓는 것을 알 수 있다.

 

감동을 주지못하는

 

인터넷에서 불교TV를 주로 본다. 저장 되어 있는 프로그램을 언제든지 클릭 하는 것이다. 그 중에 큰스님들의 법문을 보았다. 보통 회주조실이라는 명칭을 갖는 스님들을 말한다.

 

그런 큰스님들의 법문을 잔뜩 기대감을 가지고 보지만 남는 것이 별로 없다. 노트를 하려고 준비 하였으나 별로 쓸게 없다는 것이 단적인 예일 것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큰 스님들의 법문은 그다지 감동을 주지 못한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거나 자신들의 신변이야기가 주요 주제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반말투로 신도들을 얕잡아 보는 태도도 거슬리는 경우가 있다.

 

그와 같은 법문은 듣고 있는 신도들의 태도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주의 집중하는 사람이 드물고 몹시 산만한 느낌이다. 그러다 보니 법문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들이나 따로 노는 듯한 모습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한국을 떠난 이유는

 

청전스님의 법문 (http://www.btn.co.kr/preach/preach_datail_contents.asp?ls_StSbCode=CATMT_01&PID=P485&DPID=56174)의 경우 매우 진지한 자세로 듣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태도와 법문에 전적으로 동의 한다는 표정은 누가 보아도 느낄 수 있는 장면이다.

 

이와 같이 설법자와 대중들의 혼연일체가 되는 법회에서 청전스님은 매우 중요한 말을 하였다. 그 것도 매우 짤막한 말이다. 또 표정 또한 이 때까지와 달리 매우 단호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것은 다름아닌 인도의 다람살라에 간 이유중의 하나이다. 그 이유를 법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인도에 간 이유 중의 하나(단호하게). (잠시침묵) 큰스님이라고 그렇게, 큰 말씀을 주신 분인데 돌아가실 때, 실망을 주신 것 입니다. 그 제자들은 돌아가시고 난 뒤부터 검은의식, 뭘 만드는 것, 성인으로, 뭘로이게 법을 속이는 것 입니다. 임종을 속이는 것 입니다. 공부를 바르게 하고, 바르게 산다면, 바르게 죽어요.

 

 

이 말을 하기 이전에 죽음에 대하여 말 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어 갈 때 의식은 이미 없다는 것이다. 그 상태에서 모든 몸이 썩어 들어 가지만, 가장 마지막 순간까지 남는 것은 심장’의 팔딱거림 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한 평생 잘 산사람들은 죽어 갈 때 의식이 가장 마지막 이라고 한다. 그런 말은 불경에도 나와 있고 부처님이 하신 말이라고 한다.

 

, 잘 죽는 다는 것은 머리에서 부터 죽는 것이 아니라, 발부터 죽어 간다는 것이다. 이어서 차례로 올라와 마지막으로 심장이 멎고, 최후로 의식이 죽는 것이라 한다. 바로 그것이 좌탈입망이라는 것이다.

 

임종하는 모습에 너무 실망

 

청전스님의 과거이력은 독특하다. 천주교에서 개종을 하였기 때문이다. 애초에 신부가 되려고 가톨릭 대학교에 들어 갔으나 어느 날 순천의 송광사를 방문하게 되면서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정적인 계기는 그 때 당시 송광사의 방장인 구산스님(1901~1983)’의 권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1977년에 송광사로 출가 하였고, 이후 10년 동안 선방을 찾아 수행 정진 하였다고 한다. 그런 과정 중에 큰스님들의 임종하는 모습에 너무 실망하였다는 것이다.

 

한국의 선지식들은 법상에서 늘 생사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것처럼 말했지만, 열반 할 때는 전혀 의식을 챙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 큰 스님들이라는 분들이 두 세달씩 정신을 못 차리기도 했다고 한겨레신문(2006.12.21)에서 밝히기도 하였다.

 

그런 모습을 지켜 보면서 너무도 허탈해 해외로 나가게 되었고, 선지식을 찾아 세계를 떠 돌다가 지금의 달라이 라마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잠자듯이 몸을 버릴 수 있다면

 

잘 사는 것 못지 않게 잘 죽는 것도 중요 하다고 어디에서나 말 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웰다잉(well-dying)’이라는 말이 이제 더 이상 낯선 단어가 아니라 누구나 잘 아는 용어가 된 것이다.

 

잘살기와 잘죽기는 이제 동의어가 된 세상이다. 따라서 그 사람이 잘살았는지는 그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잠자듯이 몸을 버릴 수 있다면 최고로 잘 죽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죽음에 대한 연습을 하는 곳이 또한 수행처이다.

 

수행처에서 주로 하는 것이 경행과 좌선이다. 그런데 때로 와선(臥禪)’을 하는 경우도 있다. 누워서 하는 수행이다.

 

이 경우 배를 관찰 한다. 앉아서 하는 경우 보다 누워서 수행을 하는 경우 관찰 할 수 있는 대상은 배의 일어나고 꺼짐이 가장 강하기때문이다.

 

그런 배의 호흡을 지켜 보다 보면 슬며시 잠이 들게 마련이다. 마치 시체처럼 누워 있다 배의 호흡을 관찰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잠들었을 때 바로 그런 순간을 죽음처럼 맞이 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을 알아차리자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깨어 날 때도 깨어 나는 순간을 알아차리자는 것이다. 일종의 죽는 순간을 지켜 보기 위한 연습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일까 와선을 하고 나면 몸이 매우 가뿐함을 느낄 수 있다. 또 와선을 하게 되면 모든 불면증이 사라져서 불면증으로 고생하지 않는다고 한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불면증으로 고생을 한다고 한다. 특히 나이 들고 돈이 많은 사람들의 대부분이 불면증을 호소 한다고 한다. 그런 불면중에 와선이야말로 최고의 치료제가 아닐까.

 

죽음직전에 보는 표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매우 두려워 한다. 더구나 인생을 되는 대로막 산 사람들은 죽음이 임박해 옴에 따라 강도가 더 한 다는 것이다.

 

그러나 잘 산 사람들은 조금도 죽음에 대하여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잘 산 사람이란 잘 먹고 잘산케이스가 아니라 선업이든 불선업이든 업을 짖지 않은사람을 말한다.

 

그런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 하였을 때 마지막 죽음직전의 마음에서 아무런 표상을 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단지 일어 나고 꺼지는 호흡만을 관찰 하면서 마지막 죽음직전의 마음이 끝나면 다시 태어 나는 과보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기 직전에 보통 다음의 세가지 중의 하나를 보게 된다고 말한다.

 

 

첫째, 살면서 지었던 행위의 회상인 업(kamma)이 나타난다(K).

둘째, 업과 관련된 주변 조건인 업의 표상(kamma-nimitta)이 나타난다(KN).

셋째,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ta)이 나타난다(GN).

 

 

삶의 과정에 있어서 가장 인상적이었거나 강렬하였던 사건이 죽음직전의 마음에 표상으로 나타 나는데 그 표상이 다음 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음생의 최초의 마음(재생연결식)’이 그 표상을 대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한 존재의 일생이 시작 된다고 보는 것이 아비담마의 견해이다.

 

삶과 죽음에 간격이 없는

 

이런 견해에 따르면 이번 생의 마지막 죽음의 마음과 다음 생의 최초의 마음인 재생연결식과의 마음에는 간격이 없게된다. 바로 이점이 동아시아의 대승불교와 가장 차이 나는 점이다. 티벳불교를 포함한 대승불교에서는 죽고 나서 49일간의 중유(中有)를 인정 하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의 간격이 없는 무간(無間)에 대한 아비담마적 도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죽음과 재생

 

전생

현생

대상

 

 

죽음 직전의 마음 (**K/ KN/ GN 중에 하나가 대상이 됨)

 

마음

Pt

···

···

Cc

Pt

···

···

B

A

C

U

P

E

Sp

St

V

J

J

J

J

J

Cc

 

 

 

 

 

 

 

 

 

 

 

 

 

 

 

 

 

 

 

 

 

 

 

 

내생

3

4

(**)가 대상이 된다

내생의 대상

 

 

 

Pt

B1

B2

B3

···

B16

M

J

J

J

J

J

J

J

B

···

···

Cc

Pt

···

···

Cc

Pt

···

···

Cc

 

 

 

 

 

 

 

 

 

 

 

 

 

 

 

 

 

 

 

 

 

 

 

 

 

 

 

B : Bhavaga (바왕가), A : Atīta-bhavaga (지나간 바왕가), C : bhavaga-calana (바왕가의 동요)

U : bhavaga-uccheda (바왕가의 끊어짐), P : Pañcadvārāvajjana (오문 전향), E : 전오식 중 하나

Sp : Sampaicchana (받아들임), St : Santīraa (조사), V : Votthapana (결정), M : Manodvārāvajjana (의문전향)

J : Javana (속행), T : Tadārammaa (등록), K : (kamma), KN : 업의 표상 (kamma-nimitta)

GN : 태어날 곳의 표상 (gati-nimitta), Pt : 재생연결식 (paisandhi), Cc : 죽음의 마음 (cuti-citta)

출처; 아비담마 길라잡이

 

 

 

라훌라에게도

 

불교를 믿는 목적은 무엇일까. 근본적으로 탐진치를 소멸하여 닙바나를 성취하고 궁극적으로 해탈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세상에 다시 태어 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숫따니빠따 에서 다음과 같이 말 하였다.

 

 

다시는 세상에 태어나지 말라

(숫따니빠따 339)”

 

 

부처님이 자신의 친아들인 라훌라에게 한 말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이 세상에 다시 태어 나지 말 것을 분명히말씀 하셨다.

 

이세상에 다시 태어 날일 없는 것을 열반이고 해탈이라 한다. 그런데 똑 같은 일을 반복 하는 것 만큼 지겨운 일이 없을 것이다. 다만 모르기 때문에 반복 하는 것이다. 만일 전생을 보는 눈이 있다면 생을 반복 할 필요가 있을까. 모르기 때문에 업을 짖고, 그 업의 힘으로 살아 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시 태어 나지 않은 길에 대하여 설명 하였고 그 길이 바로 부처님이 말한 84천 법문이라 볼 수 있다.

 

발판만이라도

 

부처님의 가르침 대로만 한다면 누구나 열반과 해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가르침에 대하여 부처님의 제자들이 이론적으로 체계화 하여 놓은 것이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이다.

 

그 중 청정도론을 보면 역자인 대림스님의 글을 볼 수 있는데 다음과 같이 의미 있는 글을 남겼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 금생에서 도와 과와 열반을 실현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이런 해탈열반의 확고한 발판을 얻어야 우리가 그 위대한 대스승의 교설을 만난 참다운 의미와 보람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대스승이란 청정도론의 저자인 붓다고사스님을 말한다. 비록 금생에서 해탈을 하지 못하여 다음 생에 다시 태어 나게 될 지라도 그 발판만은 마련해 놓자는 말이다.

 

어떻게 발판을 마련해 놓는 다는 말인가.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에 써 있듯이 예류자 즉, 수다원이 되는 것이다. 수다원이 되면 일곱생 이내에 해탈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예류자가 된 다는 것은 성자의 반열에 든다는 것을 말한다. 성자가 되는 순간을 고뜨라부(gotrabhu)’라 한다. 범부에서 성자로 족보가 바뀌는 순간을 말한다. 그래서 종성(種姓)이라고도 말한다.

 

일곱생 이내애

 

예류자가 되었다는 것은 열가지 족쇄중에 유신견, 법에 대한 의심, 개금취견의 세가지 족쇄를 풀었다는 것을 의미 한다. 또 고뜨라부(gotrabhu)의 순간에 닙바나를 성취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앞으로 일곱생 이내에완전한 해탈을 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 해탈이 다음생에 최대 일곱생이 될 수 있고, 또 한생으로 끝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생으로 태어 날 때 통찰지를 가지고 태어 나는 것이다. 즉 생이지(生而知)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청정도론의 서문에 붓다고사 스님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통찰지를 갖춘 사람은 계에 굳건히 머물러서

마음과 통찰지를 닦는다.

근면하고 슬기로운 비구는

이 엉킴을 푼다.(S.i.13)

 

 

통찰지를 갖춘 사람이란 태어나면서부터 갖춘 것을 말한다. 그런 사람은 계에 굳건히 머물면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 해야 한다. 그래서 근면하고 슬기로운 비구라고 하였다.

 

전생에 쌓은 공덕이 있어서

 

이번 생에 확고한 발판을 마련 해 놓자는 이야기는 결국 수행을 하여 수다원까지는 가자는 이야기와 똑 같다.

 

그런데 예류과를 증득한 다음 죽어서 새롭게 태어 났는데 그런 사실을 모른채 살아 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 어떤 인연이 계기가 되어 다시 수행을 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수행하러 들어온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전생에 쌓은 공덕이 있어서 이 자리에 앉아 있게 되었다는 말을 하는 경우가 바로 그런 말일 것이다.

 

 

 

2010-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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