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수행자를 내버려두지 않는 여인들, 본생경의 왕비, 파순의 딸, 노보살의 딸

담마다사 이병욱 2010. 2. 20. 14:24

 

수행자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는 여인들, 본생경의 왕비,마왕 파순의 딸, 노보살의 딸

 

 

 

 

 

 

 

불교의 세계관은 무엇일까. 광대무변한 우주의 생성과 소멸을 말하는 것이 불교의 세계관일까.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불교의 세계관은 철저하게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아는 것이라 하였다. , 정신과 물질을 아는 것이 불교의 세계관인 것이다. 그 세계를 어떻게 안다는 것일까.

 

한 마디로 말한다면 대상을 아는 것이다. 그 대상은 여섯감각기관이 여섯감각대상과 부딪쳤을 때 이다. 그 대상을 알게 됨으로서 좋다’ ‘싫다등의 느낌이 일어나고 집착하게 된다.

 

감각접촉(팟사, phassa)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이 부딪쳤을 때 이를 감각접촉(팟사, phassa)이라 한다. 그런데 감각접촉은 감촉(폿땁바, photthabba)과 다르다는 것이다.

 

감촉이 단지 딱딱하다’ ‘부드럽다와 같이 물질적으로 부딪치는 닿음의 의미에 불과 하지만, 감각접촉은 심리현상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52가지 마음의 작용(마음부수)중의 하나로 들어 가는 것이 감각접촉(팟사, phassa)이다. 또 감각접촉은 십이연기에 있어서 연기를 설명하는 술어 중의 하나이다.

 

그런 감각접촉은 대상에 부딪쳤을 때 그 대상을 정신적으로 만지는것을 뜻한다. 그래서 모든 인식과정이 시작 되는 것이다,

 

감각접촉이 강렬하면

 

감각접촉은 감지 하기 어려운 정신적 생명의 현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대상이 확실하게 충격을 주었을 때 분명하게 인식 한다는 것이다. 그 예로서 다음과 같은 현상을 들 수 있다.

 

 

- 목매어 죽은 것을 보면  부들부들떨게 된다.

- 유령을 보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 학대받고 있는 장면을 보면 충격을 받는다.

- 재미 있는 이야기를 들으면 강력한 인상이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다.

 

 

이렇듯 감각접촉이 강하면 선명하고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

 

알아차림 없이 쳐다 보았다가

 

그런데 이런 감각접촉은 때로 폭발적 감정과 욕정, 분노를 일으키게 한다는 것이다. 그 예로서 마하시사야도의 12연기 법문집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 젊은 비구가 소녀를 쳐다 보게 되었는데,

  그 소녀 또한 그 비구를 쳐다 보았고

  그 둘은 불타는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급기야 죽게 되었다.

 

- 어떤 장로 비구도 마하나가(Mahā-nagā)왕의 왕비를

   알아차림없이 쳐다 보았다가 미친일도 있었다.

 

 

고대 스리랑카의 둣타가마니(Duṭṭhagāmai)왕 때의 일화로서 증지부경 주석서에 나오는 이야기라 한다.

 

왜 그렇게 정신을 못 차리세요?

 

그러나 이 보다 더 극적인 이야기는 무둘락카나 본생경(Mudulakkhaa jātaka)(J.66)에 나오는 선인(rishi)이야기이다.

 

 

무둘락카나 본생경의 선인(rishi)이야기

 

선인이 공양을 받기 위해 왕궁으로 갔습니다. 선인은 신통력이 있었기 때문에 날아서 갔습니다. 선인이 갑자기 나타나자 왕비가 급하게 일어나는 바람에 걸치고 있던 옷이 흘러내렸습니다. 왕비의 매혹적인 몸매는 곧바로 오랫동안 잠재하고 있던 선인의 성욕을 솟구치게 했습니다. 선인은 음식을 전혀 먹을수가 없었습니다. 신통력도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걸어서 거처로 돌아간 선인은 욕정과 애욕의 불꽃으로 괴로워하며 누워 있었습니다.

 

사건의 전모를 들은 왕은 언젠가는 이전의 높은 본성을 되찾을 성자의 능력을 확신했기 때문에 선인에게 왕비를 바쳤습니다. 그리고는 왕비에게 선인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은밀히 지시했습니다.

 

선인은 왕비를 데리고 왕궁을 떠났습니다. 일단 왕궁문을 나오자 왕비는 선인에게 되돌아 가서 왕에게 집을 요구하라고 하였습니다. 낡은 집을 받았지만 똥과 오물을 치우기 위한 광주리 및 손도끼를 가지고 와야 했습니다. 선인은 몇 번이고 필요한 다른 물건들을 요구하러 왕에게 가야 했습니다. 왕비의 요구대로 여기저기 다니면서 집안의 허드렛일을 하느라고 기진맥진 했지만 선인은 아직도 욕정과 애욕에 사로잡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시킨일을 모두 다 한 다음에 선인은 좀 쉬려고 왕비곁에 앉았습니다. 그러자 왕비는 선인의 수염을 확 잡아 당기면서 말했습니다.“당신은 애욕과 욕망을 없애는 것이 목적인 사문(沙門)이라는 사실을 모르시나요? 왜 그렇게 정신을 못 차리세요?”이 말에 정신이 번쩍 든 선인은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명을 알아차렸습니다. 왕비를 왕에게 돌려준 다음 히말라야의 숲으로 가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여 신통력도 회복하였습니다. 선인은 죽어서 범천계에 이르렀습니다.

(마하시사야도의 12연기)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보살도를 닦는 영적인 존재도 번뇌의 불길을 피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선인은 전에도 왕비를 우연히 보았겠지만 그의 감성을 뒤 흔들정도로 감각접촉이 강력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인으로 하여금 많은 날 동안 욕정과 애욕의 불길에 휩싸이게 한 것은 왕비의 육체적 형상에 대한 분명하고 생생한감각접촉 이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감각접촉으로 인하여 억눌려 있었던 감정이 폭발할 수 도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예라 볼 수 있다.

 

훼방꾼마라는

 

그러나 본생경에서 이야기와 달리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실 때에 마라의 유혹을 이겨낸 이야기도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마라는 어떤 내용일까.

 

초기경에서 자주 나오는 마라는 사악함의 화신이고 해탈열반을 방해 하는 훼방꾼의 성격이 짙다.

 

이에 대한 각묵스님의 해설을 참고 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오염원(kilesa, 번뇌, )으로서의 마라이다.

해로운 심리현상 자체를 마라로 보는 것이다.

 

둘째, 무더기(, khandha)로서의 마라이다.

오온(五蘊) 자체가 바로 마라라는 의미이다.

 

셋째, 업형성력(abhisankhara)으로서의 마라이다.

업을 짓는 것이 바로 마라라는 의미이다.

 

넷째, (devaputta)으로서의 마라이다.

욕계의 최고천상인 타화자재천에 거주하는 신들 가운데 하나인데, 수행자들이 욕계를 벗어나 색계, 무색계, 출세간의 경지로 향상하는 것을 방해하는 자라 한다. 그리고 신들의 왕인 인드라(삭까, 제석천왕)처럼 군대를 가지고 있어서 마군(魔軍, Maara-sena)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다섯째, 죽음(maccu)으로서의 마라이다.

죽음 자체가 마라라는 뜻이다.

 

 

위 다섯가지 중에 신으로서 마라가 부처님의 성도를 방해 한 것이다. 마치 큐피드 처럼 사랑의 화살을 가지고 다니면서 사랑의 열병에 빠지게 하는 유혹자인 것이다.

 

그래서 세속적인 것에 집착하게 하고 그런 것에 연연하게 하여 묶어 놓으려 하는 것이다.

 

그런 유혹에 관한 이야기가 다음과 같다.

 

 

벌레를 쳐다보듯

 

 

마왕 파순의 딸 카마이야기

 

마라 파피야스(mara papiyas)의 명을 받은 그의 세딸 중 첫째 딸인 욕염(Kama)이 먼저 싯다르타의 성도를 저지하기 위하여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으로부터 어둠을 타고 내려와 삼매(Samadhi)의 경지속에서 열반으로 돌진하고 있는 싯다르타의 앞에 그 요염한 자태를 나타내었다. 그런데 막상 크게 동요해야 할 싯다르타는 그녀의 출현을 완전히 무시한 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참선 속에 있는 것이다.


싯다르타로부터 자신의 존재가 완전히 무시당하면서 마치 땅위를 기어다니는 벌레를 쳐다보듯 하자 마녀의 자존심은 비참하게 꺾이고 말았다. 그렇다고 이쯤에서 그리 쉽게 물러설 마녀 욕염이 아니었다.


샤카족의 왕자님이시어. 이 좋은 봄날 기분 좋은 날씨에 왕자님은 어찌하여 삶()을 포기하려 하시옵니까. 제가 보건데 지금 왕자님의 몸은 비참하게 메마르고 안색 역시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습니다. 지금 왕자님께서는 좌선(坐禪)을 해서 불가능한 길을 가겠다고 헤매고 있지만, 그 길은 인간이 갈 수 없는 길인 줄 모르고 계신단 말입니까.


자 이제 고집을 꺾으세요. 샤카의 왕자시여! 지금 왕자님의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봄을 맞는 풀들이 한참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지금 왕자님도 35세 청춘을 맞고 있는 거예요. 사람도 젊은 시절이 즐거운 겁니다. 청춘은 한번가면 두 번 찾아오지 않아요. 당신은 젊고 그 모습도 잘생겨 보입니다. 공연히 쓸데없이 아름다운 청춘을 낭비하지 말아요. 그리고 생명의 고마움도 깨달아야 돼요.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겁니다. 살아 있으면 공덕을 쌓을 수도 있어요. 당신이 이처럼 고행을 하지 않아도 순결한 수행에 힘쓰고 성화(聖火)의 제사에 제물을 바치면 공덕을 쌓게 되고 오욕(五慾)의 즐거움을 다 얻을 수 있는 겁니다.”

, 내 말을 알아 들었으며 그 좌선을 깨뜨리고 내가 하늘에서 준비해온 이 맛있는 술을 들어 보십시오.
이 술은 꿀물 보다도 달고 만다라 천화(天花)보다도 향기가 좋답니다. 이 술 한 잔이면 왕자님께서 즉시 원기를 회복할 수 있게 되고 일단 몸이 다시 건강해지면 오욕(五慾)의 즐거움을 찾게 되실 것입니다.


지금 왕자님의 나이 인생의 절정기여서 여자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자연의 법리를 어기는 것이 되어 훌륭한 사람이 할 도리가 아닌 것입니다. 비록 당장에 진실로 그런 마음이 없더라도 은근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여자의 뜻을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예요. 여자를 따르면 마음이 즐겁고 그것을 거부하면 나무에 잎과 꽃이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미 얻기 어려운 경계를 얻으셨으니 결코 예사롭게 생각하시면 아니 되는 것입니다.”

마라 파피야스의 딸 카마(Kama)는 온갖 노력을 다 하여 싯다르타의 마음을 흔들려고 하였다. 그때까지 마녀의 설득을 조용히 듣고만 있던 싯다르타가 조용히 고개를 들어 마녀에게 답변한다.


마왕 파피야스의 딸 욕염(慾染)은 들으라, 여인은 육체를 유혹하고 육체의 쾌락에는 고뇌가 따르는 법이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그러한 고뇌를 초월해 버렸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도리를 알지 못해 욕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산다.


권세나 이성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부드러운 잠자리와 맛있는 음식에 대한 미련은 인간이 탈출할 수 없는 원초적인 욕구로서 이런 것에 매여 있는 동안 욕계의 마수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난 6년간의 수도를 통해서 이제 절대적인 정신의 자유에 도달하려고 한다. 일단 내 자신이 해탈에 오르면 고통에서 고뇌하는 세상 사람들 까지도 자유롭게 해주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늘을 지나는 바람처럼 자유롭게 사고하는 나를 어떻게 다시 욕계로 끌어 내릴 수 있겠는가.”

젊은 청년의 마음을 쉽게 정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마녀들은 뜻밖에 완강한 반응을 보인 샤카족의 왕자에게 커다란 충격을 받게 되었다. 이번의 고행자는 그 동안 그들이 정복했었던 어떤 수도승보다도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있음이 판명된 것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샤카의 큰 무늬가 분명히 밝혔듯이 일단 열반에 오르기만 하면 그 혼자만이 조용히 성도의 희열을 맛보며 즐기는 것이 아니라 욕계의 지배하에 허덕이는 세상의 사람들을 일깨워 그들을 욕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하겠다고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던가.

나는 이미 선언한 바와 같이 모든 오욕으로부터 벗어난 몸이 되었다. 공연히 헛수고로 나의 성도의 길을 어지럽히지 마라.
너희들이 지금 천녀(天女, 압사라스)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도 옛적에 단 한번 선업(善業)을 쌓았기 때문이로다. 그 근본을 잊어버리고 나쁜 짓을 계속하려면 결국 지옥으로 떨어져 괴로움을 받으리라.”

이제 모든 것이 확실하게 되었다. 비록 세 명의 아름다운 마녀들이 남자를 유혹하는 32가지의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도 이 남자 싯다르타를 또 다시 욕계로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싯다르타의 성도를 막아서기엔 시간이 너무 늦었던 것이다.


싯다르타의 흔들림이 없는 대답을 듣고 마녀 욕염은 그만 부끄러움에 싸이게 되었다. 지금 까지 젊은 남자들을 유혹하여 실패한 경험이 단 한번도 없었다. 욕염은 너무도 분하여 엉엉 울면서 어둠속으로 도망쳐 버렸다.

세명의 마녀들은 울면서 아버지 마왕 앞에 섰다. 그리고 호소한다.


그 왕자의 모습이 비록 말랐으나 보름달 같이 맑은 정기가 얼굴에 서렸고 진흙속에서 솟아오른 아름다운 연꽃자체였어요. 아침 햇살처럼 밝았고 수미산(須彌山, Sumeru-Parvata)보다 더 의젓하며 타오르는 불길처럼 뿜어나오는 위광(威光)은 기필코 생사(生死)의 속박을 초월하여 세상의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이예요. 아버님, 우리의 반항은 아무 소용없어요, 비록 수미산이 무너지고 일월성신이 땅에 떨어진다 해도 그 샤카의 무니는 꿈쩍도 않으실 것입니다.”


기대했던 세 딸의 보고를 받은 마왕은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그를 용서 할 수 없게 되었다.

(부다피아)

 

 

마라의 첫째 딸인 까마(kama)가 보살을 유혹하려다 실패 하는 장면이다.

 

온갖 요염한 자태로 유혹하지만 보살은 마치 땅에 기어 다니는 벌레 보듯이 하는 것이다. 이성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부드러운 잠자리와 맛있는 음식으로 성도를 방해 하려는 것이다. 왜 마라는 보살을 유혹하여 망가지게 하려 하는 것이었을까.

 

그 것은 일단 열반에 오르기만 하면 그 혼자만이 조용히 성도의 희열을 맛보며 즐기는 것이 아니라, 욕계에서 허덕이는 세상의 사람들을 일깨워 욕계로부터 벗어 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헛공부했다고

 

이런 류의 비슷한 이야기도 우리나라에 있다. 선가에서 화두로도 사용 된다는 암자를 불 태운 노보살 이야기이다. 한자어로 파자소암(婆子燒庵)이라 한다.

 

 

파자소암(婆子燒庵) 이야기

 

옛날에 한 노보살님이 암자의 스님을 20년 동안 시봉하였습니다.

지극정성 일행삼매(一行三昧)로 그 스님을 시봉하다가 보니 노보살님이 먼저 공부의 안목이 열려 버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보살님은 딸에게 공양을 가지고 가게 하면서 말했습니다.
“스님을 껴안고는 ‘이럴 때는 어떠십니까?’하고 물어보고 그 대답을 나에게 전해다오.
딸은 어머니가 시키는대로 하였습니다.
공양을 마친 후 그릇을 거두고는 가만히 스님을 껴안았습니다. 그리고는 어머니가 시킨대로 물었습니다.
“이럴 때는 어떠십니까?
“고목(枯木)이 의한암(倚寒巖)하니 삼동(三冬)에 무난기(無暖氣)로다.
마른 나무가 찬 바위에 기댔으니, 삼동에도 따사로운 느낌이 없도다.
딸은 돌아와서 그대로 어머니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노보살님은 “내가 20년동안 시봉했는데 스님의 공부경지가 겨우 이 정도란 말인가.”하고는 벌떡 일어나 그 스님을 내쫓고는 암자에다가 불을 질러 버렸습니다.
이것이 종문(宗門)에 전해오는 유명한 파자소암(婆子燒庵) 공안입니다.

(인터넷 사이트)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서 다운 받은 내용이다.

 

노 보살이 스님의 공부를 시험 하기 위하여 자신의 딸을 암자에 보내어 수행자를 유혹하는 장면이다. 감각접촉으로 인하여 그 동안 억눌려 있었던 감정을 폭발하게 하자는 의도 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행자는 노보살의 딸을 마치 고목과도 같이 온기 없는 존재로 본 것이다. 이런 말을 듣자 노보살은 헛공부했다고 실망하며 더 이상 시봉 하지 않고 암자를 불살라 버리기에 이른다.

 

이 이야기는 부처님의 성도 장면과 매우 유사하다. 보살이 온갖 감각접촉에 의한 유혹하는 마왕의 딸을 벌레 보듯이 하는 장면이나, 수행자가 노보살의 딸을 고목나무 보듯이 대하는 장면이 그렇다.

 

결국 보살이나 수행자나 제대로 된 수행을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노보살은 암자를 불질러 버렸다.

 

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한국불교가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는 좋은 예라고도 말한다. 마치 노보살의 행위에 대하여 정당성을 부여 하려는 듯한 태도를 말한다.

 

광적으로 집착하고 미치게 하는 것

 

사람들은 적대적인 대상을 보면 분노하고, 무서운 대상을 보면 두려워 한다. 불쾌한 말은 짜증나게 하고, 부추켜 주는 말을 하면 자만심이 생겨 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감각접촉이 분명하고 강렬하면 감정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특히 알아차림이 없는 감각접촉이라면 광적으로 집착하고 미칠 지경이 되어 버린다. 숫따니빠따에 나오는 파멸이 대표적 예일 것이다.

 

이를 법정스님의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한창때를 지난 남자가 틴발 열매처럼

불룩한 유방을 가진 젊은 여인을 유인하여

그녀를 질투하는 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면,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

(숫따니빠따110, 법정스님역)

 

 

이 게송에 대하여 석지현 스님의 번역은 더 직설적으로 표현 하였다.

 

 

늙은 사내가 유방이 팽팽한 젊은 여자에게 미쳐

그녀에 대한 생각 때문에 도시 잠을 자지 못하는 것,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

(숫따니빠따110, 석지현스님역)

 

 

감각기관이 감각대상에 부딫쳤을 때 알아차림이 없다면 감각대상에 놀아난다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파멸로 인도 하기 때문에 파멸의 문이라고 표현 한 것이다.

 

가만 내버려 두지 않는 여인들

 

선가에서 흔히 말하는 도고마성(道高魔盛)이라는 말이 있다. 수행이 깊어 질수록 그 만큼 장애도 무성 하다는 말이다. 그런 대표적인 예가 부처님이 정각을 이룰 때 마왕 파순의 예일 것이다.

 

이처럼 수행자가 수행이 깊어지면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 모양이다. 특히 수행에 있어서 여인의 영향은 절대적이라 볼 수 있다. 위의 세가지 이야기가 모두 여인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행과 여인의 관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 같다. 그래서 예로부터 여인이 있는 곳을 피해 멀리 산중에 수행처를 삼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심산유곡에 있는 암자에 까지 마다해 하지 않고 찾아 다니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런 이야기를 교계신문 기자의 블로그에서 보았다.

 

 

난 부처님만 보고 가면 되지 스님은 안 봐도 되는 데요.

여기 스님은 모두 밍크코트 입은 사람만 상대 하는데

난 능력이 없고 보시도 못하니 조용히 법당에 앉았다 그냥 가요

(http://blog.naver.com/kimnami57?Redirect=Log&logNo=120042304055)

 

 

어느 여신도가 한 말이다. 자신은 돈도 없고 보시도 많이 못하니 스님이 상대해 주지 않기 때문에 법당에 있다 조용히 간다는 것이다. 스님을 상대하는 사람들은 돈 많고 밍크코트 입은 부자집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차라리 가난한 여인이

 

어느 종교이든지 종교인이 유명해지면 신도들이 이들을 가만 내버려 두지 않는다고 한다.

 

불교의 경우 스님이 해당 되겠고, 개신교의 경우 목사, 천주교의 경우 신부가 이에 해당 될 것이다. 이들 종교인을 찾아 가는 사람은 돈 많고 밍크코트 입은 사람들인 모양이다.

 

이들 여인들이 보기에 유명종교인은 매력적으로 보일 것임에 틀림 없다. 또 종교인들이 돈 많고 밍크코트 입은 사람들만 상대 하다 보니 이들과의 관계가 돈독 해 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 여인들이 과연 얼마나 수행에 도움이 될까. 혹시 강렬한 감각접촉을 일으켜서 미치게나 하지 않을까.

 

만일 그렇다면 차라리 가난한 여인이 법당에 조용히 앉아 있다 가는 것이 수행자의 공부를 더 도와 주는 것이 아닐까.

 

 

 

 

2010-02-2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