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초기불교를 하면 불교의 퇴보라는데, 현응스님의 깨달음과 역사를 보며

담마다사 이병욱 2010. 2. 24. 17:29

 

초기불교를 하면 불교의 퇴보라는데,  현응스님의 깨달음과 역사를 보며

 

 

 

 

 

 

 

조계종 교육원은

 

우리나라 불교를 대표 하는 조계종의 홈페이지에 들어 가면 조직도를 볼 수 있다. 조직 중에 교육원과 포교원이 있는데, 교육원은 스님들의 교육을 담당 하는 부서이고, 포교원은 불교를 홍보 하고 불자로 만들기 위한 부서라고 한다.

 

교육원에 교육자가 들어 갔다고 해서 일반재가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원이 아니라 승가를 대상으로 것이 이 용어의 특색이다. , 조계종에서 교육이라는 용어는 승가교육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 승가교육의 총책임자인 현응스님의 글을 불교평론의 열린논단에서 보았다. 제목은 깨달음과 역사(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917)’이다.

 

현응스님의 이야기는

 

현응스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요지는 무엇일까. 글을 읽어 보면 대승불교의 실천을 특히 강조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은 역시 보살사상이다.

 

그러면서 대승불교가 나올 수 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에 대하여도 이야기 한다.

 

, 초기불교 이래 부파불교시대에 이르기까지 불교가 사회적 역할을 제대로 못했다는 것이다.

 

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초기불교의 연기론은 세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일깨워 주지만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바꾸어나가야 하는지 설명하지는 않았다. 즉 초기불교의 무상, 무아, 공의 가르침은 개인의 삶과 사회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과 목적, 방법, 이유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초기불교의 핵심키워드라 할 수 있는 무상’ ‘’ ‘무아에 대한 비판이다.

 

초기불교가 허무주의라고

 

초기불교가 개인의 삶과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 목적. 이유 등에 관한 언급이 없었다고 말하고, 초기불교의 세계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세상이 무상하고 무아하다면 결국 세상이 허망하다는 것인데세상이 허망하다는 이론이 세상을 변화시킬 방향과 방법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초기불교의 세계관이 무상하고 무아라면 결국 세상을 허망하게 보는 것이 아니냐고 결론아닌 결론을 짖는다.

 

그러면서 실재성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 나간다.

 

 

대다수 사람들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어떤 종류나 형태의 실재성 을 전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실재성이 없다는 가르침을 받아들이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실재론을 전제로 하지 않는 삶의 경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너무 막연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상, 무아, 공을 내세우는 불교가 대중을 설득하기 힘든 점이었다.

 

 

무상 고 무아를 특징으로 하는 초기불교의 사상으로는 대중을 설득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승불교가 출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 하고 있다. 그 이유는 대중들이 모든 것을 실재 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실재론에 서 있는 타 종교와 대항 하기 위하여 대승불교의 출현은 필연적이었고, 그 실천적 핵심사상이 보살사상이라는 것이다.

 

보살은 실천적 삶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또한 깨달음과 역사의 합성어라는 새로운 주장을 내놓고 있기도 하다.

 

초기불교를 하면 불교의 퇴보라는데

 

그러면서 오늘날의 불교현실을 개탄 하고 있다. 

 

초기불교가 소개 되어 널리 퍼져 나가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무상 고 무아라는 초기불교의 문제의식 수준으로 회귀 하고 있는 현상을 안타깝게 생각 한다는 것이다.

 

결국 그와 같은 과거회귀는 역사성과 사회성을 외면하고 오로지 연기론적 범주론에 머무는 것으로 간주 할 수 있어서 불교의 퇴보라고 본다는 것이다.

 

초기불교를 하면 불교의 퇴보로 생각 하는 현응스님은 최근 유행 하고 있는 위빠사나 수행에 대하여도 매우 비판적이다. 오로지 개인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하는 불교와 마음수양으로 치우치는 불교에 대하여 대단히 안타깝게 생각하고 우려 스럽다고 글을 맺는다.

 

초기불교를 하면 불교의 퇴보일까. 왜 초기불교가 각광을 받고 있는지에 대한 자기반성은 찾아 볼 수 없다.

 

왜 미얀마로 몰려 갔을까

 

1600년 전통의 한국불교가 제대로 가고 있다면 초기불교는 발도 붙이지 못할 것이다. 또 초기불교의 수행법인 위빠사나 역시 소개 되어도 그다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할 것이다.

 

초기불교가 유행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그것은 현재의 한국불교에 대하여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승가는 물론 재가조차 만족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미얀마로 스리랑카로 구름처럼 달려 간 것이다.

 

 거기에서 배워온 교학과 수행법이 전파 되었을 때 사람들은 환호 하였다. 제대로 된 불교를 배우는 것을 무척 행복해 하였다는 것이다. 교계관련 신문이나 인터넷 사이트에 그런 기사는 넘쳐 난다.

 

참나와 하나님은 어떤 관계일까

 

1600년 전통의 한국불교가 문제일까. 나름대로 생각 해 보았다. 특히 한국과 같이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구원관으로 무장한 마치 전투집단과 같은 기독교와 공존 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들과 경쟁하여 극복 해 나갈 수 있을까에 관해서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승에서 표방하는 진여, 본마음, 참나와 같이 무언가가 있다라는 실재성은 기독교의 아류 정도로 생각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예를 불교방송에서 매주말에 방송하는 정목스님의 마음으로 듣는 음악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 방송에서 스님은 매번 다음과 같이 나레이션 한다.

 

 

자비로 지켜 보는 의식이 있으니 

항상 거기에 있어 왔고,

언제나 현존 하는 것이 참나이다.

그 것은 몸도 아니고, 생각도 아니고,

감정도 아니고, 대상도 아니고,

세상도 아니고, 보이는 것도 아니다.

참나는 영원히 현존하여 보는 자이고,

일어 나는 모든 것을 주시 하는 자이고,

모든 것을 지켜 보는 목격자이다.

 

 

참나를 설명하는 나레이션이다. 여기에서 참나 대신에 하나님을 치환하면 어떻게 될까. 기독교의 이야기와 거의 구분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속성중의 하나가 절대유(絶對有)’이다. , 기독교의 유일신은 ‘존재 그 자체’이다. 그 말뜻은 무()의 가능성이 털끝만치도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신은 언제나 있는 것이다. 그래서‘절대유’인 것 이다.

 

참나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절대유의 유일신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대승에서 말하는 실재론적 종교에 대항 하기 위하여 만든 실재라는 것일까.

 

사찰대 교회를 비교해 보니

 

한국불교가 상구보리 하면서 하화중생한다고 하면서 보살사상을 이야기 하지만 실제로 체감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런 현상은 도시에서 볼 수 있다. 도시에서 사찰 구경하기 힘들다.

 

그 대신 널려 있는 것은 교회이다. 그런 교회들은 유치원에서부터 청소년 공부방, 노인들을 위한 경노당까지 지역 사회를 위하여 봉사 하는데 그들 교회끼리 경쟁 한다는 것이다.

 

그런 예를 살고 있는 동네에서도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조사 (http://blog.daum.net/bolee591/16154395)한 바에 따르면 살고 있는 동네의 가구수는 4,066가구에 동의 인구가 11,925명이다.

 

그런데 동네에 교회는 15개이다. 사찰은 단 한군데 없다. 이것이 우리나라 불교의 한 단면이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조사한 또 다른 자료 (http://blog.daum.net/bolee591/16154373)는 다음과 같다.

 

 

안양권의 종교시설 비교표

 

 

 

 

 

 

 

61

50

24

471

 

 

27

10

10

171

 

 

13

14

12

103

 

 

7

7

4

52

 

 

108

81

50

797

928개소

 

비율

8.7%

5.3%

85%

100%

 

 

인터넷에 나오는 전화번호를 활용 하여 조사한 것이다. 도시는 안양권이다.

 

안양권의 도시는 우리나라에서 표본도시로 알려져 있다. 서울 남부에 위치한 이 도시는 구도시와 신도시가 조화되어 있고, 서민과 중산층이 골고루 섞여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지역에서 올라온 사람들 또한 골고루 분포 되어 있다. 따라서 항상 민심을 측정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되기도 하는 지역이다.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

 

비단 교회대 사찰수에서만 비교될까.

 

교계신문 (http://news.buddhapia.com/news/BNC000/BNC0001627.html)에서 본 자료를 이용하여 표를 만들었다.

 

 

2004년 포교원자료

 

불교

개신교

천주교

국회의원(17)

34(11.4%)

103(34.4%)

66(24.1%)

단체장의 종교

3(19%)

6(37%)

4(33%)

기초단체장

39(17%)

41(17%)

25(11%)

종교사학(중학교)

14(2%)

175(25%)

 

종교사학(고등학교)

14(1.4%)

222(24%)

 

종교사학(대학)

4(1.4%)

201(73%)

 

종교복지시설

322(14%)

1,401(60%)

620(26%)

방송점유율

0.07%

3%

 

 

  

국회의원의 경우 개신교에 비교 하여 1/3수준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심각한 분야가 교육분야이다. 수십배 차이가 나서 비교대상이 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열세는 인터넷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개인적으로 조사한 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다.

 

 

경기도의 종교별 홈페이지

 

사 찰

성 당

교 회

홈페이지 개수

(경기도 종교단체)

89

98

1,333

비율(1,520개소)

5.8%

6.4%

87.6%

 

 

 

인터넷 분야 역시 격차가 매우 심하게 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600년 전통의 대승불교의 성적서는

 

이런 현상에 대하여 교계 매스컴에서는 1:10현상이라고 한다. 불교가 개신교에 비교하여 항상 1/10 페이스를 유지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시주대 헌금 비율도 1:10이고, 사찰대 교회수 역시 1:10을 유지 한다.

 

이런 현상의 영향이어서 일까 어떤 네티즌은 말하기를 우리나라 불자는 실질적으로 3~4백만명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통계상으로 1100만명이고, 대외적으로 2000만 불자라고 하지만 실질적 불자수는 훨씬 적다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불교의 현주소이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표방한 1600년 전통의 대승불교의 성적서 치고는 너무나 초라한 수치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거품이 빠지고 나면

 

이런 현상에 대하여 최근 국가인권위에서 10년간 활동을 마치고 퇴임한 법안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찰 안에 있으면 불교가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회의 고위층, 부유층이 살고 있는 강남, 서초, 송파, 강동과 같은 곳은 이미 불교가 제3의 종교로 전락했다. 지금이야 수치상으로 최대종교니까 고개 숙일 뿐이다. 거품 빠지고 나면 그런거도 없어질 것은 뻔하다. 지금은 썩은 도끼자루 잡고 있는 꼴이다.”(불교닷컴)

 

 

불교가 수치상으로 최대 종교이지만 거품이 빠지고 나면 본격적으로 압박이 들어 올 것이라는 경고성 메시지다.

 

그런 신호는 이미 포착 된 것 같다. 최근 김윤옥여사의 행보를 보면 그럴 개연성이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 영부인 김윤옥여사는 공식행사에서도 십자가 목걸이를 버젓이 차고 다닌다. 누가 무어라 하건 말건 대 놓고 행동 하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미디어법, 4대강, 세종시등을 밀어 붙이고 나면 그 다음 수순은 무었일까. 아마도 그 것은 종교문제일 경우가 크다.

 

그의 임기 내에 기독교를 크게 부흥시키고, 불교에 대하여 손 보는 작업을 할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일아스님의 주장은

 

조계종 교육원은 스님들의 교육을 총괄하는 부서이다. 그런 부서의 총책임자가 초기불교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글로써 확인 하였다.

 

승가교육은 백지에 새로 짜야 합니다.doc

 

승가교육은 백지에 새로 짜야 합니다.pdf

 

 

 

그렇다면 지난해 11월 미디어붓다에 기고된 일아스님의 승가교육은 백지에 새로 짜야 합니다는 물 건너 간 것과 다름 없다.

 

현재의 한국불교의 현실을 알리면서 초기경전인 아함경과 니까야를 승가교육의 교과과정에 넣자는 주장은 주장으로서 그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방식대로 계속 나가겠다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지금 이대로 영원히!

 

보수기득권세력의 특징은 변화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대로가 좋은데 굳이 바꿀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지금 이대로 영원히!”를 외치는 것이다.

 

그러나 진보개혁세력은 항상 변화를 추구 한다. 그 것도 발전적인 방향의 변화를 원한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전 인도에서 기존보수기득권 세력에 반발하여 대승불교가 일어 났듯이, 2000년 후 한국에서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차이점이라면 다시 옛날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다. 보수로의 회귀를 말한다.

 

종교권의 보수회귀 본능

 

정치권과 달리 종교권은 보수회귀본능이 있다. 종교의 원래 취지에서 한참 이탈 되었을 경우 예외 없이 초기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발생 되었다.

 

그런 현상은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처음 마음 먹었을 때 와 달리 방향이 틀어 졌을 때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말이 대표적일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초기불교회귀 운동은 일종의 보수로의 회귀본능이다.

 

그 것은 지금의 한국불교가 부처님 당시의 불교에서 한참 멀리 이탈 되어 왔기 때문이다.

 

기독교에 먹힐 가능성이

 

초기불교에서 이탈된 불교의 운명을 인도에서 보았다.

 

인도 불교가 멸망한 이유가 초기불교의 가르침에서 너무나 멀어진 결과로 빚어진 결과라는 것은 여러가지로 증명이 되는 사항이다. 그런 불교가 기독교의 유입으로 인하여 크게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가장 큰 요인은 실재성을 인정 하는 것이다. 참나가 있다고 주장 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 개념이나 참나 개념은 매우 유사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진보적인 기독교 신학자인 오강남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엇보다 종교를 자기중심적인 나를 비우고 내 속에 있는 참 나를 찾는 길로 받드는 것이다. 내 속에 있는 참나는 결국 절대자이기에, 그 절대자와 내가 하나라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오강남교수, 불교평론 2009년 가을,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872)

 

 

대승불교의 참나와 기독교의 절대자를 같은 개념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서는 기독교를 극복 할 수 없다. 아니 인도에서 불교가 힌두교에 먹혔듯이, 한국에서 대승불교가 기독교 먹힐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불교로 되돌아 가자는 것이다.

 

교학을 제대로 아는지

 

현응스님은 자신의 글에서 초기불교의 무상 고 무아가 허무주의를 조장 하는 것이 아니냐고 비판하였지만 초기불교 교학을 제대로 알고 비판 하였는지 의문스럽다.

 

한마디로 무상 고 무아사상은 허무와 허망할 겨를이 없다는 것이다. 바로 지금 여기서 알아차리는 데 초기불교가 허무주의라니 놀라울 뿐이다. 아마도 사회를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일 것이다.

 

승가사회와 달리 사람이 사는 사회는 부처님의 말씀대로 그야말로 고통의 바다이다. 주로 모르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알게 하기 위한 것이 부처님의 84천법문이라 볼 수 있다. 각자 다른 근기에 맞추어 설법 하다 보니 84천가지나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나오는 문은 항상 무아연기이다. 그런데 알아듣기 어려운 말로 하면 이해 하기 어렵다. 대승에서 말하는 법문이 특히 그렇다. 대표적으로 불이법문같은 것이다.

 

그런 법문은 승가사회에서나 통용 될 지 모르지만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는 그다지 효과가 없다. 왜냐하면 알아듣기 어렵기 때문이다.

 

84천 법문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렇다면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서는 어떤 말을 해야 할까. 한마디면 족하다. 그 말은 알아차려라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부처님의 84천 법문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알아차림이라고 말한다. 알아차림 다음으로 중요한 말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렇네이다. ‘그러려니’ ‘그런가 보다하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 가는 사람의 고민은 무엇일까. 고민도 일종의 고통인데 그 고민의 대부분이 가장 가까운 사람들끼리의 인간관계라는 것이다. 바로 가족간의 갈등이 대부분을 차지 한다는 것이다.

 

부부와의 관계, 부모와 관계, 자식과의 관계로 인한 갈등과 고민이 적게는 50%에서 많게는 80%까지 된다는 것이다.

 

이런 갈등으로 인한 고통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열심히 관세음보살을 염하면 그 가피로 해결 될까. 신에게 기도하면 신이 소원을 들어 줄까.

 

초기불교적 관점으로 말한다면 알아차리는방법 밖에 없다. 그리고 현실을 인정하고 출발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네 하라는 것이다.

 

유발수행자들의 역할이

 

어떤 이는 한국불교가 최전성기를 맞고 있다고도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지금의 한국불교는 거품일 뿐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래서 지금 변하지 않으면 조만간 커다란 위기가 닥칠 것이라고 경고 하기도 한다.

 

분명한 사실은 모든 보수세력이 다 그렇듯이 보수기득권 세력은 변화를 싫어 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대로 계속 가기를 바랄 뿐이지 스스로 개혁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특히 종교단체에서 그런 경향은 농후 하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초기불교의 아함경이나 니까야가 승가교육체계에 도입되는 것은 기대난망이다. 만일 도입 되었다가는 스스로 정체성을 부정 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재가불자들이 깨어 나야 한다. 재가불자들이 승가 보다 더 많이 알아서 개혁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런 면에 있어서 유발수행자들의 역할이 기대 된다.

 

 

 

2010-02-24

진흙속의연꽃

승가교육은 백지에 새로 짜야 합니다.doc
0.07MB
승가교육은 백지에 새로 짜야 합니다.pdf
0.17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