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기독교는 품격이 다른 종교, 불살생과 불살인의 계율 비교를 보며
서울과 수도권의 서민들이 즐겨 찾는 곳중의 하나가 ‘오이도’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오이도에 가려면 전철4호선을 타야 한다. 4호선의 마지막역이 오이도인데 오이도 포구를 가려면 한참 더 가야 한다. 오이도까지 연결 되는 버스가 있기 때문에 문제 없지만 아파트 단지를 빙빙 돌아 도착 하기 때문에 꽤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오이도는
오이도는 섬이 아니다. 예전에는 섬이었지만 지금은 육지와 연결 되어서 그저 오이도로 불릴 뿐이다. 그런 오이도를 일요일에 찾아 갔다.
언제나 그렇듯이 오이도포구는 서민들로 넘쳐 난다. 가족단위로 또는 연인끼리 찾는 오이도의 볼거리는 단연 선착장의 해물을 파는 곳이다.
바다에서 갓 잡은 싱싱한 해산물을 저렴하게 파는 선착장은 전형적인 어촌의 ‘생계형’ 재래시장이라 볼 수 있다.
한 때 길 건너 편의 대형수산시장의 압력에 문을 닫은(“오이도 포구를 개방해 주세요” 관광객을 볼모로 이권다툼 하는 두세력, http://blog.daum.net/bolee591/16154333) 적도 있었지만 어촌계의 강력한 항의에 다시 문을 연 모습 (서민들이 즐겨 찾는 곳, 오이도에서 고단한 일상의 회포를, http://blog.daum.net/bolee591/16154413)을 지난해 볼 수 있었다. 오이도를 즐겨 찾는 입장에서 그런 상황에 대하여 글을 올리기도 하였다.
포장마차형 시장으로
기나긴 겨울이 지나 이제 봄바람이 불어 오는 길목에 찾은 오이도 선착장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포구 양옆에 진을 치고 있었던 생계형 노천시장이 사라진 것이다. 그 대신 주황색 천막이 쳐진 포장마차형 시장이 등장 한 것이다.
오이도포구.
노천시장이 포장마차형으로 바뀌었다.
등간격으로 나누어진 천막안은 겨울의 칼바람을 피하기가 좋아 보였다. 추운 겨울에도 장사를 해서 생계를 유지 해야 하는 상인들의 입장에서 이 보다 더 좋을 수 없을 것 같다. 더구나 각 천막 마다 연통이 있어서 난방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난방기구가 ‘나무를 때는’ 난로 형식 이었다는 것이다. 커다란 나무난로 위에는 조개구이용으로 활용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무를 때는 난로.
그 위에 조개구이를 하고 있다.
선착장에서 파는 해산물은 굴이나 조개가 대부분이지만 시장의 거의 대부분이 활어도 취급 하고 있었다. 수산시장에 가면 흔히 보는 광어, 가오리, 삼식이, 전어등 크고 작은 활어들이 있었는데 즉석에서 잡아 즉석에서 먹는 식이었다.
가게라고도 볼 수 없는 허름한 한두평 짜리의 옹색한 공간에 탁자 또한 한두개 놓여 있어서 그 자리에서 잡은 싱싱한 활어를 소주와 함께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크고 넓직한 길거편의 회집 대신에 이곳을 찾는 이유는 아마도 가격이 싸기 때문일 것이다. 회를 먹을 때 나오는 일명 ‘츠끼다시’라 불리우는 서비스 음식이 모두 생략 되기 때문에 가격은 1/3선이라 한다.
활어를 잡는 모습을 구경하고
포장마차 형식으로 변한 영세한 공간에서 주인은 열심히 활어를 다듬고 있다. 100% 여자들이 이 작업을 하는데 혼자서 활어를 써는 것 뿐만 아니라 식탁도 챙겨 주고 돈계산도 하는 일인 3역 4역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옆에 돌아 볼 시간도 없이 정신 없이 일하고 있을 때는 손님이 가장 많이 몰려 온다는 일요일 오후 시간이다.
포구에 구경 나온 사람들이 활어를 잡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다. 아마도 그런 광경은 처음인 듯이 매우 신기하게 아낙의 손놀림에 주시를 한다.
거의 대부분이 활어회를 떠 주고 있다.
펄펄 살아 있는 활어가 날카로운 회칼에 모가지가 달아나고 피가 철철 나는가 하면 껍질과 뼈을 바를 때도 퍼덕이는 모습을 보면 새삼 생명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즉석에서 산 물고기를 생채로 잡아 퍼덕이는 살코기를 즉석에서 소주와 함께 먹는 현장에서 모두가 살생을 하는 공범 같아 보였다.
고기들이 그 자리에 오기 까지
사람들은 밥을 먹을 때 그 밥의 쌀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생각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먹는다. 마찬가지로 육류와 어류가 반찬으로 올라올 때 역시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알지 못하고 맛있게 먹는다.
반찬백화점과 같은 부페에서도 각종 산해진미로 쌓여 있지만 그 음식들이 거기까지 오게 된 과정을 전혀 알지 못한 채 품위 있고 격조 있는 분위기와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음식을 즐긴다.
그런데 그 고기들이 그 자리에 오기 까지 어떤 ‘죽음의 과정’을 거쳐서 오게 되었다면 맛이 날까. 또 그 과정을 직접 보았다면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
오이도 포구에서 본 현장은 그런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방금 살아 펄떡이든 활어가 한 칼에 모가지가 날아 가고 회를 뜰 때 마다 펄떡이는 것을 본다면 과연 그렇게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우리의 몸과 피가 모두 생명 있는 것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한편으로 생명이 있는 것들이 죽어 가면서 내 뿜는 독기가 그대로 우리 몸에서 피가 되고 살이 될 수 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까 사람들은 갈수록 더욱더 잔인해 지고 자연과 환경을 파괴 하는데 서슴지 않는 것 같다.
일체중생을 어머니로
불교에서는 ‘살생’하지 말라고 한다. 살인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살생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죽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자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다섯가지 계율 중의 하나로서 불살생계율을 지키려 노력 하는 것이다.
이런 불살생계는 매우 의미가 크다. 생명이 있고 정신작용이 있는 모든 존재를 ‘중생’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런 생명존중 사상의 절정은 티벳의 ‘일체중생을 어머니로’ 보는 사상일 것이다. 티벳에서는 모든 중생이 수 없는 윤회의 과정에 있어서 한 번쯤은 나를 낳아준 어머니 이었다고 생각 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상을 가진다면 함부로 고기를 먹지 못할 것이다.
중생에 대한 개념은 금강경에도 잘 나와 있다. 난생, 태생, 습생, 화생이 유정중생이다. 따라서 모기 하나 죽이는 것도 엄밀히 말하면 살생에 해당 되는 것이다.
하물며, 물고기나 지능이 더 있다는 개나 소와 같은 동물을 죽인다면 그 것 역시 불살생계를 어기는 것이 된다.
이렇게 살생을 금하는 불교와 달리 유일신교는 ‘살인’을 하지 말라고 한다. 그 말 뜻은 인간만 아니면 죽여도 된다는 뜻으로도 해석 할 수 있다.
바로 이점에 있어서 자연과 우주를 바라 보는 불교와 유일신교의 차이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10계명과 오계의 차이는
불교의 오계와 기독교의 10계명은 어떤 차이가 있을 까. 표로 만들어 보았다.
종교별 계율비교
|
개신교의 10계명 |
로마가톨릭의 10계명 |
불교의 5계 |
1 |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
하나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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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살생(不殺生 :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지 말 것) |
2 |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아라.
|
불투도(不偸盜 :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말 것) |
3 |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
불사음(不邪淫 : 정당하지 않은 성관계를 갖지 말 것) |
4 |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내라. |
부모에게 효도하라.
|
불망어(不妄語 : 거짓말을 하지 말 것) |
5 |
네 부모를 공경하라. |
사람을 죽이지 말라. |
불음주(不飮酒 : 술을 마시지 말 것) |
6 |
살인하지 말지니라. |
간음하지 말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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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간음하지 말지니라. |
도적질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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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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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네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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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찌니라.
|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
|
|
표를 보면 모든 것이 확실해 진다. 개신교의 경우 여섯번째로 살인하지 말라고 하고, 가톨릭은 다섯번째로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한다. 모두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할 뿐이지 살아 있는 것을 죽이지 말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불교에서는 불자라면 지켜야 할 계율중 가장 ‘첫번째로’ 강조한 사항이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것이다.
이 것 하나만 보아도 불교의 세계관과 유일신교의 세계관은 확연히 구분된다. 그렇다면 왜 이와 같이 세계관이 형성 되었을까.
신과 인간이 계약을 맺어서
유일신교의 십계명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사항이 ‘신의 명령’이다. 나 이외에 절대 다른 신을 믿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것은 신과 인간의 계약관계를 뜻한다. 신과 인간의 계약관계가 맺어진 것은 예수 이전을 ‘구약’이라 하고, 예수 이후의 계약관계를 ‘신약’이라 한다.
이렇게 신과 인간의 계약 관계를 맺고 나서 신은 인간에게 권능을 부여 한다. 신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을 지배 하는 권능을 말한다. 그 대신 인간은 신을 숭배 하여야 한다.
이렇게 신으로부터 모든 피조물에대한 지배의 권능을 부여 받은 인간은 오로지 하나의 신만을 숭배 하게 되고 자연을 지배하된다. 이것이 로마가톨릭의 지배하의 ‘중세천년’간이다.
근대에 들어와 신중심에서 인간중심으로 바뀌게 된다. 문예혁명과 종교개혁을 통하여 중세의 신중심체제가 붕괴하여 그 자리에 인간이 대신 차지 하게 된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이 사라진 것은 아니고, 다만 초점이 신에서 인간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근대의 시작이다. 유럽에서 신중심에서 인간중심으로 바뀌게 되자 어떤 일이 일어 났을까.
인간이 자연을 지배한 결과 어떤 일이
유럽의 근대를 보면 ‘산업혁명’과 ‘제국주의’의 역사라 볼 수 있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게 됨에 따라 산업혁명이 일어 나게 되었고, 또 인간이 신을 대신하여 같은 인간을 지배하게 되자 제국주의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 다음과 같이 진행 되었다.
근대의 인간 |
출 현 |
결 과 |
인간의 자연지배 |
산업혁명이 일어남 |
환경파괴 |
인간의 인간지배 |
제국주의 출현 |
전쟁발발 |
인간의 자연지배의 결과 산업혁명이 진행 되었고 그 결과 자연의 파괴, 환경오염으로 나타났다. 또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 지배의 결과 제국주의가 출현 하였고 필연적으로 크고 작은 전쟁이 잇따랐다. 이것이 인간이 신으로 부터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권능을 부여한 결과라 볼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이 신의 피조물로서 자연을 지배 할 수 있는 권능이 부여 되었다고 인정 되는 순간 자연은 파괴 될 수 밖에 없고, 환경은 오염 될 수 밖에 없으며 또한 인간이외의 생명은 하나의 자연현상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왜 십계명에 신이 항상 서두에 나오는지, 또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계율이 없는지에 대한 이유가 바로 ‘십계명’에 있는 것이다.
창세기의 명령에 따르면
유일신교에 창세기의 명령이 있다고 한다. 신이 인간과 자연을 창조 하고 난 다음에 자연의 지배에 대한 인간의 권능을 부여하고 명령 한 것이라 한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구약 1장)
이와 같은 창세기의 명령은 지금도 진행 되고 있다. 4대강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연파괴외 환경오염이다. 무려 22조원을 쏟아 부어서 진행 되고 있는 4대강 사업은 모든 일을 중장비로 하기 때문에 일자리 창출 효과도 없을 뿐더로 건설사들만 배 불려 줄 것이라 한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그와 같은 사업을 강행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현정부가 ‘기독교 정부’이기 때문에 가능한 요인도 있을 것이다. 그런 배경에는 자연은 인간을 위하여 정복 하고 다스리는 대상이라는 것과 생명경시현상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정부가 아니라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유가 창세기의 명령 때문이라면 무리일까.
창세기의 명령중의 또 하나가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다. 이 말은 인간을 지칭 하는 말이다. 인간 이외의 존재는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 최대한 많이 나아서 인구가 많아 져야 되는 것을 말한다. 사막의 부족국가 시대에 나온 이런 이야기 또한 우리나라에서 실천 되고 있다.
‘생물학적 전도’를 한다고
신생아 출산율이 갈수록 떨어지다 보니 가족정책이 180도 바뀌었다. 세자녀 이상에게 혜택을 주는 정책이 남발 되고 있는 것이다.
출산율 저하는 세계적으로 거스를 수 없는 추세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출산정책에 집착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도 종교계, 특히 개신교에서 적극성을 보이는 이유는 혹시 창세기의 명령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생육하고 번식하는 신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 해서일까 목사들의 자녀수가 유난히 많다고 한다. 일반인이라면 두자녀 갖기도 부담스러운 세상에 자녀가 셋이상을 가졌다면 일단 유일신교 신자인지 생각 해 볼 일이다.
왜 유일신교에서 적극적으로 출산을 장려 하고 또한 정부에서 앞장 서는 것일까. 그 이면에 출산을 통한 ‘생물학적 전도’를 하고 있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세계적인 종교가 되려면
세계적인 종교가 되려면 교리가 보편적이어야 한다. 이 말은 민족주의 종교를 뛰어 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힌두교가 신자는 많지만 전 세계적으로 확산 되지 못한 이유가 ‘민족종교’이기 때문이다. 힌두교의 특징중의 하나인 카스트 제도를 용인 할 수 있는 나라는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유교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의 민족종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유일신교와 불교는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다. 그렇게 된 데는 전세계적으로 통용되고 누구나 받아 들일 수 있는 보편 타당한 가르침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차이가 있다.
불교는 그리스도교보다 백배나 더 실재적이고 객관적이고 냉정한 문제 제기의 유산을 갖추고 있다.
이 말뜻은 무엇일까. 불교는 저 세상의 신 같은 것을 절대로 인정 하지 않고 단지 마음이 만들어 낸 것으로 본 것이다. 따라서 이세상의 삶을 객관적으로 보기 때문에 냉정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와 같은 열정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 전통은 어떻게 갖게 되었을까. 그 것은 종교의 성립배경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품격이 서로 다른 종교
불교가 기독교와 가장 차이 나는 점이 불교는 ‘수백년동안 철학적 운동이 지속된 다음에 등장’ 하였다는 것이다. 바로 이점이 기독교의 탄생 배경과 가장 차이 나는 부분이다.
기독교는 유태교를 배경으로 하여 나왔고, 불교는 힌두교를 비판 하면서 출현 하였다. 서로 배경으로 하는 종교를 비판 하면서 출발한 공통점은 있지만 그 방향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
비판종교 |
철학적 사상의 배경 |
불교 |
브라만교 |
범아일여를 주장 하는 고도의 철학체계인 브라만교를 비판하며 등장 |
기독교 |
유태교 |
유일신을 믿는 민족주의적 부족종교로부터 시작 |
기독교 이전의 유태교는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한 부족종교에 불과 하였다. 반면에 불교이전에 있었던 브라만교는 종교이전에 고도의 철학 이었다는 것이다.
브라만교에서도 신을 이야기 하지만 유태교의 신과 같은 부족신이 아니라, 그 신은 브라만이고 아트만과 일치 하는 것을 말하고, 이런 ‘범아일여’의 우파니샤드사상은 유태교의 유일신사상과 격이 다른 것이다.
그런데 아트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브라만교를 비판하면서 불교가 나왔기 때문에 지극히 철학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도의 철학적사상을 바탕으로 나온 종교가 불교이기 때문에 불교는 기본적으로 철학적 종교일 수 밖에 없다는 이유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 이전의 유태교로 하는 근본적인 철학도 사상도 없는 매우 원시적인 민족종교를 뿌리로 하여 나왔기 때문에 불교와 격이 다른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불교와 기독교는 품격이 다른 종교인 것이다.
미래에 왜 불교인가
‘불살생’과 ‘불살인’이라는 두 가지의 키워드로 불교와 기독교의 계율을 살펴 보았다. 그렇다면 미래에 어떤 종교가 살아 남을까. 분명한 사실은 보편적이고 타당한 교리를 가진 종교가 살아 남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로서 가면 갈수록 사람들의 지적 능력이 향상되고 자연과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 질수록 선택하는 종교도 달라질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런 종교중의 하나로서 선각자들은 불교를 지목 하였다.
그런 이유중의 하나로서 불교는 지구상 남아 있는 고등 종교 중에 역사가 가장 오래된 종교이고 또 ‘신’이 없이도 성립된 종교로서 지구상 유일하다는 것이다.
만일 불교가 종교로서 경쟁력이 없었다면 지구상에 수 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져간 그저 그렇고 그런 종교중의 하나 이었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인구증가로 땅이 미어 터지든 말든 생육하고 번성해야 하고, 자원이 고갈 되어 바닥이 나든 말든 성장해야 하며, 환경이 오염 되는 말든 모든 땅을 다스리고 정복해야 하는 논리가 팽배해 있다.
이런 자연정복주의와 인간중심주의 논리로 미래를 기약 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뜻있는 학자들은 예측 하고 있었다.
그런 학자 중에 현대물리학자이자 신과학운동의 기수인 ‘프리초프 카프라’는 30년 전에 기독교적 서구의 패러다임이 불교를 비롯한 동양의 패러다임으로 바뀔 것이라고 이미 고전이 된 그의 책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에서 밝혔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미래에는 ‘불살인’이 아닌 ‘불살생’의 논리를 가진 불교사상이 각광을 받을 것임에 틀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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