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버려야겠다는 마음까지 버렸는데, 극락왕생과 49재는 법정스님에 대한 모독

담마다사 이병욱 2010. 3. 15. 10:59

 

버려야겠다는 마음까지 버렸는데, 극락왕생발원과 49재는 법정스님에 대한 모독

 

 

 

 

 

 

 

 

전 정부에서 총리까지 지낸 여성정치인이 법정스님에 대한 추모의 글을 발표 하였는데,  극락왕생이라는 용어를 사용 하였다. 신문에 발표된 그 글은 인터넷의 여러사이트에서도 소개 되었다.

 

또 스님과 인연이 있는 사찰들에서는 49를 지낸다고 한다. 스님의 죽음을 입적이라고 이미 표현 하였는데 극락왕생은 무엇이고 또 49재는 무엇이란 말인가.

 

국민들이 감동한 이유

 

스님은 한 평생 무소유를 실천 하다 가신 분이다. 만일 말로만 무소유를 주장 하고 실천이 따르지 않았다면 국민적 감동을 결코 주지 않았을 것이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언행일치를 스스로 보여주었기 때문에 국민들이 감동한 것이다.

 

그런 스님에 대하여 일부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썩어 빠진 종단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고, 대중들의 삶과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이미 수십권에 달하는 책을 통하여 소통 하여 왔다. 비록 산골 오두막에 거처 하였더라도 세상에 메시지를 항상 전달 하였던 것이다.

 

그런 메시지 중에 무소유 보다 더 강력한 설법이 있었을까.

 

출가의 목적은

 

우리들이 사는 세상을 불교적 세계관으로 본다면 욕계이다. 그 것도 사람으로 태어 났으니 선처에 속한다.

 

그런데 욕계에 살면서도 욕계를 떠나서 사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수행자들이다. 몸은 비록 욕계에 있지만 그 추구 하는 이상은 욕계를 벗어나 있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출가수행자를 들 수 있다.

 

출가수행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여러 출가의 동기가 있지만 생로병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부처님의 출가동기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생로병사를 두 글자로 줄이면 생사이다. 따라서 출가의 목적은 생사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삶과 죽음은 매우 강렬한 용어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살아가면서도 대체로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아니 의도적으로 피하는 지 모른다.

 

그런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 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까.

 

버려야겠다는 마음까지 버렸는데

 

잘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웰다잉 열풍이 일어 나는 요인도 잘 죽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잘 죽으려면 잘 살아야 된다고 한다. 또 어떻게 해야 잘 죽을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과 대부분의 종교에서 죽은 다음에 천국이나 천상 또는 극락에 태어나기를 바란다. 키워드는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결국 좋은 곳에서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살아 간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수행자들이 좋은 곳에 태어나기 위하여 수행을 한다고 볼 수 있을까. 그 것도 모든 것을 버리고 버려야 겠다는 마음까지도 버려 가면서 얻는 다는 것이 고작 천상이나 극락과 같이 선처에 태어나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굳이 모든 것을 버려 가면서 까지 수행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타종교인은 모든 것을 소유하면서도 천국 간다고 하지 않던가.

 

출세간의 목표는

 

불교의 수행자가 추구 하는 목표는 세간과 다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세간과 출세간으로 나눈다.

 

그렇다고 해서 출세간이 세간을 떠나 다른 세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열반을 실현한 성자들의 마음의 흐름출세간이라고 구분 짖고 있을 뿐이다.

 

천상이나 천국 또는 극락에 나고자 한다면 그것은 세간적인 목표이다. 다시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세간의 목표는 열반과 해탈을 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나고 죽는 것을 반복 하는 것을 초기불교용어로 재생(再生, rebirth)이라 한다. 그런데 재생은 환생과 다르다는 것이다. 환생은 변치 않는 자아가 있어서 금생에서 내생으로 재육화(再肉化, reincarnation)하는 것을 말한다.

 

힌두교를 비롯하여 유일신 종교등 지구상의 대부분의 종교가 이와 같은 영혼불멸의 재육화를 말한다. 그래서 천국이나 천상, 극락과 같은 좋은 곳에 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재생은 윤회의 주체가 없이원인과 결과에 따른 연기적 흐름으로 보는 것이다.

 

네가지의 세상에

 

열반과 해탈 없이 죽게 되면 반드시 4가지의 세상에 태어난다고 하였다. 인식과정을 벗어난 그 세상을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불교의 네가지 세계관

세 상

 

수 명

수 행

감각기관

  

악처(4)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

업대로

살아감

너무 고통스러워 수행할 수 없음

, , , , , 마노 모두 있음

고통을 느껴야 하기 때문에

욕계선처(7)

인간

, , , , , 마노 모두있거나 부분적 결여

업에 따르기 때문에

욕계천상(6)

수명대로 살아감

선행공덕을 지은 인간들이 가는 곳

, , , , , 마노 모두 있음

비출가자/결혼한자,

힌두교적 이상세계,

색계(16)

초선(3), 2(3), 3(3), 4선천(7)

선정수행자들이 가는 곳

, , 마노 만 있음

불교의 선적 이상세계,

출가자

무색계(4)

초선, 2, 3, 4선천

마노 만 있음

 

 

 

한 존재가 죽게 되면 4가지 세상 중에 한 곳에 태어난다는 것이 불교의 세계관이다.

 

정법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에

 

4가지 세상 중에 악처세상의 4곳과 인간은 수명이 보장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지은 ()대로살아가고, 욕계천상이상의 경우 수명이 보장 되어 있어서 수명대로살아간다는 것이다.

 

천상의 수명은 상상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시간이다. 욕계천상중에 가장 낮은 천상, 즉 인간 바로 위에 있다는 사왕천의 경우 500천상년인데 인간으로 따지면 9백만년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천상 중에서 가장 수명이 긴 천상이 비상비비상처인데 그 수명은 무려 84천대겁이라 하다.

 

그래서 부처님의 정법에 태어 나지 않은 존재들, , 선정수행만 있었던 시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고 한다.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은 자기가 지은 업대로 살아야 하고,

천상에 사는 존재는 자기가 사는 세상의 수명대로 살아야 한다.

 

 

부처님의 정법이 존재하면 업대로 살지 않아도 되고, 수명대로 살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불생불사의 문을 열어 놓았기 때문이다. , 존재로 다시 태어나지 않은 법을 펼쳤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런 가르침이 정리된 경전이 법구경, 숫따니빠따와 같이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니까야라고 볼 수 있다.

 

84천대겁을 사는 존재들이라도

 

부처님의 가르침만 제대로 따르면 다시는 존재로 태어날 일이 없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좋은 곳에 태어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다.

 

비록 84천대겁을 사는 존재들이라도 수명이 다하면 내려 와야 한다. 아무리 선정수행을 하여 최고의 경지에 올라 갔다 하더라도 윤회의 고리를 끊어 버리지 못하면 여전히 낮은 세계와 연결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미얀마에 다음과 같은 속담이 있다고 한다.

 

 

“범천에서 빛나더라도 돼지우리에서는 꿀꿀 거리네”

 

 

몸에서 나는 빛으로 번쩍이는 광채로 가득한 범천에서의 삶이 끝나고, 그의 선업의 결과와 선정의 힘이 다하면 그 즉시 돼지와 같은 축생으로 태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극락왕생과 49재는

 

법정스님의 입적()’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애도 한다. 입적이라는 의미는 적멸(寂滅)’ 과 같은 말이다. 사라져 없어짐이다. 또 열반(涅槃, 닙바나)과도 같은 말이다. 그 말 뜻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것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전 정부의 여성총리를 비롯하여 언론과 매스컴에서는 극락왕생을 발원 한다고 한다. 더구나 관련 사찰에서는 49재를 지낸다고 하니 입적의 의미와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단지 좋은 곳에 태어 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버려야 겠다는 마음까지 버리면서 무소유를 실천한 것일까. 초기불교에 대하여 일찍이 많은 관심을 기울이었던 스님이 부처님의 원음이라 전해 지는 법구경과 숫따니빠따를 번역하여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소개한 일은 잘 알려져 있다.

 

스님이 번역한  숫따니빠따의 내용 중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온갖 삿된 소견에 팔리지 말고,

계를 지키고 지견 (知見)을 갖추어

모든 욕망에 대한 탐착을 버린 사람은

결코 다시는 모태에 드는 일이 없을 것이다.

<숫따니빠따의 자애경(metta-sutta, Sn 1.8) 152게송에서>

 

 

계를 지키고 지견을 갖추어 감각적 욕망을 비롯한 모든 욕망을 내려 놓았을 때 다시 태어날 일은 없을 것이다라는 게송이다.

 

이 게송과 같은 삷을 스님이 살아갔기 때문에 다시 태어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49를 봉행 한다면 스님에 대한 모독이 아닐까.

 

 

 

2010-03-1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