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염세주의 종교일까, 진리중의 진리 사성제와 연기법의
글을 쓰다가
글을 쓰다가 저장을 못하여 또는 정전으로 인하여 날려 버리는 경우가 있다. 또 여러 시간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작업한 데이터가 컴퓨터를 잘 다룰 줄 몰라 한 순간에 날아가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어쩔 수 없이 다시 작업 하게 된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같은 일을 반복 하는 것 만큼 ‘지겨운’ 일은 없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다시태어 나고 싶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가 ‘시험 보는 것’이라 한다. 지금도 시험을 잘 못 봐서 꿈에 끙끙 거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마다 한 가지 이유를 가지고 있는데, 공통적인 사항은 같은 일을 반복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반복하는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 하고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아이를 낳은 엄마가 다음에는 절대로 애를 낳지 않겠다고 다짐 하지만, 둘째, 셋째 아이를 갖는 이유는 매번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만일 똑 같은 상황이라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잘 만들어진 영화를 처음 볼 때는 흥미진진 하지만 두 번, 세 번, 여러 번 본다면 그 것은 차라리 ‘고문’에 가깝다. 그러나 비슷한 패턴의 드라마는 그다지 지겹지 않다.
대학입시에서 재수는 필수라고 하지만 삼수 사수는 선택이라고 하여 망설이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매일 똑 같은 일을 하고 똑 같은 일이 반복 되지만 지겨움과 권태를 느끼지 않는 이유는 ‘일상의 패턴이 조금씩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어제가 오늘의 연속이고, 오늘은 내일의 결과이기 때문에 같지 않은 것이다.
태어나지 않았다면
인생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현생은 전생의 결과이고, 현생은 또한 미래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살아 가는 것이다. 만일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면 그 것 만큼 지겹고 권태로운 일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영원히 사는 천국을 닫힌 지옥이라고 말하지 않던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하게 오래 살기를 바란다. 죽어서도 영원히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대부분의 지구상의 종교가 이 세계를 떠나 이상적인 세계를 제시 하며 영원히 행복 하게 잘 살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런 삶을 배격한다. 영원히 오래 살기도 바라지 않고 죽지도 않기를 바란다. 그렇게 하려면 처음부터 태어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태어나지 않았다면 죽을 일도 없기 때문이다.
연기법의
모든 것은 태어남으로 인하여 비롯 된다. 그런 태어남에 대한 연기의 회전을 가장 잘 설명한 것이 연기법이다.
연기법의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此有故彼有, 차유고피유),
이것이 생하므로 저것이 생한다 (此生故彼生, 차생고피생).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此無故彼無, 차무고피무),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 (此滅故彼滅, 차멸고피멸).
(중아함경)
한역경전인 중아함경에 나오는 정형구이다. 이 연기송 만으로 왜 태어나고 죽어가는 것이 고통인가를 설명 하기에 그다지 ‘절박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단지 원인과 결과에 따른 ‘기계적인 작용’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니까야에서 보는
이 원인이 일어나면 저 결과가 일어난다.
이 원인이 멈추면 저 결과도 멈춘다,
그러므로 무명을 원인으로 상카라가 일어나고 괴로움이 있게 된다.
무명의 소멸과 함께 괴로움이 소멸할 때 까지
상카라등의 소멸이 뒤따른다.
(상윳따 니까야)
이 보다 더 구체적이고 더 가슴 절절하게 다가 오는 정형구가 있다. 윤회의 연기구조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12연기법이다.
스리랑카 불자들의 보드가야 대탑 옆에서 스님에게 법문을 듣고 있다.
사진; http://blog.daum.net/whoami555/13741955
12연기의
아비담마에서 볼 수 있는 그 12연기의
12연기
무명(無名, 아윗자, avijja)에서 업형성력인 상카라(行, 상카라, sankhara)가 일어난다.
상카라(行)에서 재생연결식(識. 윈냐나, vinnana)이 일어난다.
재생연결식(識)에서 정신-물질(名色, 나마루빠, nama-rupa)이 일어난다.
정신-물질(名色)에서 여섯 감각장소(六入, 사라야따나, salayatana)가 일어난다.
여섯 감각장소(六入)에서 감각접촉(觸, 팟사, phassa)이 일어난다.
감각접촉(觸)에서 느낌(受, 웨다나, vedana)이 일어난다.
느낌(受)에서 또 갈애(愛, 딴하, tanha)가 일어난다,
갈애(愛) 때문에 집착(取, 우빠다나, upadana)이 생겨난다.
집착(取)이 있기 때문에 업으로서의 존재(業有, 바와, bhava)가 있다.
업으로서의 존재(業有)에서 태어남(生, 자띠, jati)이 있고,
태어남(生)은 늙음, 죽음, 근심, 탄식, 비탄(자라마라나, jara-marana)으로 이어 진다.
이렇게 괴로움의 총체적인 무더기가 생겨나는 것이다.
12연기 정형구에서 마지막으로 나온 태어남은 늙음, 죽음, 근심, 탄식, 비탄으로 이어 진다고 하였다.
일단 태어남이 있으면 거기에는 반드시 늙음과 죽음, 그리고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있는 비탄, 탄식, 고통, 불만족, 번뇌등 모든 종류의 괴로움이 따라 오게 된다는 것이다.
불교는 염세주의 종교일까
어떤 이는 불교를 ‘염세주의’ 종교라고 비하하기도 한다. 괴로움만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또 어떤 이는 불교를 ‘허무주의’ 종교라고 말한다. ‘이 세계’ 보다 ‘저 세계’를 말 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불교가 단지 비탄, 탄식, 고통, 불만족, 번뇌등 온갖 종류의 괴로움만 나열하고 ‘저 다른 세상’에 대하여만 이야기 한다면 불교는 틀림 없는 염세주의 종교이고, 허무주의 종교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괴로움의 원인과 함께 괴로움을 소멸 하는 방법도 함께 설하였다는 사실이다. 그 것이 유명한 사성제(四聖諦)이다.
네가지 성스러운 진리라는 뜻의 사성제는 한자어로 ‘고집멸도(苦集滅道)’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한자용어로 이루어진 고집멸도가 외우기에는 적합하지만 그 뜻을 알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이 있다.
사성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가슴에 와 닿게 설명하려면 사성제
사성제의
아미담마에서 사성제
네가지 성스런 진리(四聖諦)는
괴로움의 성스런 진리(苦聖諦)
괴로움이 일어 나는 성스런 진리(苦集聖諦)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런 진리(苦滅聖諦)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런 진리(苦滅道聖諦)
이다.
인솔하는 스님 없이도 스리랑카의 불자들이 초전법륜경을 독송하고 있다(사르나트).
사진; http://blog.daum.net/whoami555/13741955
이 것이 사성제의 정형구이다. 모두 ‘괴로움’이라는 용어가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고, 반드시 ‘성스런 진리’라는 표현을 사용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성제는 부처님이 윤회의 일어남을 설하면서 그 것이 일어나는 원인과 함께, 윤회의 멸함과 그 방법도 함께 설한 것이다.
괴로움의 원인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괴로움에 대하여 철저하게 알아야 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그 괴로움의 원인을 끊어야 하고, 실현해야 하고, 닦아야 하는 것이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주 어 |
술 어 |
빠알리어 |
괴로움을 |
철저하게 알아야 하고 |
Parinneyya(빠린네이야) |
원인을 |
끊어야 하고 |
Pahatabba(빠하땁바) |
멸을 |
실현해야 하고 |
Saccikatabba(삿찌깝땁바) |
도를 |
닦아야 한다 |
Bhavetabba(바웨땁바) |
대체적으로 괴로움의 원인을 ‘갈애’와 ‘욕망’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갈애와 갈애의 소멸과 갈애의 소멸에 이르는 길.
욕망과 욕망을 기뻐함과 욕망의 소멸과 욕망의 소멸에 이르는 길.
이렇게 오직 넷을 설한 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사성제의 핵심은 ‘고’의 ‘멸’이다. 따라서 연기로 본다면 고와 멸의 ‘2지연기’라 볼 수 있다. 이 2지연기를 좀 더 확장 하여 윤회의 생성과 소멸 구조를 설명 한 것이 12지 연기이다.
이처럼 불교는 괴로움만 말한 것이 아니라 그 소멸에 이르는 방법도 제시 하였기 때문에 결코 염세주의적 종교가 아니다.
또 이 세계를 떠나 다른 세계를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허무주의 적 종교도 아니다.
보드가야에 있는 불족
사진; http://blog.daum.net/whoami555/13741955
결국 세상이 허망하다는 것인데
이세계가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고 보고, 저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 허무주의 종교이다. 대표적으로 ‘기독교’를 들 수 있다.
기독교는 이 세계를 철저하게 부정한다. 그리고 영원히 변치 않는 이상세계로 가고자 한다. 그런 측면으로 보았을 때 이 세계를 부정 하는 종교는 모두 허무주의 종교라 볼 수 있다.
그런 범주에 대승불교도 예외 일 수 없다. 천상을 이야기 하고 극락에 가는 것을 목표로 삼는 한 허무주의 종교, 염세주의 종교라는 오명을 벗어 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최근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스님의 글을 보면 실망스럽다. 불교평론의 열린논단에서 다음과 같이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
‘세상이 무상하고 무아하다면 결국 세상이 허망하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인가?’ ‘목숨은 과연 연장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가족생활은 해야 하는가?’ ‘세상이 허망하다면 사회는 바람직하도록 개조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세상이 허망하다는 이론이 세상을 변화시킬 방향과 방법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불교평론, 깨달음과역사-현응스님,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917)
초기불교의 연기론이 세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일깨움을 주었지만, 세상을 어떻게 변화하고 바꾸어야 하는지에 대하여는 설명하지 않았다고 비판 하고 있다.
그래서 초기불교에서 늘 말하는 무상 고 무아의 가르침은 결국 ‘허망’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두 분의 부처님이 계신데
그런데 글의 중간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즉 무상, 무아, 공의 세계관을 얻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인 것이다. 이에 대한 부처님의 답은 “머묾 없이 마음을 내라! (응무소주이생기심)”이다. 아, 인, 중생, 수자라는 각종 상은 허망한 것이다. 그래서 그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집착하거나 머무는 마음으로 해서는 안 된다. 나아가서는 결국 머물지 않으면서도 마음을 내어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금강경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인 ‘응무소주이생기심’을 언급 하고 있다. 무상 고 무아의 세계관을 얻은 사람은 각종 상(相)을 버리고 집착 없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고 ‘부처님’께서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 부처님은 어느 부처님일까.
부처님은 한 분인데 경전상으로 보면 두 분이다. 글의 내용으로 본다면 한 분의 부처님은 무상 고 무아를 설하였지만 허망한 논리라고 반박 받는 역사적 부처님인 ‘고따마 붓다’이고, 또 한 분의 부처님은 집착 없이 마음을 내라고 말한 ‘대승경전에 나오는 부처님’이다.
역사적 부처님과 경전상의 부처님, 이렇게 한국불교에는 두분의 부처님이 계시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적 부처님의 무상 고 무아의 논리가 허망 하다는 것이다. 허망 하다는 것은 허무한 것이고, 염세적이라는 말과 같다. 졸지에 역사적 부처님인 고따마 붓다가 ‘허무주의자’ 내지는 ‘염세주의자’로 몰리는 순간이다.
태국불자들이 라자가하 사리뿟따 동굴에서 경전을 독송하고 있다
사진; http://blog.daum.net/whoami555/13741955
역사적인 부처님은
역사적인 부처님인 고따마 붓다는 이 세계를 떠나 저 세계를 결코 이야기 하지 않았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내 몸과 마음’에서 벌어지고 있는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아는 방법을 제시 하였기 때문에 염세주의와 허무주의가 끼여들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부처님이 설한 적이 없는 ‘실재론’이나 ‘개념’을 만들어 내어 이세계와 저세계로 나누어 설명하였다면, 바로 그것이 이 세계를 부정 하고 저세계만 추구 하는 염세주의적이고 허무주의적 교리라 아니 할 수 없다.
역사적인 부처님이 말씀하신 불교의 교리는 ‘사성제’로부터 시작 된다. 그 실천 방법은 ‘팔정도’이다.
사성제와 팔정도야말로 불교의 뼈대중의 뼈대라 볼 수 있다. 그런 팔정도와 사정제의 빠알리 어원을 보면 모두 아리야(ariya)가 붙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리야자가 붙은 용어로서 사성제(ariyasacca, 아리야 삿짜)와 팔정도(Ariya-atthangika-magga, 아리야 아땅기까 막가)뿐이다. 아리야는 빠알리어로 ‘성스럽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사성제와 팔정도는 매우 성스런 진리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사성제와 팔정도에 대하여 부처님은 법구경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Maggānaṭṭhaṇgiko seṭṭho 막가낫탕기꼬 셋토
saccānaṃ caturo padā 삿짜낭 짜뚜로 빠다
virāgo seṭṭho dhammānaṃ 위라고 셋토 담마낭
dvipadānañca cakkhumā 드위빠다난짜 짝쿠마
길로서는 팔정성도가 최상이요
진리로서는 사성제가 가장 성스럽고
욕망을 다스리는 담마가 으뜸이며
인간과 천상을 통틀어 두 발 가진 생명 가운데
붇다야말로 최고의 성자이다.
(법구경 273게송)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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