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지금 잠들면 내일이 올지 내생이 올지, 업이 익는 순서에 따른 과보

담마다사 이병욱 2010. 3. 16. 10:50

 

지금 잠들면 내일이 올지 내생이 올지, 업이 익는 순서에 따른 과보

 

 

 

 

 

 

 

사람이 죽으면

 

지금 잠이 들면 내일이 올지 아니면 내생이 올지 아무도 모른다.”

 

 

이 말을 처음 접하였을 때 대단히 혼란스러웠다. 한국인들의 상식으로 보았을 때 죽으면 당연히 49일 동안 영혼이 머물다가 다음생에 태어 날 곳으로 간다고 알고 있었는데, 바로 내생이 올 수도 있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의문이 풀린 것은 초기불교를 접하고 나서 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중유(中有)’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죽으면 막 바로 다음 생이 결정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죽으면 일정기간 영혼이 머문다는 중유는 북방불교문화의 산물이다. 반면에 남방불교에서는 무간(無間)으로 본다. 간격 없이 마치 한 생각이 일어 났다 사라지듯이, 삶과 죽음 사이의 간격을 무간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고정불변하여 영원히 변치 않는 나라고 할만한 영혼이 없고, 다만 그런 나를 원인과 결과에 따른 연기적 흐름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이 북방대승불교와 남방상좌불교를 구분 하는 가장 큰 차이점 중의 하나일 것이다.

 

울다가 잠이 드는 아이

 

울다가 잠이 드는 아이의 모습은 평온하다. 떼쓰다 혼나고 한바탕 난리를 피우다가 잠이든 모습은 마치 치열한 전쟁 중에 일시 싸움을 중단 하고 휴전에 들어간 것과 같은 모습이다.

 

매일 전쟁을 치루다시피 살아 가는 현대인들에게 잠이야말로 보약과도 같은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괴롭고 불쾌 하였던 경험도 잠을 자고 나면 씻은듯이 사라져서 새로운 활력소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잠을 잘 자고 났다고 해서 마치 프로그램을 리세트(reset) 하듯이 어제 벌어졌던 사건 사고가 깨끗이 사라졌을 까. 아직 해결이 안된 사항은 여전히 남아 있을 뿐이다.

 

아직 결재되지 않아 지급 되어야 할 돈이미결재 대금이다. 그 돈은 언젠가 지불 되어야 한다. 결재가 되어야 모든 것이 해결 되어서 다시는 더 이상 집착하지 않게 된다.

 

미결사항은 미결재대금만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삶의 과정에서 아직 해결하고 넘어가지 못한 사항은 모두 미결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끝나버리기를

 

아침에 일어 났을 때 기분은 새롭지만 여전히 현실은 바뀐 것이 없다. 어제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다면 오늘 빚 갚으라는 청구서는 날라 올 것이다.

 

마찬가지로 살아가면서 빚만 잔뜩 짊어지고 죽었다면 다음 생에 빚 갚으라는 독촉장은 여지 없이 날라 올 것이다.

 

자신이 지은 업이 결코 없었던 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이 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자살을 택한다. 죽은 뒤에 모든 것이 끝나버리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은 건강하고 행복 하게 오래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누구나 맞이 하게 되는 죽음에 대해서는 좀처럼 생각 하지 않고 회피 하려 한다. 그러나 강렬하게 죽음을 바라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현실과 불화 때문이다. 더구나 그 현실이 자신의 힘으로 감당이 되지 않았을 때 모든 것이 끝나버리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죽기를 바라는 것도 불교에서는 하나의 갈애(渴愛)로 보는 것이다.

 

세가지 갈애가 있는데

 

갈애에는 크게 세가지가 있다.

 

첫째, 감각적욕망에 대한 갈애이다. 맛있고 달콤한 음식, 보드라운 잠자리와 이성과의 거친사랑등 식욕, 색욕, 안락욕, 재물욕, 명예욕과 같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추구 하는 오욕락을 말한다.

 

둘째, 존재에 대한 갈애이다. 오래살고 싶은 욕망과 죽어서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몸은 비록 죽어도 정신만은 영원히 살 것이라 생각 하는 것이다. 천국이나 천상, 극락에 태어나 영원히 오래 살기를 바란다고 해서 상주론(常住論)이라 하고, 그런 견해를 상견(常見)이라 한다.

 

셋째, 비존재에 대한 갈애이다. 죽어서 모든 것이 끝나 버리기를 바라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라고 생각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내생을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현생을 즐길 뿐이라고 생각하는 물질위주의 유물론자들에게 볼 수 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라고 해서 단멸론(斷滅論)이라 하고, 그런 견해를 단견(斷見)이라 한다.

 

불행의 원인은

 

죽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끝나 버리고, 없던 일이 되어 버린다면 도덕적으로도 문제 될 것이 없을 것이다. 인생이 원타임(One time)에 불과 하다면 누가 도덕적인 삶과 봉사 하는 삶을 살아갈까. 하다 안되면 죽어 버리면 되기 때문에 매우 무책임한 삶을 살아 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갈애가 발전 되면 집착으로 된다. 강렬하게 바란 것이 고착화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갈애집착이 불행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갈애와 집착으로 말미암아 업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12연기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무명 - 업의형성 - 명색 - 육입 - - (갈애) – (집착) – (업의생성) - - 노사

 

 

업이 익는 순서에 따라

 

그런데 한번 지은 업은 언젠가 인연이 되면 업의 과보 즉, 업보로 나타난 다는 것이다. 그런 업은 빨리 익을 수도 있고 늦게 익을 수도 있다.

 

업이 성숙하는 시간에 따라 아비담마에서는 네가지로 나눈다.

 

 

첫째, 금생에 받는 업

둘째, 다음 생에 받는 업

셋째, 받을 시기가 확정 되지 않은 업

넷째, 효력을 상실한 업

 

 

이에 대한 각묵스님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아비담마에 의하면 인식과정에서 일어나는 일곱 가지의 속행(자와나) 과정이 업을 짓는 과정으로 나와 있다. 이 가운데서 첫 번째 자와나 과정에서 일어나는 의도적 행위가 금생에 과보를 가져오는 업이고 마지막 일곱 번째 과정에서 일어나는 의도적 행위가 다음 생에 과보를 가져오는 업이고 중간의 다섯 번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의도적 행위가 받는 시기가 확정되지 않은 업이 된다.

 

그런데 효력을 상실한 업이 있다. 즉 첫 번째와 일곱 번째 자와나 과정에서 지은 업이 각각 금생과 내생에 과보를 가져올 기회를 잃어버린 경우를 말한다. 그러나 자와나 과정은 일어나면 반드시 일곱 번이 일어나기 때문에 첫 번째와 마지막 일곱 번째 자와나 과정에서 지은 업이 과보를 가져올 기회를 잃어버렸다 할지라도 두 번째부터 여섯 번째까지에서 일으킨 의도적 행위들이 있기 때문에 일단 자와나 과정이 일어나서 업을 지으면 그 과보는 반드시 있게 된다는 것이다.

 

 

죽는 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 때,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방해 하는 듯한 사건들도 알고 보면 업이 익어서 일 것이다.

 

따라서 죽는 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 뿐이고 그에 대한 과보는 반드시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 아라한의 경우만 예외로 한다.

 

아라한의 경우는 마지막의 임종시에 과거에서 지은 모든 업은 이 효력이 없는 업이 되어 버린다. 만일 아라한이 임종했는데도 모든 업이 효력을 상실한 업이 되지 않으면 아라한도 또 태어나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업에 관한한 아라한은 금생이 마지막 몸이다.

 

아라한은 죽고 나면 어떻게 되는가는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무기(無記)라고 말한다.

 

업을 짖지 않으려면

 

업을 짖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초기불교와 상좌불교 전통에 따르면 업에는 선업불선업둘 뿐이라는 것이다. 선업과 불선업을 짖게 되면 업이 생성 되어서 윤회를 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선업도 짖지 않고, 불선업도 짖지 않는다면 업의 생성이 되지 않기 때문에 윤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마음을 무인작용심(無因作用心, kiriya-citta)이라 한다. 원인 없이 단지 작용만 하는마음인 것이다.

 

이런 무인작용심으로 인하여 아라한은 어떤 업도 짖지 않기 때문에 사후에 어떤 몸도 받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초기경에 다음과 같은 정형구로서 많이 언급 되고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2010-03-16

진흙속의연꽃